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27)
생각지도 않게
갑자기 패트릭이 외쳤다.
“메, 멜리우스 삼촌!”
삼촌 조카 관계였나?
정작 멜리우스는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자기 조카가 나무에 묶여서 질질 짜고 있는데도 그러려니 한다.
“리브라타의 아들, 리젠.”
“그래, 콘다르의 아들. 멜리우스.”
내가 엘프식으로 인사를 하자, 멜리우스는 좀 놀란 기색이다.
그는 나무에 묶여 있는 패트릭을 보며 말했다.
“저 애는 내 형, 코르카스의 아들이다. 무슨 일이지?”
“애가 좀 많이 설쳐서, 교육 좀 시키는 중이다. 네가 안 하니까 이런 거잖아?”
“패트릭, 네가 온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는데. 어찌 된 거냐.”
멜리우스는 패트릭에게 경위를 따져 물었다.
패트릭은 내 눈치를 보면서 설명했다.
“……부르작 후작 가문에서 큰 사건이 터져서 저희들이 조사하러 나왔습니다.”
“조사? 누구랑? 설마 네가 통솔하지는 않을 텐데?”
“…….”
패트릭은 눈치만 보면서 말을 아꼈다.
엘프가 보낸 조사관이 대체 누구인지, 시종일관 침묵 중이다.
나한테 겁먹고도 이러는 건 드문데.
멜리우스가 날카롭게 따졌다.
“그래서? 너는 왜 리브라타의 아들에게 얻어맞고 있는 게냐? 이자는 엘프의 문화에 밝은 남다른 인간, 그리고 제시를 할 줄 아는 인간이다. 또 리브라타와 우리 엘프들의 관계가 있으니 너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매질하지는 않았을 텐데?”
“오, 날 높게 사 주네.”
“…….”
멜리우스는 나를 흘끗 보았다가 다시 패트릭을 추궁했다.
자기 조카가 오줌까지 흘릴 정도로 맞았으면 다짜고짜 나한테 뭐라고 할 줄 알았는데.
굉장히 이성적으로 일을 풀고 있다.
아니면 패트릭이 예전부터 고와 보이지 않았든가.
“필시 네가 감히 말로 하지 못하는 무례를 저질렀을 텐데. 내 말이 맞느냐?”
“…….”
“말해라. 네가 용서할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면 나 역시도 상황을 알아야 하고. 만약 리브라타의 아들이 과했다면 내가 반대로 따져 물어야 할 테니까.”
“그게, 그러니까…….”
패트릭은 더듬더듬 말했다.
“……인간들이 놀고먹고 있기에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그것만으로 너를 치더냐?”
“인간들이 말을 안 듣기에 그 좀…….”
“바른대로 말해라.”
“……마력을 좀 보여 줬습니다.”
“그러니까 네 말을 듣지 않는다고 같잖은 힘으로 위협했단 말이렷다? 애당초 네가 리브라타에 온다고 기별을 넣었느냐?”
멜리우스가 매섭게 따졌다.
엘프들은 다른 종족들을 대할 때도 자기들 방식을 중시한다.
방문, 초대의 예의.
패트릭이 머뭇거리자 내가 말했다.
“내일 온다고 들었어. 그런데 오늘 왔더군.”
“……아주 무례한 일인데? 너희들을 맞이할 준비도 제대로 하지 못했을 것 아니냐? 오히려 네가 리브라타에게 용서를 구해야 마땅한 일이지. 그런데 네놈은 오자마자 식사 중인 인간들에게 무례를 저지르고, 마력까지 보이면서 위협했단 말이렷다? 그것도 내가 여기에 묵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
멜리우스의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진다.
“그걸로 끝이냐? 숨기는 게 있으면 얼른 말해라. 낱낱이 조사해서 추가로 드러난 사실이 있으면 그때는 더 엄히 처벌할 것이다.”
“그게…….”
패트릭은 주저하다가 말했다.
“……시릭 카라카스는 이미 죽은 인간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뭐라고?”
어라.
멜리우스가 풍기는 기도가 변했다.
잠옷 차림으로 나와서 냉정하고 차분하게 따져 묻던 엘프가.
갑자기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방금 뭐라고 했지, 코르카스의 아들? 귀가 썩을 것 같은 그 소리가 사실인가?”
“야, 진정해…….”
엘프가 귀를 빗대면서 욕하면 진짜 끝장 보자는 소리다.
내가 무심코 말리자 멜리우스가 홱 돌아보았다.
“저 정신 나간 놈이 황제에게 불경한 소리를 했나?”
“……음, 황제는 뒈졌다고 했지?”
“…….”
멜리우스는 거침없는 걸음으로 패트릭에게 다가갔다.
짜아악! 짜악!
멜리우스는 대뜸 놈의 뺨을 갈기고, 연이어 후려쳤다.
순식간에 3연타.
아주 감정적으로.
“이 정신머리 없는 놈! 어디서 감히 그딴 소리를!”
깜짝 놀란 나는 달려들어서 뜯어말렸다.
내가 말린다는 게 웃기지만 놔두면 애 죽일 기세다.
“야! 야! 애 묶여 있어!”
“……아, 그렇군.”
멜리우스는 순간 손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진정했단 의미.
내가 손을 놓고 물러나자…… 멜리우스는 마력을 일으켜서는 패트릭을 묶고 있던 밧줄을 끊었다.
그리고 팼다.
퍽! 퍽! 퍽!
“악! 악! 아아악!, 사, 삼촌! 악!”
주먹으로 애 뺨을 때리고, 막으면 배를 차고, 손날로 어깨를 치는 게 진짜 무슨 고기 다지는 것처럼 친다.
그것도 다분히 감정을 담아서.
“야!”
아니, 풀어 주고 패란 소리가 아니었는데?
“야! 애 죽어! 죽는다니까!”
“이런 놈을 살려 둘 순 없어! 정령수의 수치! 여기서 아예 끊어 버려야 해!”
멜리우스는 신나게 패고도 화를 풀지 못했다.
패트릭은 사지를 쭉 뻗고 쓰러져서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나한테 맞고 멜리우스에게 감정적인 구타까지 당했으니 정말 엉망진창이었다.
콱!
“야! 그만, 그만…….”
멜리우스가 쓰러진 패트릭의 머리를 걷어차자 나는 몸을 잡고 끌어당겨서 떼어 놓았다.
진짜 죽이겠다.
“……후우우우.”
한참 이를 빠득빠득 갈던 멜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좀 풀렸다.”
“그냥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초대해 주지?”
밖에서 이야기하다가는 시체 하나 치우게 생겼다.
별채.
내가 안으로 들어가자 멜리우스가 바로 말했다.
“일단 앉아라.”
“감사.”
엘프가 집 안으로 초대해서 대뜸 자리를 권하는 건, 그만큼 높이 사 준다는 의미이다.
이 높이 사 준다는 게 인간식으로 번역하면 되게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데…… 쉽게 말하면 편하게 생각하면서, 우대해 주고, 신세를 졌다는 정도다.
멜리우스는 내게 목례해 보였다.
“미욱한 놈이 아주 큰 실례를 저질렀군. 내가 엘프를 대표할 순 없으나 콘다르의 아들로서 사죄하겠다.”
“아니, 뭐…… 황제 욕 좀 할 수도 있지. 없는 자리에선 나라님도 욕하는데.”
“무슨 그런 소리를.”
멜리우스는 정색했다.
“시릭 카라카스는 세세토록 존경받아 마땅한 위업을 달성하였고, 억조창생을 두루 살피는 창세영웅이다. 그를 삿되게 이르는 것은 제국민인 우리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더욱이 너는 시릭 카라카스에게 특별히 하명받은 12가문의 후예 아닌가? 초대 황제를 말할 때는 항상 정성을 다하고 조금의 실례도 있어서는 안 되지.”
“…….”
야.
너도냐?
멀쩡하던 알리시아도 황제의 이야기만 나오면 눈 돌아가던데.
멜리우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황제 팬이냐?”
“그분을 존경하지 않는 사람도 있나? 그 무슨 몰상식한 놈이지?”
“…….”
아, 그래요.
멜리우스는 치를 떨면서 창밖을 노려보았다.
“그 몰상식한 놈이 내 조카였군. 네가 손봐 준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염려도 하지 마라. 전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아니, 그러면 네 입장이 난처해질 텐데? 모든 엘프들이 너처럼 황제 열성 팬클럽은 아니잖아?”
“불충하고 불온한 자들이야 있지. 하지만 그럴수록 마음을 바로잡아야 하는 법.”
멜리우스가 갑자기 물었다.
“초대 황제가 제국이 안정되고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뭔지 아나?”
“그렇게 에둘러서 말하면 모르지.”
“칠죄신과의 전쟁에서 전사한 이들의 가족을 만났지.”
아, 그랬지.
철도를 완공한 다음에 착수한 일이었다.
물론 내 경호 문제며, 업무 처리 문제가 있어서 반대가 극심했지만…… 나는 그래도 밀어붙였다.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멜리우스가 회상하는 투로 말했다.
“우리 엘프들 쪽에도 왔지. 나야 당시에 어려서…… 칠죄신과의 최종 전투에 참가하지 못했지만 큰형이 참가했었지.”
“……그래.”
“큰형은 돌아오지 못했지. 그리고 다른 많은 이웃들도 볼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살던 마을 사람들의 절반이 사라졌지. 그리 만든 초대 황제가 직접 왔다.”
멜리우스는 옛일을 떠올리는 투였다.
“나는 머리로는 황제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용서할 수 없었다. 동시에 분을 참지 못하고 그를 공격했다가는 큰일이 될 거라는 것도 알았지. 그래서 그냥 멀리서 지켜보았지.”
“…….”
“황제가 뭘 했는지 아는가?”
내가 그냥 잠자코 듣자 멜리우스가 열성적으로 말했다.
“일일이 사과를 하더군. 자기가 부족한 탓에 아들을 살리지 못했다고, 따님은 동료에게 사랑받는 영웅이었다고. 당신의 아버지는 십부장으로서 많은 병사들을 지키고 죽었다고. 일일이 말을 건네주고 위로해 주셨네.”
“…….”
“사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어. 마음에 걸린다고 해도 직접 올 필요는 없었지. 대신 사람을 보내도 됐을 텐데.”
멜리우스는 차분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 모두 납득한 일이었어. 칠죄신과의 싸움은 위험했고, 가는 이들은 죽기를 각오했지. 기다리는 이들도 그들이 돌아오지 못할 수 있다는 걸 알았네. 하지만…… 그래도 황제는 직접 머리를 숙여서 사과하더군.”
“…….”
“가장 높은 자는 가장 자세를 낮춰야 한다. 흔한 말이지만 실제로 그리하기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지만 황제는 했지. 엘프의 죽음이, 큰형의 죽음이 결코 의미 없던 게 아니라고, 직접 찾아와서 말해 주었어.”
멜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의 얼굴을 보기 싫어했던 나지만 멀리서 그걸 듣고는 결심했네. 반드시 나도 저 황제의 아래에서 싸우겠다고. 큰형의 죽음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어.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값진 희생이었으니까.”
“…….”
나는 그냥 잠자코 고개만 끄덕였다.
멜리우스는 안타까워했다.
“내가 어엿한 성인이 되기 전에 서거하셨지만. 정말 가슴 아픈 일이지.”
“음, 그래. 알겠다.”
“……으음.”
자기 이야기를 풀어놨던 멜리우스는 멈칫했다.
“발소리를 보니 패트릭이 달아났군. 하지만 더는 신경 쓰지 말게. 내가 따로 엘프들에게 엄중하게 항의할 테니까.”
“……근데 너,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고 있냐? 엘프들이 왜 리브라타에 왔는지는 알아?”
“모르는데.”
“아주 당당하시네. 다들 바빴는데 혼자 별채에서 놀고 계셨어?”
“무슨 일이 있었지? 지금부터 들어 두면 되겠군.”
멜리우스는 태연하게 설명을 요구했다.
……하인켈 반만 닮아라.
늦은 오후.
멜리우스에게 전후 사정을 적당히 설명한 나는 별채에서 나왔다.
말한 대로 패트릭은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멜리우스가 알아서 처리하겠지.
적어도 이번 일에 대해서는 멜리우스도 우리 리브라타의 편을 들어 줄 것이다.
엘프들도 멜리우스를 무작정 무시할 순 없을 테고.
아니, 멜리우스는 사실 엘프 내부에서 별 발언권이 없어서 여기 온 거 아니었나?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
내가 본채로 향하는데 사람이 다가왔다.
다크엘프, 하인켈이었다.
“멜리우스를 만나고 오시는 겁니까?”
“네 눈치 반만 잘라서 멜리우스 줘라.”
하인켈은 이래저래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정보 수집 하는데, 멜리우스는 집에서 안 나온다.
둘을 섞어서 반으로 나누면 딱인데.
농담에도 하인켈은 긴장한 얼굴이었다.
“혹시 무슨 이야기 못 들으셨습니까?”
“모르던데? 멜리우스는 애당초 이번 사건 자체를 전혀 모르고 있었어. 엘프들이 조사관을 보낸다는 것도 나한테 들어서 알더라.”
“……알고서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닐까요?”
“그럴 놈 아니야.”
그냥 자기 페이스대로 사는 놈이다.
내 말에 하인켈은 더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면 아주 문제가 복잡해지는데요?”
“간단하게 말해. 뭔데?”
“엘프들이 조사관으로 누굴 보냈는지 알아냈습니다.”
“누군데?”
내가 묻자 하인켈은 새삼 주변을 살폈다.
“이건 정말 극비 정보입니디만…….”
“말하고 싶어서 죽겠다고? 얼른 말하고 죽어.”
“오랫동안 외부에 모습을 보이지 않은 분이라서요. 긴가민가했는데 방금 확인했습니다.”
하인켈은 심각하게 말했다.
“엘프들이 4황녀 전하를 보내셨다고 합니다.”
내 얼굴도 심각해졌다.
……내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