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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고인 황제놀음-22화 (22/230)

두 번 고인 황제놀음 (22)

불길의 밖으로

사아아악!

제자리에서 돌아앉으면서 적의 공격을 흘리고 둘을 동시에 벤다.

보통 사람에게는 어려운 일.

하지만 난 눈 감고도 타이밍을 맞출 수 있었다.

다수의 적에게 협공당하는 건 익숙하니까.

“커어억!”

확실한 감촉.

내 마력검이 필론의 갑옷을 부수고 가슴을 베는 순간…….

쨍그랑!

마력을 버티지 못한 검이 깨져 나갔다.

당연한 일이지만 3계위는 너무 강했나?

하지만 나는 반 토막이 난 검을 마저 휘둘렀다.

“크억!”

후작의 복부를 가르는 일격.

바닥에 완전히 꿇어앉은 나는 즉각 굴러서 빠져나왔다.

털썩!

등 뒤에서 쓰러지는 소리.

상황 끝이다.

“후우우…….”

나는 일어나면서 상황을 확인했다.

내 검은 칼자루만 남고 완전히 박살 나 버렸다.

필론이란 기사는 쓰러져서 움직이지 않는다.

“헉, 허으으윽.”

그리고 크로셀 후작은 배를 붙잡고 버티고 있었다.

도중에 검이 깨져서 마무리가 안 됐다.

“이, 이럴 수가! 대체 어떻게? 3계위라고? 넌, 넌 장남도 아니야. 백작에게 물려받은 것도 아닐 텐데?”

“크로셀 후작, 네가 꾸민 음모를 증언하고, 네 조직에 대해서 아는 대로 밝힌다면 교수형으로 선처하마.”

진짜 제안이다.

참수형보다는 명예롭거든.

하지만 크로셀은 들은 체도 안 하고 복부를 누르면서 숨을 몰아쉬었다.

어떻게든 일어나 보려고.

“크으윽. 아, 안 되겠군.”

크로셀은 무릎을 꿇었다.

복부는 장기가 밀집한 장소, 마력으로 억눌러도 싸우기 힘들다.

애당초 크로셀의 마력도 슬슬 끝이고.

내 시선에 크로셀은 씩 웃었다.

“후후후, 하하하하! 이제 와서 날 회유하려고 하다니, 웃기는군. 고작 죽음이 두려웠다면 이런 일을 꾸몄을까?”

“말했지만…….”

“그래, 인정하지. 리젠 리브라타. 네가 날 이겼다. 구제할 길이 없는 망나니였던 건 거짓, 날 치려고 오랫동안 칼을 갈고 있었구나!”

크로셀은 입술에 피가 나올 정도로 악물었다.

“하지만 제국을 위한 충정, 내 마음은 꺾이지 않는다!”

“야, 이 미친 새끼야! 누가 그렇게 충성하래!”

나도 모르게 버럭 고함을 쳤다.

충성한다면서 하는 게 이딴 개또라이 짓이냐?

하지만 크로셀은 번들거리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미쳤다고? 내가 보기에는 황제가 없는 지금 세상이 미쳤다. 제국의 중심, 상징이자 권력의 핵심! 다시 황제가 통치해야만 만백성이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 진실을 외면하고 자기들의 권력만 탐하는 간악한 이종족들, 그에 들러붙어 꿀이나 빠는 12가문! 모조리 제국의 적폐일 뿐이다!”

“지랄하지 마. 명분이 어쨌건 넌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했다.”

크로셀은 결국 리브라타와 부르작, 둘 다 몰살하려고 했을 뿐이다.

너무나 그릇된 신념.

더 말해 봐야 의미 없다.

화르르륵!

불길이 침실 바닥을 뚫고 올라온다.

나와 크로셀을 갈라놓는 불길.

이만 나가야 한다.

크로셀은 어차피 놔두면 알아서 죽을 테고, 괜히 마무리하려다가 일이 꼬일 수도 있다.

크로셀은 숨을 몰아쉬면서 말했다.

“……너도 머지않아 알게 될 거다. 이 제국은 완전히 썩어 버렸다는 걸. 고치기 위해서는 칼을 들고 피를 뿌릴 수밖에 없다는 걸!”

“그 짓을 또 하겠냐?”

나는 몸을 돌렸다.

“넌 결국 사람 죽이려 해 놓고 변명하는 놈이야. 고칠 다른 방법이 얼마든지 있는데도 굳이 이런 음모와 학살을 택했지. 네 능력 부족을 탓해야지 왜 세상을 원망해?”

“무슨 말도 안 되는…….”

나는 대답 대신에 손에 마력을 불러일으켰다.

노란색 마력, 3계위.

내 나이라면 천재 소리를 듣기 충분하다.

“……그, 그런 능력이 있으면서 대체 왜 얼간이로 위장했던 거지?”

“너처럼 바보짓 안 하고 제국 고치려고.”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크로셀은 부정했지만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자기보다 강한 내가 말하는 거니 인정할 수밖에.

“내, 내가 그 나이에 3계위였다면…… 나도…….”

크로셀은 새삼 북받치는 목소리를 흘렸다.

그는 2계위, 그것도 선조에게 물려받아서 이룩한 경지겠지.

“무능하니까 아는 게 그것뿐이고, 보이는 게 그것뿐이지. 넌 그래서 끝난 거다.”

“그럼 너는 어떻게 제국을, 어떻게 제국을 고칠…….”

나는 무시하고 복도로 나가 버렸다.

“리브라타? 잠깐! 리브라타!”

난 크로셀의 절규를 무시하고는 걸었다.

답을 모르고 죽는 것.

그게 내가 황제로서 크로셀에게 내리는 처벌이었다.

“시간을 너무 지체했군.”

불길이 일어나는 복도.

나는 옷소매로 입가를 막으면서 이동했다.

창문을 통해서 나가려 해도 이미 불바다였다.

보통 화재로는 단시간에 이렇게 안 될 텐데.

“아까 진동도 그렇고, 역시 폭탄이야. 그건…….”

폭탄, 폭발물은 제국군 내에서 엄중히 관리했다.

황제인 내가 특별 지시했으니까.

즉, 제국군 내부에서 폭탄을 빼돌렸단 소리가 된다.

“지랄 났네, 진짜…….”

제국의 속이 썩어 버렸다는 주장.

무시하고 싶지만 이래저래 걸린다.

나는 생각을 누르고는 얼른 걸음을 옮겼다.

여기저기 내려앉고 타는 소리가 들리는 게 저택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리젠!”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익숙한 실루엣.

설마해서 자세히 보니 로데릭이었다.

“뭐…….”

어떻게 여기에 있지?

나는 놀랍기도 하고 반가워서 그쪽으로 다가갔다.

“리젠! 어디에 있냐! 대답해라!”

“여깁니다!”

내 대답을 들었는지 로데릭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거리는 가깝지만 벽과 문이 불타고 있어서 쉽지 않았다.

로데릭은 바닥의 불꽃을 뛰어넘으면서 외쳤다.

“리젠! 얼른 나가야…… 뒤!”

“…….”

로데릭의 기겁한 얼굴.

돌아본 내 얼굴에 보이는 젊은 기사.

크로셀의 심복, 필론이 검을 앞세우면서 달려들었다.

“죽어라!”

내 가슴을 노리는 찌르기.

받아칠 무기는 없고, 불타는 좁은 복도.

방법이 없다!

나는 얼른 마력을 일으키면서 몸을 틀었지만, 필론은 결사의 각오였다.

죽은 척하고 기회를 노릴 정도의 집념.

자기 다리가 불타건 말건 신경도 안 쓰고 날 노린다!

찌이익!

내 어깨를 스치는 검.

나도 주먹으로 쳐서 반격했지만 필론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 가슴을 찍으려고 들었다.

죽는…….

“으아아아아!”

그 순간, 불길을 뚫고.

전력으로 달려온 로데릭이 필론을 들이받아 버렸다.

“으아아아악!”

거구의 태클에 치인 필론의 몸이 날아갔다.

화르르륵!

타오르는 불길이 그의 몸을 불태운다.

비명을 지르면서 죽어 가는 필론을 외면한 나는 얼른 로데릭을 살폈다.

“크, 크으윽…….”

무릎 꿇은 로데릭.

불붙은 복도를 정면 돌파하는 바람에 여기저기 불이 붙었다.

나는 얼른 그 불을 털어 냈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로데릭의 허벅지에 박힌 검.

필론이 당하면서 찌른 것이다.

“젠장, 안 좋네.”

사람은 허벅지 잘못 찔리면 죽는다.

그나마 다행인 건 검이 박혀 있다는 건데.

그래도 다리가 저러면 걸을 수 없다.

통증은 마력으로 억누를 수 없으니까.

로데릭도 자기 상처를 내려다보고는 신음을 흘렸다.

절망한 얼굴.

이어서 각오한 표정.

내가 너무나 많이 봤던 얼굴.

인류의 수장으로서 싸우던 내게 지겹도록 보여 준 표정들.

“난 틀렸다. 얼른 나가라, 리젠.”

날 위해서 죽으려는 사람.

나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로데릭을 일으켜 세웠다.

“형, 지랄하지 마.”

“당장 안 나가면 너까지 죽는다.”

“아, 지랄하지 말라니까.”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로데릭.

나는 그를 일으켜 세우고는 이를 악물었다.

이 빈약한 몸, 마력을 써도 로데릭을 데리고 걷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크, 으음.”

무엇보다 허벅지의 칼이 빠지지 않게, 주의해야 한다.

시간을 잡아먹는다.

그사이 불길은 더 거세지고.

“리젠, 안 된다니까.”

로데릭은 애써 목소리를 짜냈다.

그를 부축하면서 나는 앞을 보았다.

“왜 돌아왔습니까?”

“……아버지에게 전했다. 그리고 일단 나부터 돌아온 거다.”

“정말 쉬지 않고 달렸군요.”

“이 녀석아, 고집부리지 말라니까. 너라도…….”

안색이 파래진 로데릭은 애써 말했다.

나는 묵묵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타는 저택 안에 내가 있다는 걸 알고 무작정 들어왔고, 불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던진 남자다.

이런 사내를 버려두고 어찌 혼자 살겠다고 하겠는가?

화르르륵!

그 순간,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이젠 완전히 불길이 복도를 집어삼켰다.

“…….”

나갈 길이 없다.

사방에서 몰려오는 불길.

이대로는 타 죽게 생겼다.

“형, 나 믿어?”

“뭐?”

“나 믿냐고.”

나는 다시금 확인했다.

로데릭은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그래, 넌 확실히 달라졌다. 우리 가문을 노린 크로셀의 음모를 파헤치고 확실하게 정리했다.”

“…….”

“내가 없어도…… 네가 반드시 우리 리브라타를 일으킬 거라고 믿는다! 아니, 우리 리브라타만이 아니라 제국을 위해서라도! 리젠, 너만큼은 반드시 살아 나가야 한다! 짐짝인 날 버리고 가라!”

“말은 고마운데 난 일하기 싫거든?”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로데릭이 신음을 흘렸다.

“이 녀석아, 지금…….”

“형은 살아서 나가야지. 그래야 형은 백작으로 죽어라 일하고 난 집안의 막내로 펑펑 놀고먹지. 내가 도박하다가 빚지면 그거 형이 갚아 주고, 내가 여자 피해서 도망 오면 형이 숨겨 주고. 아무튼 장남이 다 하고 나는 빌붙는 게 내 장래 계획이자 인생 설계걸랑?”

“……이 미친놈아.”

화르륵.

이젠 불길이 파도를 이뤄서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나는 웃으면서 물었다.

“여기서 나가면 그래 줄 거지?”

“그래, 그러마. 나갈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래 주마. 그러니까…….”

“그럼 됐어.”

이 순간 로데릭은 내게 마음을 열었다.

나는 로데릭이 흘리는 정신력을 받아들이면서 각오를 다졌다.

지금 약해진 내 경지에서 가능할지,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반드시 둘이 함께 살아남아야 했다.

뚜벅.

불길의 파도를 향해서 걷는다.

“리젠…….”

“나를 믿어.”

정신을 집중한 나는 염동력을 내 주변으로 퍼트렸다.

염동력은 중력이라는 절대적인 법칙마저도 초월하는 힘.

불길의 파도 역시 치워 버릴 수 있다.

염동력의 극의.

염동결계(念動結界).

화르르륵!

불꽃의 강이 나와 로데릭의 옆으로 물러난다.

있을 수 없는 광경, 로데릭이 흠칫 놀라는데, 내가 강하게 말했다.

“정신 집중해! 나를 믿어! 우린 나갈 수 있어!”

아……. 역시 힘들다.

염동결계를 계속 유지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황제 시절의 나라면 모를까, 지금은 단 10초도 유지하기 힘들었다.

정신력이 금방 바닥나고 머리가 아파 오기 시작한다.

뇌가 쪼개질 것 같은 두통.

“그래.”

하지만 그 순간 들려오는 대답.

로데릭이 강하게 말했다.

“널 믿는다, 동생아.”

그리고 로데릭의 정신력이 흘러들어 오면서 보충해 준다.

나는 이를 악물고, 계속 불꽃을 옆으로 치우면서 앞으로 향했다.

나는 절뚝거리는 로데릭을 부축하고.

부축받는 로데릭은 자기 정신을 쥐어짜 내서 내게 힘을 실어 준다.

서로 사이 나빴던 형제를 태워 버리고자 끝도 없이 몰려오는 불꽃의 강.

하지만 믿어 주는 벗과 함께라면.

그래도 형제라면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

“리젠 도련님!”

긴 불꽃의 강이 끝나 간다.

익숙한 목소리.

출구에서 가룰이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놈, 안 죽었네.”

“그래, 다들 무사하다. 리젠.”

로데릭이 말했다.

“네 덕분이다.”

“좀 더 칭찬해. 그리고 돈과 음식과 술로 갚아. 가끔 내 어깨도 주물러 주고.”

“……그래, 인마.”

로데릭의 풀어진 목소리.

달려온 가룰이 부축한 순간 나는 눈을 감았다.

정신력의 한계.

이제 기절한다.

뭐, 이 정도면 추가 근무는 충분히 했잖아?

이젠 니들이 죽어라 일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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