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29)
좋게 올 생각이 없으시네
다음 날 오후.
리브라타 저택.
나는 응접실에서 알리시아와 만났다.
알리시아가 토로했다.
“지금 드리는 자료는 극비 자료인데요. 이걸 하필 활짝 펼쳐진 공간에서…….”
“밀폐된 공간에서 밀담 나누면 남들이 애인이라고 오해하잖아.”
“……우리 둘은 침실에서 밤을 새웠는데요?”
“아, 그랬던가?”
나는 건성으로 넘기고는 서류를 살펴보았다.
알리시아가 넘긴 서류들.
바로 크로셀 후작가의 재정 서류였다.
“설명할게요. 거기 항목에서…….”
“그림, 조각을 많이 구입했네? 전형적인 돈세탁인데?”
부호들은 수십, 수백억을 들여서 예술품을 산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그림 한 장에 그 가치가 있을까?
물론 진짜 예술은 사람의 영혼을 울리지만…….
“미술품이라는 게 객관적인 가치를 측량하기 어렵지. 구린 돈 세탁하기에는 딱이지. 또 미술품은 세금을 안 물던가?”
“예. 하지만 크로셀 후작은 달라요. 제 추정이지만…… 크로셀 후작은 자기 조직에 기부금을 내기 위해서 미술품을 구매했어요.”
알리시아가 밝혔다.
“집에 있는 예술품들은 대다수가 가짜예요.”
“가짜인 줄 알면서도 비싸게 샀다?”
“예. 그런 식으로 크로셀 후작 가문의 재산을 조직으로 넘긴 거죠.”
“결국 크로셀 후작은 가산을 탕진하면서까지 이 일을 추진했다는 건데…….”
모반, 반역은 보통 사회에 불만이 생겨서 하는 일이다.
하지만 크로셀 후작은 이미 충분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었을 텐데?
알리시아가 심호흡을 했다.
“그 건에 관해서는 당신이 알아 둬야 할 게 있어요.”
“말해.”
“난 크로셀 후작의 친딸이 아니에요. 하지만 그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도 아니에요.”
알리시아는 거침없이 털어놓았다.
“난 그의 여동생이에요.”
“……음.”
잠깐.
나는 알리시아의 외모를 새삼 확인했다.
스물 전후로 보이는 금발 미녀, 하프엘프지만…….
“예. 그의 인간 어머니가 저를 잉태했죠. 우린 아버지가 다른 남매예요.”
“크로셀이 그 사실을 감추고 널 대외적으로 딸이라고 알렸다고? 그게 가능한가?”
“가능해요. 엘프는 영유아기가 길지만 난 하프엘프니까요. 인간과 비슷한 속도로 성장했어요. 이 사실을 아는 건 정말 극히 일부의 하인들이었고, 이제 이 세상에 없어요.”
아버지가 다른 여동생을 자기 딸이라고 위장했다?
폐쇄적인 귀족 가문이라면 가능하다.
“귀족 가문에서 사생아, 불륜은 종종 있는 일이지. 필사적으로 감춘 이유는 뭐지?”
“나도 확실하게는 모르지만…… 크로셀 후작은 반강제적으로 엘프의 조건을 받아들여야 했어요. 그는 그 사실을 아주 수치스러워했고요.”
“…….”
“난 성장하면서 주기적으로 1년에 한 번씩 엘프들이 보낸 의사에게 검진을 받았고요. 크로셀 후작은…….”
“잠깐.”
나는 말을 끊었다.
“엘프들이 의사를 보내서 널 검사했다고?”
“하프엘프만 걸린다는 유전성 질병이 있다던데요. 크로셀 후작은 그때마다 자리를 비웠어요. 아주 불쾌해하면서요.”
“엘프들이 특별히 의학이 발전하지는 않았을 텐데? 하지만 하프엘프만 걸리는 질병이라면…….”
나도 모른다.
하프엘프는 일곱 이종족에 속하지 않았다.
후손을 남길 수 없는, 1대로 끝나는 돌연변이.
그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살다가 홀로 죽었다.
나는 정보를 정리했다.
“돈과 명예를 갖춘 후작, 하지만 엘프의 무례한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게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고, 지금의 제국을 뒤집겠다고 결의했다. 동기는 설명이 되는군.”
“크로셀이 미술품을 사들이기 시작한 건 5년 전부터예요. 그의 조직과 접촉한 게 그쯤이라는 이야기겠죠.”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히 귀한 정보기는 한데…….
“이건 옮겨 적은 사본이잖아. 크로셀 후작의 인장이 찍혀 있는 원본이어야 법정에서 증거능력을 인정받아.”
“원본은 크로셀의 영지에, 제가 아는 곳에 감춰 놨어요.”
“원본을 받고 싶으면 널 구해 달라고?”
“설마요.”
알리시아는 쿡쿡 웃었다.
“그럴 생각이었지만 그냥 당신 줄게요. 가져가요. 위치는 본가 정원의 북쪽 돌담 벽에서…….”
“잠깐, 그건 네 구명줄인데? 그걸로 귀족원이나 엘프들하고 밀당해야 하지 않아?”
알리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역적의 딸이 어찌 살기를 바라겠어요? 운이 좋으면 교수형이고, 운이 나쁘면 참수형이겠죠.”
“…….”
“그러니까…… 선물이에요. 이것도 가져가요.”
알리시아는 처연하게 웃으면서 테이블 위에 상자를 올려놓았다.
열어 보니 반지였다.
리브라타와 약혼의 증표로 교환한 것이리라.
“우리 약혼은 진작 깨진 걸로 해 두죠. 그게 당신과 당신 가문을 위한 일이니까요, 리젠.”
사돈 맺으려던 가문이 역적이었다.
물론 나, 리브라타의 막내아들이 크로셀의 음모를 밝혀내고 단죄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조사관의 입맛에 따라서, 여차하면 리브라타도 추궁당할 수도 있다.
“알았다.”
나는 군말하지 않고 알리시아가 내민 약혼반지를 챙겼다.
그리고 나 역시, 건네주려고 준비한 약혼반지를 내밀었다.
이걸로 파혼이다.
알리시아가 한숨을 쉬려다가 멈칫했다.
“……상자 아래의 서류 봉투는 뭐예요?”
“읽어 보고 사인해.”
그녀는 서류를 살피고는 깜짝 놀랐다.
“내가 3년 전부터 크로셀 후작의 음모를 밝히려고 리브라타에 협력했다고요?”
“덕분에 우리 리브라타는 크로셀 후작을 막을 수 있었지. 네 활약이 컸다.”
내 이름만 계속 알려지면 정체가 들통날 수도 있다.
이렇게 분산해 두는 게 낫지.
“거짓말이잖아요?”
“무슨 소리야? 3년 내내 무급 인턴으로 신나게 일해 놓고, 이제 정직원 되게 해 주겠다는데 싫다고?”
내가 능청을 떨자 알리시아는 눈을 깜빡거렸다.
“……이, 이건 받을 수 없어요.”
“얼른 사인해. 이미 백작님하고 이야기는 마쳤어. 그리고 나 사람 좋은 일 하는 거 아니야.”
“…….”
“이제 상황은 이해가 됐어. 하지만 엘프들의 속셈을 모르겠어.”
엘프들은 하프엘프를 동족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의 피가 섞인 찌꺼기라고 멸시하지.
“크로셀의 어머니가 엘프 남자와 불륜? 하지만 엘프들이 왜 그걸 은폐하고 의사까지 보내서 너를 돌봤을까? 엘프들은 하프엘프와는 말도 섞지 않는 게 보통인데.”
“그래요?”
자기 이야기인데 알리시아는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만큼 엘프들은 폐쇄적이다.
내가 말했다.
“행동이 굼뜬 엘프들이 이번 일에는 잽싸게 움직이고 황녀까지 보냈어. 이유는 하나겠지.”
“크로셀 후작과 거래했던 사실이 발각될까 봐요?”
“전후 사정을 맞춰 보면 그렇게 돼. 그러니 엘프들을 상대할 거면 널 내 편으로 삼아 두는 게 유리하거든. 이제 이해돼?”
“……하하하.”
알리시아는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을 시원하게 웃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았어요. 그럼 앞으로 최대한 당신에게 협력할게요. 물론 날 죽게 내버려 두더라도 원망하지 않고요.”
“난 사람은 안 버려. 어지간하면 살려서 쓴다.”
황제였던 나는 인재 부족에 허덕거렸으니까.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 그것도 있는 놈이나 할 소리지.
알리시아가 어색하게 말했다.
“……뭐 더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요. 그, 부담 줄 생각은 아니지만요. 그, 당분간 시간이 많을 것 같거든요.”
테이블을 내려다보는 시선, 내 얼굴을 제대로 못 본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처음이라는 티가 난다.
알리시아는 무심코 나에게 여성으로서 어필하려 하고 있었다.
실컷 굴러 본 나로서는 귀여운 병아리가 날아 보겠다고 퍼덕거리는 걸 보는 기분이다만.
이지적인 아가씨지만 이쪽은 영 숙맥이로군.
나는 픽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나중에 같이 밥이나 먹자. 곧 엘프들이 도착한다니 너는 숨어 있어. 메이드복이라도 입고 있을래?”
“예?”
“메이드복 입고 있으면 귀족 아가씨인 줄 모를 거 아냐?”
“귀 보면 들키잖아요? 하프엘프가 흔한 것도 아니고.”
“그냥 해 본 말이야.”
나는 웃으면서 몸을 돌렸다.
이걸로 약혼은 끝.
자유다!
앞으로 자유일 테고!
좀 시간이 지나고 리브라타의 밀실.
나와 멜리우스, 로데릭이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로데릭에게 물었다.
“가둬 둔 엘프들은요?”
“가룰이 감시하는데 얌전히 있다. 패트릭은 결국 놓쳤지만.”
“잔챙이니까 신경 쓰지 마요. 그리고…….”
“정말 황녀가 오는 거라면 패트릭 따위는 졸개다.”
갑자기 멜리우스가 불쑥 끼어들었다.
로데릭은 어색하게 눈치를 보았다.
10년 동안 별채에서 안 나오던 엘프가 왜 이러나 싶어서.
“패트릭이 베르크의 지시를 받았다지? 놈은 전후 세대 중에서 알려진 1급 전사다. 베르크 하나만 해도 리브라타를 전멸시킬 수 있다.”
“……우릴 너무 우습게 보는 거 아닙니까?”
로데릭이 발끈했다.
멜리우스는 딱 잘라 말했다.
“유격전을 벌이면 그만이다. 첫날밤에 병사들과 잔챙이 기사들을 다 죽이고, 다음 날에 다시 습격해서 점찍어 놨던 기사 몇몇을 죽이면 되지. 구원 요청을 보낸 이들도 다 잡아 죽이고 시체를 걸어 둬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러면 결국 백작과 그 가족만 남을 테고 저택에 불을 지른 다음에 끝장내면 되지.”
“저 말이 맞아요. 엘프들은 저래요.”
내가 거들었다.
보통 인간들은 엘프들을 얼굴 예쁜 바보, 허례허식만 따지는 느림보라고 치부하지만.
황제인 나는 놈들을 뒤집어 본 적이 있다.
“엘프들은 마피아 같은 놈들이에요. 일단 싸우면 상대 가문을 몰살해 버립니다. 거기다 저런 유격전은 그들의 장기라서 충분히 가능해요.”
“아니, 엘프들이 그렇게 무서운 짓을 한다고?”
로데릭이 믿지 못하자 내가 다시 설명했다.
“제국 성립 이전의 이야기입니다. 목격자도 다 죽여서 기록이 잘 안 남아요. 요즘에야 이미지 세탁이 됐나 보지만.”
“……설마 우리한테도 그럴까?”
“뭐, 봐야 알겠죠. 이런저런 안전장치는 걸어 놨어요.”
나는 가볍게 말했다.
“일단 알리시아와는 파혼했습니다. 황녀가 조사관이라니 직접 얼굴 보고 담판 짓죠.”
“너 혹시…….”
로데릭이 내 얼굴을 걱정스럽게 살폈다.
나는 폭소했다.
“설마 사랑하는 두 사람이 가문 때문에 헤어졌다고요? 이상한 소리 말고 형이나 얼른 결혼해요. 나이도 많은 분이 왜 아직도 솔로잉이시래?”
“이 녀석아. 난 약혼이나 결혼을 함부로 할 수 없다. 알잖아?”
“왜요? 그리 좋은 거면 형님부터 하시지.”
“내가 아무리 황제가 될 가능성이 적다지만…….”
로데릭이 말하는데 갑자기 멜리우스가 말했다.
“4황녀가 직접 조사관으로 온다면 나도 리브라타에 협력하겠다.”
“정말로? 엘프들의 결정에 정면으로 반발하는 게 되는데?”
사실 이걸 확인하려고 멜리우스를 부른 건데.
나는 재차 물었다.
“황녀 일행에게 거역했다가는 넌 정령수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어. 최악의 경우에는 추방당하고.”
산간벽지의 리브라타에서 10년을 머무른 멜리우스.
엘프 입장에서는 외딴섬으로 유배 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연히 수도 복귀가 소망 아닌가?
나도 그걸 미끼로 멜리우스와 계약을 맺었고.
하지만 멜리우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건은 달라.”
사정이 있는 눈치인데 말은 안 한다.
하지만 이번 사태에서 멜리우스는 최소한 적으로 돌아서지는 않으리라.
그때 멜리우스가 멈칫했다.
“이런, 당했다.”
“뭐?”
문이 열리면서 사람이 뛰어 들어왔다.
다크엘프 하인켈이었다.
그는 나를 보더니 입술 앞에 검지를 세워 보였다.
조용히 하란 의미.
그러더니 종이에 빠르게 펜으로 적어 내렸다.
「큰일입니다. 집무실에 계시던 리브라타 백작님이 엘프들에게 잡혔습니다. 1급 전사, 베르크가 이끈 것 같습니다.」
“…….”
급습?
나는 멜리우스를 돌아보며 펜으로 적었다.
「바람의 가호 썼나 본데? 맞냐?」
끄덕.
멜리우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들은 필담으로 이야기를 진행했다.
여기서 말하면 쳐들어온 엘프들에게 이야기가 들어갈 수 있으니까.
청력이 비상식적으로 좋은 상대는 아주 성가시거든.
그리고 바람의 가호.
예스럽게 말하면 축지법, 요즘 말로는 하이스피드 모드다.
바람의 가호를 받은 엘프는 보통 사람이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병사, 하인들이 눈 깜빡이는 순간에 집무실에 들이닥쳤단 이야기다.
멜리우스가 적었다.
「바람의 가호는 쓸 수 있는 사람이 적을 텐데. 일단 12가문의 수장이니 대놓고 어쩌지는 못할 거다. 내가 가서 이야기해 보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로데릭에게 적었다.
「형은 기사와 병사들을 모아 줘요. 여차하면 엘프하고 싸워서 아버지를 구출해야 하니까. 그리고 저택의 사람들에게는 알리지 마요. 그냥 식사 준비하고 청소하는 일상을 유지하라고요.」
로데릭이 시선으로 묻자 나는 다시 적었다.
「나는 따로 움직입니다. 아버지를 구하려고요.」
그걸 본 멜리우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위험하다. 이미 알겠지만 엘프들은 청력이 뛰어나. 여차하면 백작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어.」
「12가문의 수장을 어쩌지 못한다고 하신 분?」
나는 딱 자르고는 다시 적었다.
「너는 너대로 엘프와 교섭해. 나는 나대로 놈들 대가리 깬다.」
「어쩌려고? 엘프들은 이제 집무실 안에서 농성할 텐데?」
청력이 비상식적으로 뛰어난 종족, 지금 집무실 안에서도 이쪽의 대화를 들을지 몰라서 우리가 필담을 나누고 있잖은가?
제압하는 건 쉽지 않은 게 상식이다.
하지만 나는 씩 웃었다.
「다 방법이 있지.」
바람의 가호를 받은 엘프를 전장에 긴급 투입시키는 전술을 짠 게 나다, 이 사람아.
당연히 파훼법도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