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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고인 황제놀음-24화 (24/230)

두 번 고인 황제놀음 (24)

먹고 하자

크로셀에 의한 부르작 후작 저택 전소.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나는 리브라타 저택으로 돌아왔다.

정오.

리젠의 침실.

나는 방 안에 앉아서 몸 상태를 점검하고 있었다.

“음, 염동결계 하려고 진짜 쥐어짜 냈지. 당분간 염동결계는 자제하고.”

문제는 마력.

나는 정신을 집중하고 마력을 손끝에 불러냈다.

빨강에서 주황색, 노란색으로.

3계위.

천재 소리 듣기 충분하지만 나로서는 영 부족하다.

그리고 제국 유수의 강자들에게도 부족하고.

“하지만 마력을 쭉쭉 성장시키기는 참 어려운 일인데…….”

마력을 강화하는 법은 크게 네 가지다.

1. 매일 꾸준한 마력 수련. 효율이 정말 별로다. 안 하는 것보단 나아서 다들 하지만.

2. 마력약 복용. 마력이 없는 사람에게는 효과 대박이지만 이미 마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효율이 떨어진다.

1급 마력약은 구하기도 힘들고, 설사 내가 지금 그걸 먹어도 큰 효험을 보진 못한다.

더 효과 좋은 특급 마력약이 있는데 그건 정말 예외 중의 예외고.

3. 다른 사람에게 마력을 전수받는 것. 마력전승(魔力傳承).

인간들이 대를 이어서 물려주는 방식인데, 조건이 이래저래 까다로워서 따지는 게 많다.

골수이식을 생각하면 된다.

되는 경우가 있지만 적합성을 따져야 하고, 안 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무엇보다 주는 사람이 받는 사람보다 높은 경지여야 한다.

내가 백작이나 로데릭보다 강할 테니 일단 패스.

4. 실전에서 성장시킨다.

“대부분 4번인데…….”

대련으로는 효과가 없고, 서로 목숨이 오가는 실전에서 마력은 크게 오른다.

칠죄신과의 전쟁 당시에야 매번 사투였으니 이런 걸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오늘 죽지만 않으면 내일 쭉쭉 성장했으니까.

앞에서 많이 싸운 나는 더 그랬고.

하지만 지금은 평화로운 시대다.

환생하고 나서 겪은 사투라고는 크로셀과의 싸움 정도고.

“평화가 좋긴 한데…….”

물론 이 3계위와 초능력, 그리고 내 지식과 전투 경험으로 어지간한 상대는 누를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 어지간하지 않은 상대라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나…….”

생각하는 동안에도 내 손끝의 마력이 일렁거린다.

노란색의 마력이 순간 녹색으로 물들었다.

“어?”

나는 깜짝 놀랐다.

녹색이라면 4계위 아닌가?

3계위가 천재라면 4계위는 인간으로서 초절정 경지다.

물론 오래 사는 이종족이라면 그 위도 얼마든지 있지만.

나는 다시금 마력을 살폈지만 금방 노란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아까 본 녹색은 절대 착각이 아니었다.

“……벌써 4계위 직전이라고?”

이상하다.

크로셀과 실전을 치렀다지만 고작 한 차례 싸움이었다.

그와 같은 싸움을 스무 번, 서른 번을 넘어야 다음 단계가 보일 텐데.

“아니, 애당초…… 나는 시작부터 3계위였지?”

시릭 카라카스는 1계위부터 출발, 온갖 생사고락을 겪으면서 매번 경지를 높여 갔다.

하지만 리젠 리브라타는 마력을 각성한 순간부터 단번에 3계위, 그리고 실전 한 번에 4계위를 넘보고 있었다.

“그냥 천재가 아니라 불세출의 신동…….”

말이 되냐?

전생 제국 최강이었던 내가 봐도 이 몸의 성장 속도는 황당하다.

“처음에 3계위로 시작한 건 그냥 이전에 마력약을 많이 먹어 놔서 그런 줄 알았는데…….”

심장이 잔뜩 꿍쳐 놨던 마력약을 토해 내게 했으니까.

하지만 생각해 보니 그것도 이상했다.

마력약은 마력 없는 이에게 마력을 깃들게 하는 것이다.

이미 각성한 자가 복용해도 늘어나긴 하지만 효과가 적다.

즉, 마력약만 마셔서 3계위가 되려면 배 터지게 마셔야 한다.

“비상식적 성장은…… 이놈인가?”

나는 내 가슴에 손을 댔다.

쿵쿵, 뛰는 심장.

몸에 흐르던 마력을 탐욕스럽게 집어삼키던 놈.

“역시 보통 심장이 아니야.”

아직은 추측 단계다.

하지만 내 가설이 맞는지 확인하려면 골치 아픈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아, 그거 구질구질해질 텐데. 그냥 모른 척 살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장 생각할 일은 아니다.

일단 밥부터 먹자.

리브라타의 정원.

화창한 봄날, 고기 굽는 냄새가 흐른다.

나무 그늘에 돗자리를 깔고 앉은 나는 멍하니 보았다.

꼬챙이에 꿰여서 노릇노릇하게 구워지고 있는 멧돼지.

그리고 그걸 열심히 돌려 가면서 굽는 아멜리아를.

“아멜리아가 막 사냥해 온 거다. 맛있겠군.”

“어, 음.”

옆에 앉은 로데릭의 말에 나는 신음만 흘렸다.

아멜리아는 외모만 따지면 10대 중후반의 어여쁜 소녀다.

하지만 수인이니 나이는 훨씬 많을 테고…… 늑대 수인이니 근력은 초인적이리라.

200kg은 됨 직한 멧돼지를 빙빙 돌리면서 익히는 게 전혀 힘들어 보이지 않는다.

……애당초 어떻게 잡아 온 거야?

이미 벗긴 멧돼지 가죽에 상처 하나 없다.

아멜리아는 멧돼지 가죽을 벗기고 피와 내장을 빼내고, 못 먹을 부위를 골라내면서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나는 로데릭을 돌아보았다.

“다리는 좀 어때?”

“아물고 있다. 보름이면 큰 무리 없을 거라더군.”

“그래도 무리하지 말고…….”

“고기 익은 것 같은데요.”

나는 초 치는 가룰을 흘겨보았다.

노릇노릇하게 익어 가는 멧돼지를 애인처럼 보던 가룰이 흠칫했다.

“아, 아니, 당연히 도련님이 먼저 드셔야죠. 전 나중에 먹겠습니다.”

“침이나 닦고 말해.”

“예? 음, 예.”

가룰은 정말로 입가를 훔쳤다.

나는 한숨을 섞었다.

“그리고 형님부터 드셔야지. 뭔 소리야.”

“난 됐다. 아멜리아가 네가 요즘 픽픽 쓰러져서 걱정된다고 사냥해 온 거다. 네가 다 먹어라.”

“저걸 어떻게 나 혼자 다 먹어?”

“그럼 제가 도와 드릴까요?”

내가 투덜거리는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슬쩍 다가온 다크엘프, 하인켈이 술병을 들어 보였다.

나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너 아직 있었냐?”

“……하하, 신세 지고 있습니다.”

“부르작 쪽에 안 가고?”

“거긴 볼일이 끝났으니까요. 부르작 후작은 향후 10년은 감히 리브라타를 건드리지 못할 겁니다. 다 타 버린 저택을 복구하는 비용도 상당히 들 테고, 본인도 의기소침해져서요. 저도 좀 가볍게 경고해 뒀고요.”

나는 말없이 빤히 바라보았다.

로데릭이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 보니 하인켈 경이 이번 사후 수습에 협조를 많이 해 줬다. 크로셀 후작에게 매수된 우리 쪽 병사들을 다 알려 줬거든. 덕분에 빠르게 정리할 수 있었다.”

“오, 그러니까 다 알면서 입에 자물쇠 채우고 계셨네?”

“……음, 음. 죄송하게 됐습니다.”

“거기다가 그걸 약삭빠르게 아버지와 형님에게 전해 드려서 이미지 쇄신도 하시고? 오오, 믿을 수 있는 다크엘프 하인켈, 매장 입구에서 하인켈을 찾아 주세요?”

내가 노골적으로 비꼬자 하인켈은 시선을 피했다.

아무리 낯짝이 두꺼워도 켕길 수밖에.

“……아, 음. 믿지 못하시겠지만 저도 양 가문의 전쟁을 바라진 않았습니다. 가능하면 크로셀에 대해서 캐내는 게 제 목적이었거든요. 그리고 저 혼자서 크로셀을 막을 수 없었고요. 크로셀도 마력전승의 축복을 받았으니까요.”

“너 정도면 비등하지 않나?”

“싸워 봐야 압니다. 설사 크로셀을 잡았어도 필론이라는 기사에게 죽었을 겁니다. 그리고 크로셀을 잡았다고 해도 끝이 아니고요.”

내가 로데릭을 봐도 그는 침묵을 지켰다.

“널 어떻게 할지 아버지와 형님은 나한테 일임하셨나 보네?”

“예. 머무르고 싶으면 리젠 도련님의 허락을 받으라더군요.”

“…….”

뭐 하인켈의 입장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다크엘프들을 다스려 본 난 그들의 습성, 방식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하인켈이 독단으로 나한테 정보를 제공하고 도우려고 했다면…… 여차하면 자기 종족들에게 배신자로 몰려서 처분당했을 것이다.

다크엘프는 그런 놈들이니까.

“네가 미운 건 아니지만 쉽게 믿을 수 없다. 그러니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내놔 봐. 네가 죽지 않을 선에서 아슬아슬하게.”

“그걸로 되겠습니까?”

“들어 보고.”

하인켈은 잠시 주변을 살폈다.

그가 가룰을 보자 나는 딱 잘라 말했다.

“가룰은 알아도 돼.”

“예? 뭘요?”

“봐, 어차피 알려 줘도 모를 거다.”

멧돼지 구워지는 광경만 보던 가룰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하인켈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실은…… 리브라타의 장남이신 로데릭 도련님이 작년 황도에서 겪으신 일에 크로셀 후작이 개입했단 의혹이 있습니다.”

“…….”

로데릭의 얼굴이 굳어졌다.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크로셀 후작이 하루 이틀 사이에 준비한 건 아니겠지. 작년에는 형을 실추키시고 올해는 나를 공격한다. 그렇게 공을 들여서 리브라타를 무너트릴 계획이었다. 그럼 알리시아와 나를 약혼시킨 것도 계획의 일환인가?”

“저도 그건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만약, 약혼 이후에 크로셀이 마음을 바꾼 것이라면…….”

“약혼 이후에 크로셀 후작이 누굴 만나고 어디서 뭘 했는지 캐내 본다. 그러면 놈이 속한 조직에 대해서 윤곽을 잡을 수 있다?”

하인켈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이놈의 목적은 크로셀, 그 배후에 있는 조직의 조사였다.

하인켈이 다시 말했다.

“그리고 이건 실례될 수 있는 말이라서 말씀드릴까 말까 했는데…….”

“너 아직 있었냐? 그냥 집에 가라.”

“……알리시아 아가씨가 크로셀 후작의 친딸이 아니라는 의혹이 있습니다.”

알리시아가 그런 뉘앙스로 말하긴 했지.

하지만 그게 중요한 정보인가?

내가 시선으로 묻자 하인켈은 목소리를 새삼 낮추었다.

“알리시아 아가씨의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모릅니다. 크로셀 후작은 그저 자기 딸로 인정했고요. 인간 귀족들 사이에서는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았지만 다들 모른 척했습니다.”

“크로셀 후작과 엘프 여자 사이에서 낳은 아이, 파고들면 엘프 비위를 거스를 수 있으니 자제했다?”

“예. 그런데 만약 크로셀 후작의 친딸이 아니라면 이야기가 복잡해집니다.”

하인켈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엘프와 사이 나쁜 다크엘프가 하는 말이니 선입견을 가지실 수도 있겠지만…….”

“난 그런 거 없으니까 빨리 말해.”

“크로셀 후작과 엘프들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

“크로셀이 지 딸도 아닌 예나를 데려가는 대신에 엘프들과 거래를 했다고?”

“예나가 누굽니까?”

“알리시아 애칭. 하여튼…….”

한참 생각하던 나는 올려다보았다.

하인켈은 선 채로 쭈뼛거리고 있었다.

앉아도 될지 말지 내 눈치를 본다.

“아, 목 아프니까 그냥 앉아. 앉는데…….”

“예, 하명하시죠.”

“다크엘프들에게 보고할 때 나에 대해서는 최대한 언급을 피해라. 뭉뚱그리거나 형님이나 백작님 이름을 넣어.”

“예?”

“그게 네가 리브라타에 머무르는 조건이다. 알았냐?”

어차피 크로셀이 사고를 쳤으니 다크엘프들도 정보를 수집할 것이다.

현장 요원인 하인켈을 써먹으면 내 존재를 축소하고, 감출 수 있다.

……암살여왕의 눈에 띄고 싶진 않다.

만에 하나 들켜도 내가 시릭이라는 걸 알 리 없겠지만.

그래도 가능한 한 좀 피하고 싶다.

“알겠습니다. 만약 어기게 된다면 사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냥 어기지 마세요, 이 새끼야.”

“하하, 제 입장 아시면서 그러십니까? 그럼 계속 리브라타에 있어도 됩니까?”

“가져온 술이나 내놔. 비싼 거면 용서해 준다.”

나는 하인켈의 손에 들린 술병을 뺏어서는 살펴보았다.

“오카리나 84년산? 이거 병당 얼마지?”

“700만 원입니다.”

“얼씨구, 다크엘프 요원님은 돈도 많네?”

“에이, 그냥 무리 좀 했습니다.”

하인켈이 웃으면서 내 눈치를 보았다.

난 혀를 찼다.

“됐다. 고기 먹는 데 술 가져온 놈을 내쫓을 순 없지. 편하게 지내라. 단, 이적 행위 하면 얄짤 없다.”

“명심하겠습니다.”

하인켈은 고개를 숙이더니 말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이번 크로셀의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엘프들이 내일 도착한다고 합니다. 자세한 정보를 더 모아 볼까요?”

“엘프치고는 엄청 빨리 반응했네? 뭔 일이야?”

“저도 그래서 의문입니다.”

“일단 좀 알아봐. 왜 이렇게 빨리 대응하는지, 누굴 보냈는지.”

크로셀 후작 사건은 단순하게 끝날 일이 아니다.

제국 각계 세력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기들 구미에 맞게 사후 처리 하려고.

가장 먼저 도착하는 건 엘프.

자기들이 리브라타의 후원자라고 기고만장하게 일 처리 할 게 뻔하지.

“남의 집에서 지랄하게 놔둘 순 없지.”

내가 무심코 말하자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았다.

기대와 신뢰의 시선.

“뭘 그렇게 봐? 말해 두는데, 내일부터 다들 실컷 일할 줄 알아. 나만 일 시키려고 했단 봐라.”

내가 엄포를 놓았다.

그때 고기를 굽던 아멜리아가 외쳤다.

“도련님, 이제 드세요!”

하지만 내일 일은 내일이고.

지금은 고기 뜯고 술 마셔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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