두 번 고인 황제놀음 (32)
아버지의 마음으로
100년 만에 만난 딸이 눈이 멀었다니.
머리를 망치로 한 대 맞은 기분이다.
“……놀라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리세라가 면사를 걷어 올린 손을 치우려고 한다.
“가리지 마세요.”
경악한 와중에도 입은 반사적으로 움직인다.
소중한 딸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는 안 된다.
“죄송합니다. 처음 뵙는 황녀님의 존안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이 미천한 인간이 숨이 막혔습니다. 부디 그 아름다움을 계속 감상하는 영광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보기에 불편하실 텐데…… 괜찮으실까요?”
“두근거려서 참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이게 바로 사랑?”
내가 적당히 말하자 리세라는 웃으면서 면사를 걷어 버렸다.
이해와 관용의 미소.
……알고 있다.
내가 경악하고 낸 신음이었다는 걸.
허둥지둥 둘러대는 것도.
이 아이는 이미 알고 있다.
알고도 모른 척, 속아 넘어가 주는 것이다.
책상 아래 빈 공간에서 나를 올려다볼 때와 똑같았으니까.
일에 열중하던 내가 뒤늦게 깨닫고는 미안해할 때.
아빠를 보고만 있어도 재미있었다고 웃던 얼굴이었다.
“비밀로 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맹세하겠습니다.”
나는 대답하면서도 생각을 정리했다.
내가 살아 있을 적에 리세라는 밝고 건강한 아이였다.
시력 상실 전조 따위는 없었다.
100년 사이에 백내장? 망막박리?
아니, 설사 시력을 잃는 병에 걸렸어도 고칠 수 있을 것이다.
천족의 치료약이 구하기 힘들다지만 그래도 황녀인데?
“……알리시아를 만나려는 이유가 그거입니까?”
“예. 하프엘프에게만 생기는…… 특이한 유전병이라고 합니다.”
나는 리세라를 빤히 바라보았다.
허공을 보는 내 딸아이를.
“정말입니까?”
“……예?”
“그게 정말입니까, 리세라 황녀님?”
리세라가 대답하기에 앞서, 시녀가 벌컥 화를 냈다.
“무례하긴! 지금 황녀님을 추궁하는 겁니까?”
“조용히 해.”
나는 시녀를 쏘아보며 을러댔다.
반사적인 포효.
“입 다물고 물러나.”
연속으로 사용하자 시녀가 숨이 막힌 얼굴을 했다.
닥치게 만든 나는 리세라를 보았다.
“정말입니까, 황녀님?”
“……예, 그렇습니다.”
“…….”
나는 눈을 감았다.
정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협력하겠습니다.”
“감사하지만 구체적인 날짜를 알 수 있을까요? 앞으로의 일정을 생각해 봐야 해서요.”
“내일, 아니 사흘 안에는 자리를 마련해 보겠습니다. 오늘은…….”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먼 길을 오느라 피곤하셨을 텐데 쉬시죠. 서관 전체를 내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리브라타의 환대에 누가 되지 않도록 몸가짐을 바로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심심하시면 동관으로 와서 찾아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하고 싶은 말, 묻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미룬다.
“나가자, 멜리우스.”
다 정리한 다음이다.
나는 멜리우스를 데리고 돌아다녔다.
백작과 로데릭을 만나서 만반의 경계 태세를 갖추게 하고.
서관은 황녀와 호위들이 머무는 곳, 사람을 전부 빼서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고.
한편으로는 알리시아의 경비를 강화했다.
“일단 사흘이라고 유예를 뒀으니까 오늘은 엘프들도 가만히 있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경계한다.”
“…….”
점검을 마친 나는 멜리우스를 데리고 별채로 돌아왔다.
내밀한 이야기를 나누려면 엘프들 귀가 없는 곳이 좋다.
한데 별채 앞에는 다크엘프, 하인켈이 있었다.
하인켈은 나를 보곤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엘프 눈에 띄면 이야기가 복잡해질 것 같아서 잠시 피해 있었습니다.”
“너도 들어와.”
“예? 멜리우스 씨, 허락은요?”
“괜찮아, 할 말 있을 테니까.”
그렇게 나는 멜리우스와 하인켈을 데리고 별채의 거실에 앉았다.
멜리우스는 내내 입을 다물고는 말이 없었다.
나는 놈의 얼굴을 노려보았고.
하인켈은 머뭇거리고 있었다.
“하인켈.”
“예?”
“너 알고 있었냐?”
“4황녀에 대해서 말입니까?”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말하기 싫으면 마라.”
“죄송합니다. 하지만 정말 몰랐습니다. 아니, 더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
“윗분들, 여왕님은 아실지도 모릅니다만 저에게 정보가 공유된 적은 없습니다. 다만 4황녀를 목격하게 되면 정보를 모아 보라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더 자세히 말해.”
“4황녀는 대외 활동이 극단적으로 적습니다. 그에 대해서 알아보란 이야기였습니다.”
“네 짐작은?”
하인켈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신변에 어떤 이상이 생긴 거 아닐까 합니다. 가령 몸이 약하다거나.”
“그게 끝이냐?”
“……면사를 쓰고 있었으니 얼굴에 화상이나 흉터가 있지 않을까 의심했습니다.”
“지금 나 바보 취급 하냐.”
나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기가 막힌다.
“황녀가 이동할 때 시녀들이 앞뒤로 붙어 다녔지. 걸음은 이상할 정도로 느렸어. 현장 요원이 그 의미를 모를까?”
“…….”
시력을 잃은 사람은 청력이 비상해진다지?
하물며 원래도 귀가 밝은 엘프의 피가 흐른다.
리세라는 시녀의 발소리를 듣고 따라 움직이는 것이리라.
내가 건넨 서류 사본은 시녀가 챙겨 버리고.
여기저기 구멍이 많은데 요원인 하인켈이 모를 리가.
“천족의 치료약이 있어. 황녀가 그걸 못 구한다는 건 말이 안 돼. 그렇지?”
“……전 현장 요원입니다. 제 자의로 판단하는 건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래? 알겠다. 멜리우스.”
나는 멜리우스를 돌아보았다.
놈은 무표정하게 나를 보고 있었다.
“황녀가 저렇게 된 거 알고 있었지?”
“알았다.”
“어떻게 된 거야? 치료할 수 있을 텐데?”
“방금 설명을 들었잖나. 하프엘프 사이에서만 발현되는 특이한 유전적 질병이라고. 해결하고자 하프엘프를 만나고 다닌다고.”
“계속 둘러댈래? 그럼 크로셀과 엘프들 사이에서 오간 거래는 뭔데?”
“황녀가 시력을 잃었다는 건 큰 오점이니까. 알려져서는 안 되는 비밀이니까.”
“너, 지금 해 보자는…….”
“거짓말입니다.”
하인켈의 목소리.
무릎에 양손을 올린 하인켈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멜리우스 씨는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다크엘프, 그 이상의 이야기를 꺼내지 마라. 현장 요원에겐 그걸 말할 자격이 없을 텐데?”
“좆까십쇼.”
하인켈은 단호하게 말하고는 나를 보았다.
“초대 황제, 시릭 카라카스의 자식들 중에서 단 한 사람이 아주 큰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이는 종족 전체가 고뇌하는 문제입니다.”
하인켈이 쥐어짜는 목소리로 고했다.
“시릭 카라카스의 넷째 딸, 4황녀는 불임입니다.”
“뭐?”
“4황녀는 하프엘프입니다. 하프엘프는 자식을 못 낳습니다.”
“그게 무슨…….”
하프엘프는 1대로 끝난다.
당연한 이야기잖아?
당연한.
“…….”
오싹해졌다.
내가 리세라를 보았을 때부턴 느끼던 두려움.
그 실체가 뭔지 깨달았다.
“야. 미친 새끼들아.”
“…….”
내가 노려봐도 멜리우스는 눈을 감고 있었다.
크로셀 후작과 엘프와의 거래.
크로셀 후작이 제국은 썩었다고 한 것.
엘프들에게 1년 주기로 검사받던 알리시아.
만일을 대비한다는 이유로 약혼자가 없는 장남 로데릭.
그리고 눈이 멀어 버린 리세라.
시력 상실은 천족의 치료약으로 고칠 수 있을 텐데, 숨기고 산 이유.
모두 하나로 연결된다.
“……리세라가 애를 낳을 수 있는 몸으로 만들려고 했던 거냐? 시력 상실은 그 부작용이고?”
인체 실험.
그것 말곤 설명이 안 된다.
하인켈이 빠르게 말했다.
“인간들은 모르겠지만 인간이 아닌 종족들은 다들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100년 동안 2대 황제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언젠가는 나올 것이다. 나온다면…….”
“그 2대 황제와 초대 황제의 자식을 결혼시킨다.”
막내인 나는 약혼을 했는데 장남인 로데릭이 홀몸이었다.
혹시 만에 하나, 황제가 될 때를 대비해서.
배우자를 공란으로 둬야 했다.
“예! 그렇습니다! 이성이면 좋고, 동성이라면 남매를 골라서라도, 아니면 자식하고라도 맺어 주면 됩니다. 그러면 됩니다!”
“그러면 정통성이 생기지.”
나, 시릭은 100년 전에 죽었지만 이종족들에게는 그다지 먼 기억이 아니다.
당장 젊은 멜리우스도 먼발치서 나를 봤다잖은가?
내 이름과 핏줄은 여전히 이종족들에게 큰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래. 그래서 후원한 거였어. 그게 바로 12가문의 레이스였어.”
인간 중에서 다음 황제가 나오면, 내 피가 섞인 종족의 일원과 결혼시킨다.
정치적으로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결합이다.
그리고 자식을 낳으면 3대 황제고.
“하지만 리세라는 자식을 갖지 못해. 12가문의 레이스가 어떻게 끝나건, 엘프들이 승리하는 일은 없어.”
하프엘프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불가능하다.
“그랬어. 엘프들은 무조건 탈락, 그걸 바꾸려고 하프엘프들을 만든 거야. 아니, 생산했어! 리세라의 체질을 바꾸기 위해서, 실험할 수 있는 하프엘프를 만든 거지!”
“…….”
“그냥 일반적인 가정에서 만들면 일이 어디로 튈지 몰라. 카라카스는 험한 곳이니까. 그러니까 안전한 울타리가 쳐진 곳, 비밀을 은폐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곳이어야 했어. 그래서 귀족 집안에…… 탁란한 거야.”
탁란.
알리시아는 단순한 불륜으로 태어난 게 아니었다.
실험 목적으로 엘프들이 만든 것이다.
행동이 굼뜬 엘프들이 크로셀 후작의 사건에 이리도 빨리 반응한 이유, 알리시아를 회수하기 위해서였다!
“……이 개새끼들이 돌았네?”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온다.
온갖 생각이 든다.
애 엄마는 뭘 한 거야부터, 리세라는 이걸 알고 협조하는 건지.
멜리우스가 조용히 말했다.
“……장로들은 체질 개선이라고 말하더군.”
“야, 말이 되냐?”
백 번 양보해서, 아니 만 번 양보해서 그렇다 치자.
지구에도 불임 치료 클리닉 같은 게 있잖은가?
하지만 리세라는 눈이 멀어 버렸다.
절대로 정상적인 방식이 아니다.
“엉망이네. 미쳤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100년의 공백.
황제가 없는 것치곤 잘 돌아가나 싶었는데 아니었다.
나 없어졌다고 온갖 미친 짓이 있었고, 그중 하나가 이거다.
하인켈은 나직하게 말했다.
“……협조하겠습니다, 리젠 도련님.”
“뭐?”
“해결하시려고 할 거죠? 협조하겠습니다.”
하인켈은 결연했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너 지금 이거 말한 것만 해도 죽기 십상이야. 더 끼어들면 확실히 목 달아나.”
“……윗분들은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하인켈은 이를 악물었다.
“저도 어림짐작할 정도니 이미 당연히 알고 계시겠죠. 여왕님도 당연히 알고…… 방관하고 계신 겁니다.”
“…….”
“이 정보를 유용하게 쓸 기회를 노리시려고요. 잔뜩 뜸을 들였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쓰려고요. 엘프들을 몰락시키려고요.”
인체 실험.
칠죄신의 일도 있으니 제국법으로 금지다.
하물며 황제의 딸을 대상으로 한 인체 실험?
이게 세간에 알려지면 엘프들은 그야말로 치명타를 입을 것이다.
종족 전체의 문책.
하인켈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전 납득이 안 됩니다.”
“…….”
“저는 황제 폐하를 직접 뵌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스스로 황제 폐하께서 제국을 보는 눈이라고, 그분의 눈과 귀라고 생각하면서 활동했습니다. 정보를 모으고 치고 빠지고를 반복하면서도 제국을 위해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나는 폐하의 자랑스러운 수족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삭여 왔습니다.”
하인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폐하가 돌아가시고…… 여왕님은 변했습니다. 아니, 다크엘프들은 변했습니다. 우리들은 인류가 하나로 뭉쳐 싸워서 이룩한 제국의 안위를 등지고, 다크엘프들의 영화만을 꾀하고 있습니다.”
“…….”
“엘프들을 몰락시켜요? 통쾌하겠죠. 하지만 그 4천만 엘프들도 제국민입니다. 제국의 존치 자체가 흔들릴 수 있는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하인켈이 간청했다.
“지시를 내려 주시면 따르겠습니다.”
“……내 뭘 믿고 목숨까지 거냐?”
하인켈은 지금 목숨을 내던졌다.
윗선의 허락도 없이 기밀을 나에게 알려 준 데다가 협력하겠다니.
다른 다크엘프가 변절자라며 죽이러 올 것이다.
하인켈은 씩 웃었다.
“크로셀 후작을 확실히 막아 주셨잖습니까. 이분이라면 믿을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러냐?”
“……아, 그리고 샌드위치가 맛있더라고요.”
“아멜리아의 샌드위치가 맛있지.”
“목숨 걸기 충분하잖습니까?”
하인켈의 각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맙다.”
“샌드위치가 그렇게 맛있냐?”
멜리우스가 뚱하니 물었다.
내가 쏘아보았지만 멜리우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정말로 그렇게 맛있으면 나도 협조하지. 내놔라.”
“야, 네 뭘 믿고…….”
“내가 이런 촌구석에 처박힌 건 장로들을 반대하다가 밉보여서다.”
짧은 말.
리세라가 면사를 걷는 걸 멜리우스는 진심으로 막으려 했다.
나는 혀를 찼다.
“입을 게 없으면 거적때기라도 둘러야지. 젠장, 언제나 인재 부족이야.”
“어쩔 거지?”
“뭐긴 뭐야, 전쟁이지.”
딸아이는 놀란 나한테 오히려 미안해했다.
“그런 애가 거짓말을 했단 말이지.”
자식의 거짓말은 알면서도 속아 주는 게 부모 마음이라지?
더는 추궁할 수 없었다.
그러니 주변을 정리해 버린다.
“야, 멜리우스. 네가 아는 거 지금부터 다 말해라.”
“그다음에는?”
“정보 정리하고, 엘프들을 칠 준비 하고…….”
황제가 되고, 나는 사람을 잘 안 죽였다.
어지간한 중죄인도 그냥 채석장에 보내서 평생 돌 캐게 했다.
딱히 관대해서가 아니다.
이 시대에 사람은 곧 노동력이다.
죄인들도 살려 두고 노동력을 뽑아 먹는 게 효율적이니까.
하지만 이건 경고가 필요했다.
확실한 피의 경고가.
“싹 다 묻어 버린다.”
감히 내 딸을 건드리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