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25)
가라는데 안 가?
점심 식사.
바짝 구운 멧돼지, 내 손바닥만 한 고기를 한입 크게 베어 무니 촉촉한 육즙이 입속에 확 퍼진다.
잇몸 구석구석까지 달달한 소스로 샤워하는 쾌감.
직후에 소금의 짠맛이 터지면서 풍미를 더한다.
“황제 폐하 만세.”
“폐하 만세.”
가룰과 하인켈이 경전처럼 외우고, 로데릭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 시릭을 찬양하는 건데…… 내가 소금을 내륙 지방까지 공급하는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본래 소금은 귀중품, 일부 상인들이 독점하면서 폭리를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염분은 사람에게 필수영양소, 또 음식 간에 필수다.
나는 소금 공급을 국유화해서는 일반 민중들도 쉽게 먹을 수 있게 만들었다.
덕분에 이 산골에서도 고기를 소금에 팍팍 찍어 먹을 수 있지.
“아, 양념장도 괜찮네.”
“리젠, 입가 좀 닦으면서 먹어라.”
“술도 잘 골라 왔네요.”
나, 로데릭, 가룰, 하인켈은 정말 정신없이 먹었다.
건장한 성인 남성 네 명이 달라붙으니 금방금방 먹는다.
고기를 먹고, 목이 마르면 술을 마시는데…….
“아, 이 와인 뭡니까? 끝내줍니다!”
“야, 그거 700만 원짜리야. 남들은 천천히 즐기는데 넌 석 잔째네. 내가 기억했다?”
“……제 두 달 월급인데요?”
“그래, 넌 담 달 월급 없다.”
“예?”
나와 가룰의 대화에 사람들의 웃음이 터진다.
가룰이 뻘쭘해하자 내가 다시 말했다.
“으이구, 그냥 마셔, 새꺄. 물처럼 먹던 놈이 뭘 또 눈치를 봐. 농담이야, 농담.”
“아, 아니, 이렇게 비싼 걸 어떻게 마십니까?”
“마셔. 비싸 봐야 다 사람 마시라고 만든 거다. 형님도 좀 팍팍 마시시고요.”
“난 됐다. 상처가 아무는 중이라 과음은 별로 좋지 않아.”
“그렇다니 하인켈, 네가 노래 불러라.”
“……예? 왜죠?”
“형님이 네가 가져온 술이 마음에 안 드신다니 다른 걸로라도 분위기를 띄워야지.”
나는 웃다가 멈칫하고 고개를 돌렸다.
아멜리아는 내 입가를 닦은 손수건을 갈무리하고 있었다.
“아멜리아는 안 먹어?”
“왜 안 먹어?”
“저는 손질하면서 많이 먹었습니다.”
“거짓말하지 마. 피 뺄 때부터 입에 하나도 안 대더라.”
“도련님이 먹는 것만 봐도 배불…… 웁.”
나는 내 접시의 고기를 아멜리아에게 먹여 버렸다.
아멜리아는 입에 들어온 고기를 씹어 삼켰다.
“도련님, 갑자기, 으음…….”
나는 또 아멜리아가 말하기 전에 고기를 먹여 버렸다.
아멜리아는 내게 눈을 흘겼지만, 뭐 이미 입에 들어왔는데 어쩌겠는가?
얌전히 먹어야지.
배도 슬슬 부르고 재미도 붙은 나는 아멜리아의 앞에 양반다리로 앉아서는 빙긋 웃었다.
“…….”
아멜리아는 입을 양손으로 가리더니 침착하게 씹어 삼켰다.
내가 또 먹일까 봐 경계 태세다.
“도련님, 제가 알아서 먹겠습니다.”
“됐어, 다 같이 먹는데 왜 혼자서 뒤치다꺼리해. 이젠 내가 할 테니까 좀 먹어.”
“그게 제 일…….”
“엄마만 안 먹으면 내가 가슴이 아파서 그래. 저놈들은 알아서 먹으라고 하고 이젠 좀 챙겨 먹어.”
나는 칼을 들어서는 멧돼지의 가슴살을 발라냈다.
아멜리아의 접시에 듬뿍 올리자 그녀는 곤혹스러워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 먹었다.
배도 부르고 술도 돈다.
노곤해진 나는 정원에 누워서는 다른 사람을 구경했다.
가룰과 하인켈은 서로 소매를 걷어붙이더니 팔씨름을 하고 있었다.
마력 없는 순수한 완력 싸움.
“크아아!”
“으으음.”
로데릭이 심판을 보는 가운데 승부가 박빙을 이루고 있었다.
배도 부르겠다, 술도 들어갔겠다, 바보짓 하는 거지.
원래 남자들끼리 마시고 취하면 저래.
아멜리아의 허벅지를 베고 누운 나는 즐겁게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
내 머리에 닿는 손길.
아멜리아는 말없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풍성한 늑대 꼬리가 이불처럼 내 몸을 포근하게 덮어 준다.
“이게 은퇴지.”
“예?”
“그냥 이거야.”
내가 하고 싶었던 거.
맛있는 거 먹고 편하게 웃고 떠들고 놀고 즐기는 거.
소박하다면 소박한 삶.
하지만 시릭 카라카스는 손에 넣을 수 없었던 시간.
“아멜리아는 많이 먹었어?”
“충분히 많이 먹었어요. 소화가 잘 안 돼서 일어나기 힘들 정도예요.”
“그럼 좀만 더 이렇게 있을게.”
나는 다리를 베고 누운 채 아멜리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온기에 몸을 비비는 고양이라도 된 것처럼.
“도련님.”
“응.”
“……많이 걱정했어요.”
“알아, 미안해.”
“그래도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아멜리아의 손가락이 내 머리카락을 간질거린다.
긁어 주는 게 기분 좋다.
정말 고양이가 된 기분이다.
“걱정시켜서 미안해. 그리고 걱정해 줘서 고마워.”
끄덕.
아멜리아는 내 손을 잡고는 부드럽게 속삭였다.
“전 리젠 도련님만 무사하시면 됐어요. 다음부터 조심하세요.”
“그래, 주의할게. 아직 좀 남았지만…….”
크로셀 사건의 냄새를 맡고 몰려오는 놈들을 정리해야지.
놔두면 엉망진창으로 헤집을 테니까.
또 제국군 내부에서 반출된 폭탄, 어찌 된 일인지 알아봐야 하고.
내 몸, 이 심장에 대해서도 조사해야 한다.
그리고 또…….
앞으로 해야 할 일을 하나하나 헤아려 보니 끝이 없다.
하지만 이전의 생과 다르게 막막하지 않았다.
“이겼다!”
“……전 사실 왼손잡이였습니다. 드디어 진짜 실력을 발휘할 때가 왔군요.”
귓가에 들려오는 취한 바보들의 멍청한 소리들.
그리고 나를 끌어안고 보듬어 주는 온기.
이걸로 충분하다.
매일 이럴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일할 수 있다.
“…….”
눈이 감긴다.
그러자 아멜리아가 내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아이가 편하게 잠들기를 바라는 어머니처럼.
자애롭게.
푹 자…….
발소리들.
가까워진다.
나는 감지하면서도 경각심이 들지 않았다.
여긴 리브라타고, 장남과 막내가 즐겁게 먹고 마시는데 뭐라 할 사람은 없으니까.
“일어나라, 인간들.”
찌르는 목소리.
불쾌하다.
나와 로데릭에게 하대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리브라타 백작뿐. 하지만 백작은 저렇게 고압적으로 굴지 않는다.
가룰과 하인켈의 웃음소리도 뚝 그쳤다.
“일어나라고 했는데. 인간 새끼들은 말귀를 못 알아듣나? 까막눈이라고 해도 귀는 열고 있어야지. 콱 발목을 잘라 버려?”
강한 불쾌감.
나는 눈을 떴다.
정적.
풀밭에 앉아 있던 로데릭과 가룰, 하인켈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음.”
로데릭이 땅을 짚고 일어나려 하자 가룰과 하인켈이 얼른 부축했다.
허벅지 부상 때문에 거동이 쉽지 않다.
“앉아.”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목소리.
일어나려던 가룰과 하인켈, 로데릭이 나를 본다.
그리고 딴 놈들도 나를 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나는 단호하게 딱 잘랐다.
“세 사람 다 앉아 있어. 가룰, 네가 다른 사람들 지키고 끼어들지 마.”
“…….”
가룰은 내 얼굴을 보더니 얼른 로데릭을 바로 앉혔다.
하인켈과 로데릭도 내게 시선만 보냈다.
“뭐야, 저 새끼는?”
“인간이잖아.”
“인간이 토를 달잖아? 너희들, 저런 거 본 적 있어?”
나는 한숨을 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멜리아가 부축하자 나는 가볍게 말했다.
“형한테 가 있어.”
“예.”
아멜리아는 군말 없이 물러났다.
목을 꺾은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풀밭에서 이리저리 먹고 남은 흔적들.
멧돼지 고기가 좀 남았는데, 아멜리아가 저녁에 따로 먹자고 했다.
그리고 앞에는 처음 보는 얼굴들.
남자 넷에 여자 하나, 죄다 귀가 뾰족하다.
엘프들이었다.
“야, 저 인간 뭐야? 우릴 똑바로 보는데?”
“눈 안 깔아? 콱 파 버린다?”
“생긴 값을 못 하는 걸 보니 젊은 놈들이네.”
나는 혀를 찼다.
우르르 몰려다니고 품위 없이 행동한다.
젊은 엘프들 중에서 흔히 보인다.
“……뭐? 지금 우리보고 놈이라고 했어?”
“야, 패트릭, 네가 만만해 보이나 봐.”
“저 인간 눈깔 마음에 안 드는데, 그냥 후벼 버리자.”
지들끼리 좋다고 떠드는 놈들.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갑자기 엘프들이 단체로 몰려온 거라면 크로셀 사건을 조사하러 온 거지? 내일 온다고 알았는데 좀 이르군. 이 경우에는 너희들이 사과하는 게 엘프들 예의 아닌가?”
“뭐?”
“밖에 나온 지 얼마 안 된 초짜들이라서 들뜬 거 보인다. 내가 오늘은 즐겁게 하루 마무리하고 싶으니까 돌아가서 어른 데려와.”
“…….”
다섯 놈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다가 요란하게 웃었다.
“푸하하하, 하하하! 가래, 돌아가래! 야, 패트릭! 너보고 말하는 거야!”
“이게 미쳤나. 너 누구야?”
다섯 중의 대표로 보이는 놈, 머리끝을 검게 염색한 엘프 놈, 패트릭이 을러댔다.
“이 집주인 막내아들, 리젠 리브라타다.”
“아, 귀족이었어? 그래서 지가 잘난 줄 알아.”
“눈 안 깔아, 이 새끼야?”
“음.”
인내심이 바닥나려고 하는데?
엘프 하나가 이죽거렸다.
“네놈이 귀족이면 단 줄 아냐? 여기 이 패트릭은 엘프의 2급 전사라고. 알아 모시라고, 새꺄.”
“엘프의 2급이면…….”
인간으로 치면 일류지?
마력검도 쓸 테고, 나름 콧대가 높을 만하다.
하지만 건들거리는 폼이 영 허술해 보이는데.
아무래도 수준이 낮은데?
내가 살피는데 엘프들은 서로 떠들었다.
“인간이 되게 설치네. 지가 황제인 줄 아나 봐?”
“아, 그거잖아. 리브라타는 12가문인가 뭔가 그거. 그래서 황제인 척하나?”
“시릭 카라카스? 그게 뭐가 대단하다고. 고작 인간이고 뒈졌잖아?”
“…….”
리브라타는 엘프의 후원을 받는 가문.
엘프 놈들이 그걸 믿고 이리 까부나?
뭐 이놈들 손봐 주고 수습할 방법은 대충 생각났고.
밥 먹었으니 가볍게 몸이나 풀까?
그때 패트릭이 대뜸 주먹에 마력을 불러일으키고는 을러댔다.
“경고하는데, 너 그렇게 보지 마라.”
“한심한 걸 보면 표정 관리가 안 되는 성격이라. 그리고 너 당장 마력 꺼라.”
지금 패트릭처럼 마력을 보이면서 위협한다?
장전된 권총을 사람에게 겨누는 셈이다.
내가 당장 죽여 버려도 정당방위다.
실제로 제국법이 그렇다.
“그냥 가볍게 버릇 고쳐 주려고 했는데 일 키우네. 뒤지기 싫으면 그거 꺼, 새끼야.”
“그렇게 못 하겠다면?”
“막내인 나는 이 동네에 소문이 난 망나니거든. 내가 상식 없이 산다는 걸 몸으로 확인하게 되겠지?”
패트릭은 픽 웃었다.
한쪽 입꼬리만 올리는 재수 없는 웃음.
놈은 몸을 돌리더니…….
“더러운 인간 새끼들이 어디서 잔말이 많아?”
퍽!
패트릭이 발끝으로 흙을 걷어찼다.
남아 있던 멧돼지 고기.
오늘 저녁에 국에다 넣을 거라고 아멜리아가 야무지게도 말했던 멧돼지 고기에 흙이 쏟아진다.
사람 먹을 게 못 쓰게 됐다.
“니들은 그냥 우리가 하란 대로 하면 되는 거야. 우리 엘프한테 붙어먹고 사는 기생충 놈들이 어디서 감히…….”
“니들이 맞고 싶어서 왔구나.”
순간 엘프 놈들이 일제히 돌아보았다.
포효.
내가 포효를 쓰는 방식은 보통 두 가지다.
아군을 휘어잡을 때.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럼 이제부터 몰상식하게 맞아 봐라.”
여러 적들의 이목을 나한테 집중시킬 때.
단숨에 죄다 대가리를 깨 버리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