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31)
빛은 사라지고
네 명의 사람이 들어온다.
“황녀 폐하 드십니다!”
앞선 의전관, 엘프 시녀가 말하자 다들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내 옆의 멜리우스마저도.
하지만 나는 가만히 서서 지켜보았다.
시녀의 뒤로 흘끗 보이는 실루엣.
애가 잘 컸을까?
긴장하는데 마침내 황녀의 모습이 드러났다.
면사.
불투명한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
이게 뭐야?
100년의 시간을 뛰어넘은 재회인데.
맥이 탁 풀린다.
느리지만 다소곳한 걸음걸이, 몸가짐만 봐도 예의 바르다.
하지만 얼굴이 보고 싶다고!
내가 반사적으로 투시력을 쓰려는데…… 시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황제 폐하의 적통, 4황녀 리세라 전하시다! 무릎을 꿇고 예를 보여라, 인간!”
“그러지 마세요.”
면사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했다.
기억하던 넷째 딸의 음색이었다.
리세라가 말했다.
“우리들은 갑작스럽게 방문한 불청객들입니다. 보다 몸을 낮춰야 마땅하지, 주인에게 요구하는 것이 도리어 무례한 일입니다.”
“하, 하지만 황녀 전하. 전하의 어전인데…….”
“권위로 사람을 억누르지 말라, 이제는 없는 황제 폐하께서 제가 해 준 말씀이십니다. 다들 일어나세요.”
“…….”
다들 몸을 일으켰다.
황녀에게 예를 표하지 않은 나에게 눈총이 쏟아졌지만 아무래도 좋다.
넷째 딸아이, 리세라가 내가 가르친 대로 자랐으니까!
혈통의 권위에 기대지 않고.
예의를 지키며 순리에 어긋나지 않게.
자세를 낮추되 비굴하지 않고.
기품은 잃지 않는다.
애가 정말 잘 자랐다!
여러분! 쟤가 제 딸이에요!
막 자랑하고 싶을 정도다.
“황녀 전하, 이리로.”
시녀 하나가 앞서고 다른 시녀 둘이 뒤를 따르는 삼각형, 그 가운데에 선 리세라는 느릿하게 들어왔다.
좀 느렸지만 나는 마냥 행복하게 바라보았다.
시간을 뛰어넘은 딸과의 재회, 거기다 저리 잘 자랐으니 아버지로서 뭘 더 바랄까?
환생하고 가장 보람 있는 일이었다.
의자에 앉은 리세라가 조용히 말했다.
“실례하겠습니다. 저는 카라카스의 딸, 리세라입니다. 최근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으실 텐데 갑자기 방문하게 되어서 송구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리브라타의 아들, 리젠입니다.”
“우리들의 무례한 방문을 넓은 마음으로 받아 주시니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앞으로도 실례되는 일이 없게 주의하겠습니다.”
“귀한 손님이 이리 말씀하시니 리브라타는 최선을 다해서 맞이하겠습니다. 묵으시는 동안 불편함이 있다면 개선하고, 부족하신 것이 있으면 채우겠습니다.”
엘프들이 다들 놀란 얼굴이었다.
날 노려보던 시녀들의 눈도 휘둥그레지고.
엘프의 예법을 이리 완벽하게 구사하는 인간은 드물 테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투시력을 쓸까 망설이는 중이었다.
한데 리세라가 말했다.
“그런데 보아하니…… 방금 큰 소란이 있었던 모양이군요.”
“그냥 가벼운 몸풀기…….”
말하던 나는 급히 수정했다.
사실 지금 나와 리세라는 대립하는 입장이잖아?
아무리 딸이라도 무작정 오냐오냐하면 안 되지!
“황녀 전하의 호위병들이 집주인이신 리브라타 백작님을 겁박했습니다.”
“아, 아닙니다. 황녀 전하, 저희들은 어디까지나 황녀 전하의 호위에 만전을 기하고자 사전에 방문했을 뿐입니다.”
내 고발, 웨인의 변명.
리세라가 결론지었다.
“우리들의 의도가 그러했더라도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고려해야 합니다. 리브라타 백작에게 제가 따로 찾아뵙고 설명하고 마땅히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오.”
나도 모르게 나온 탄성.
엘프들이 일제히 보자 설명했다.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사죄 같은 단어는 안 쓰네요. 아군의 과오를 나무라지 않으면서도 적군을 달래는 괜찮은 판결이네. 80점!”
“……화, 황녀 전하에게 그 무슨 망발이냐!”
애가 능숙하게 정치적인 수사를 구사해서 칭찬한 건데.
시녀들은 무슨 불침이라도 맞은 것처럼 파르르 떨었다.
정작 리세라는 조용하게 물었다.
“그럼 100점짜리 답변은 어떤 건가요?”
“90점짜리 답변은…… 리브라타 백작만이 아니라 나에 대해서도 노여움을 풀라고 했어야죠. 아버지가 인질로 잡힌 입장이었으니까. 나도 보통 뿔이 난 게 아닐 테니까?”
나는 딸아이를 시험하는 질문을 던졌다.
자, 과연 어떻게 나올까?
“…….”
리세라는 차분하게 팔걸이를 두드렸다.
그러자 시녀가 내게 다가와서는 주머니를 내밀었다.
열어 보니 파란 물약이다.
“2급 치료약이네요?”
천족들이 만드는 치료약.
중상을 경상 정도로 낮춘다.
2급부터는 비매품,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귀한 물건이었다.
“행여나 상처를 입으셨다면 그걸 사용해 주세요.”
물론 나야 다치지 않았지.
놔뒀다가 기회가 오면 쓰자.
내가 치료약을 챙기자 리세라가 말했다.
“리브라타의 아들, 몸과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어서 저로서는 황망할 따름입니다. 춘부장께서 처하셨던 난관에 대해서는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이 자리 이후에, 제가 제대로 말씀을 올릴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음. 괜찮네요.”
먼저 선물로 상대의 마음을 달래고, 외교적인 어휘를 골라서 빙 돌려서 사과의 뜻을 전한다.
내 딸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솜씨가 괜찮다.
리세라가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
“100점짜리 답변은 스스로 생각해라. 황제 폐하께서 즐겨 하시던 말씀이셨죠. 뜻밖의 선물을 주시는 분이로군요.”
“선물은 서프라이즈가 제격이니까요.”
리세라의 몸가짐은 물론, 언행도 충분히 합격점이다.
가벼운 공방이 끝나자 리세라가 왼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러자 시녀들이 웨인과 베르크를 비롯한 호위들에게 눈짓을 준다.
사전에 약속이 있었는지 호위들은 다들 빠져나갔다.
남은 건 나와 멜리우스, 리세라와 시녀들.
물론 엘프라면 밖에서도 들을 수 있겠지만…….
리세라는 나직하게 되뇌고는 말했다.
“여기서 나눈 이야기는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을 겁니다.”
“바람의 축복을 받으셨군요.”
“예, 엘프에 대해서 잘 아시는군요. 부족한 몸이지만 정진하고 있습니다.”
엘프들은 마력 말고도 따로 정령마술을 쓸 수 있었다.
내 딸인 리세라는 바람의 정령마술을 쓰는 모양이고.
아직 시녀들이 남아 있지만 황녀의 최측근이지.
“그럼 말하겠습니다.”
내가 크로셀의 음모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했다.
리세라는 다 듣고는 말했다.
“알겠습니다. 크로셀 후작 영애가 이곳에 머물고 계신다고요?”
“예.”
“우리들은 그분을 모셔 가고자 왔습니다.”
“…….”
이상하다.
크로셀 후작과 엘프 사이의 거래, 그 증인이자 증거가 알리시아라는 건 알겠다.
하지만 리세라는 단순한 얼굴마담이 아니었나?
나는 의아해하면서도 일단 말했다.
“그녀는 이번 사건의 중요한 증인입니다. 또 크로셀 가문의 후계자이기도 하니 함부로 처결할 수 없습니다.”
“안 된다는 겁니까?”
“귀족의 일은 귀족원이 처리하는 게 관례니까요.”
이게 사실 아주 애매한 부분이다.
나, 시릭이 살아 있을 적에는 황제가 모든 권력을 쥐었다.
하지만 내가 덜컥 죽고, 제국의 영토들을 황후들이 맡아서 임시로 통치하고 있었다.
황후들은 이종족, 지금 이 부근은 내 여섯째 부인인 엘프의 공주님이 명목상으로 다스리는 영토였다.
그렇다고 엘프들이 인간 귀족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느냐?
그건 귀족원의 거센 반발을 불러온다.
엘프들이라고 해도 제국의 고위 귀족들이 모인 귀족원을 무작정 찍어 누를 순 없다.
상호 존중이라는 아주 모호한 형태.
그래서 황녀가 직접 와서 이런 물밑 교섭을 하는 건데…….
“알리시아 크로셀은 이번 사건을 사전에 알아차리고 크로셀 후작의 음모를 막는 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녀가 없었다면 이번 일을 막을 수 없었을 겁니다.”
내가 준비한 고용계약의 사본을 내밀자 시녀가 받아 들었다.
그런데 리세라에게 안 넘겨주네?
내가 의아해하는데 리세라가 말했다.
“사정은 알겠습니다. 그러면 따로 그녀와 만나서 이야기를 해 볼 수는 없을까요?”
“제가 동석한다는 조건입니다.”
“…….”
리세라는 좀 난감한 기색이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크로셀 후작의 음모에 대한 증언은 이미 저와 리브라타 백작, 혹은 부르작 후작이 할 겁니다. 물론 알리시아에게 교차 검증이 필요하다면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아주 귀중한 정보원이고, 신변의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황녀님의 말씀을 일언으로 거절하다니, 무례합니다.”
시녀가 정색했지만 리세라가 손을 들었다.
“리브라타의 아들이 하는 말씀이 옳습니다. 그만하세요.”
“하지만 황녀 전하, 전하가 이리 몸소 먼 길을 오셔서 청하시는데…….”
아까부터 위화감이 든다.
뭐지?
옆의 멜리우스는 내내 벽만 보고 있고.
나는 재차 말했다.
“더욱이 그녀는 후작의 딸입니다. 크로셀 후작의 죄를 자식에게 묻는다고 해도 그건 제국법에 따라서 결정될 겁니다.”
“하지만 그녀는 반이나마 엘프의 피가 섞였습니다. 우리 동족입니다.”
“엘프들이 언제부터…….”
무심코 말하려던 나는 멈칫했다.
딸에게 할 소리가 절대 아니다.
하지만 면사 너머의 리세라가 나직하게 웃는 소리를 냈다.
“예, 하프엘프를 멀리하지 않았냐고요? 그래서 제가 왔습니다.”
“…….”
내 딸, 리세라 카라카스는 하프엘프다.
당연한 일이다.
나 시릭은 인간이었고, 내 여섯째 부인은 엘프였으니까.
인간과 엘프가 섞이면 하프엘프가 나온다.
……엘프들 사이에서 고생했겠지.
물론 내가 살아 있을 당시에야, 황궁에 있었으니 그런 일은 없었다.
지금도 감히 대놓고 무시하진 않을 거다.
하지만 엘프들이 하프엘프를 대하는 혐오감, 멸시는 뿌리가 깊어서.
“……말씀하시는 바는 알겠습니다. 그래도 단둘이 만나게 해 드리는 건 어렵습니다.”
“안 되나요?”
“증인을 심문하거나 만나려면 변호사를 대동해야 하지요. 저는 한때나마 그녀의 약혼자였고, 지금은 고용 관계니 더욱 그래야 합니다.”
내 딸이 뭔가 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엘프들은 뭔가 숨기고 있다.
꺼림칙한 의혹.
왜 독대하려고 하지?
“애당초 알리시아 크로셀에게 너무 집착하시는군요. 이미 우리 쪽의 조사가 끝나고, 재심문이 필요하면 동석하에 가능합니다.”
“…….”
“그런데도 황녀님이 직접 오셔서 청하시다니, 대체 무슨 사정이 있는 겁니까?”
나는 자식 혼내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빠르게 말했다.
“제대로 된 설명이 없다면 허락할 수 없습니다. 이건 흥정이 아니라 도리의 문제입니다.”
“…….”
나는 선을 딱 그었다.
교섭이라면 자기가 원하는 걸 감춰야 하는데 엘프들은 너무 드러냈다.
리세라까지도 알리시아를 데려가려는 줄이야 몰랐다만.
이렇게 된 이상 이유를 확실히 알아내야겠다.
“……콘다르의 아들, 멜리우스. 이분에게 말씀드렸나요?”
“전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리세라와 멜리우스 사이의 문답.
리세라가 나직하게 말했다.
“리브라타의 아들이 이번 일을 해결하셨고, 또 크로셀의 딸과 혼약을 맺으셨다면 더는 숨길 수 없을 것 같네요.”
“외람되지만 황녀님, 리브라타는 외부인입니다. 저는 동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황녀님을 위해서 권하지 않습니다.”
멜리우스는 딱 잘라 말했다.
내 시선에도 그는 벽만 보며 말했다.
“리브라타의 아들은 재지가 뛰어나고 달변에다가 행동력이 있습니다. 황녀님이 리브라타를 위한 큰 상을 약속하시면 따를 겁니다.”
“…….”
“그게 번거로우시다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제게 맡기고 물러나 계시는 게 나을 겁니다.”
뭐야?
멜리우스는 뭔가 알고 있다.
내 딸에 대해서.
그리고 그걸 지금 나, 리젠에게 감추라고 하고 있었다.
나에게 밝힌다면 황녀에게 아주 불명예스러운 일이 될 거라…….
“…….”
갑자기 몸에 소름이 돋았다.
직감.
그것도 불길한 예감.
나는 내 딸을 바라보았다.
아직 얼굴도 보지 못한 딸, 리세라가 다시금 묻는다.
“콘다르의 아들, 멜리우스. 이분은 믿을 만한 인간인가요?”
“세상에 믿을 사람 따위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엘프어를 할 줄 알고 우리 문화에 아주 해박합니다. 그리고 초대 황제에 대한 놀라운 충심과 제국에 대한 깊은 애국심을 품고 있습니다.”
“…….”
내가 그랬냐?
하지만 멜리우스는 간절하게 말했다.
“그러니 황녀님이 굳이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부디 저와 이 인간을 믿고 맡겨 주시면…….”
“그건 예의가 아닙니다. 제 명예에는 그만한 값어치가 없으니까요.”
“……맹세하겠습니다.”
나도 모르게 나온 말.
나는 불길한 예감에 면사를 빤히 바라보았다.
100년이란 시간을 넘어서 만난 딸이 왜 얼굴을 가리고 있을까?
황녀의 미모가 뛰어나서 괜한 놈들이 붙을까 봐?
그녀가 하프엘프라는 사실을 새삼 상기시키니까?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내 눈에 보이는 리세라는 예의가 바르고 소박했다.
권위를 세우고자 얼굴을 가릴 애가 아니다.
“여기서 나온 이야기는 발설치 않겠습니다. 그러니까…….”
“리브라타의 아들, 리젠. 당신을 믿겠습니다.”
“황녀님. 그건…….”
옆의 시녀들이 말렸지만 리세라는 손을 들어서 막았다.
그러고는 자기 손으로…… 천천히 면사를 걷어 올렸다.
드러나는 하얀 턱.
아름다운 얼굴.
내 기억 속의 귀여운 딸이 성숙하게 자란 모습.
아름답고 기품 있게 자란 딸아이.
나는 반사적인 기쁨에 차오르면서도…… 모골이 송연해졌다.
뭐지?
왜 이렇게 무섭지?
빛이.
빛이 없다.
내 사랑하는 딸의 녹색 눈에는 빛이 없었다.
내가 아니라 허공을 보고 있다.
“……어?”
신음.
내 눈으로 보고도 그게 뭔지 바로 알 수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게 어떤 의미인지 깨달은 순간 신음이 터졌다.
100년이 넘어서 만난 내 딸은.
눈이 멀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