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21)
없을 거다, 없으니까
크로셀 후작과의 대치.
한데 크로셀은 조금도 겁먹은 얼굴이 아니었다.
부르작과 병사들이야 조무래기.
나야 마력이 없다고 알려졌지만 하인켈이 있는데?
“항복해라, 크로셀.”
“무슨 헛소리를! 내가 저깟 다크엘프 하나를 두려워할 줄 아나?”
허세?
아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고는 상황을 점검했다.
이종족 전사들은 개개인이 오래 수련해서 강해지고, 인간 기사들은 대를 이어서 강해진다.
인간의 장점은 세대교체.
마력전승(魔力傳乘), 전대의 마력과 검술을 다음 계승자가 이어받아서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게 바로 카라카스의 인간, 기사들의 장점이었다.
그런데 크로셀은…….
“아, 젠장. 전쟁이 없었군.”
나는 내가 뭘 까먹었는지 깨달았다.
내가 황제로서 다스리던 시절, 인간 귀족들은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칠죄신과의 전쟁에서 많은 귀족들이 툭하면 전사했으니까.
“귀족들이 전쟁터에서 덜컥 죽을 일이 없어졌군. 그래서 기사들이 하던 것처럼, 귀족들도 대를 이어서 전승하는 게 가능해진 건가?”
도미닉이야 그냥 애송이였지만, 크로셀은 가주다.
자기 아버지, 할아버지가 단련한 마력과 기술을 물려받았을 테지.
즉, 크로셀은…… 강하다!
일반 기사를 뛰어넘는 역량과 기술을 갖고 있을 것이다.
내가 제국을 다스린 이후, 제국에서 전쟁이 사라져서 가능한 일이었다.
크로셀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런 사회 상식을 이제야 알았나? 축하해 주지.”
“난 제사상으로 축하해 주마.”
나는 말하면서 하인켈을 곁눈질했다.
하인켈도 알아차린 눈치였다.
내가 크로셀의 실력을 잘못 측량했지만, 크로셀도 내 실력을 전혀 모르고 있다.
금방 끝낼 수 있다.
한데 크로셀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둘 다 꼭 죽일 필요는 없지. 리젠, 나는 자네를 살려 주고 싶네.”
“…….”
“자네 손으로 부르작 후작을 죽이게. 그러면 내 자네를 믿고 함께하지. 알리시아를 원하면 주지.”
“개소리도 이 정도면 현대 예술이군. 리브라타 사람들을 내 손으로 죽이라고?”
크로셀의 계획대로라면 리브라타는 파멸한다.
한데 그 집안의 아들인 나를 포섭한다고?
너무 비상식적인 제안이었지만 크로셀은 당당했다.
“그게 뭐 어떤가? 어차피 작위를 물려받지도 못할 막내, 거기다 마력까지 없으니 사방에서 깔보고 무시했을 테지? 자네도 그래서 밖으로 나돈 거 아닌가? 집에서 인정받지 못하니까 밖에서 망나니짓만 골라서 한 거겠지?”
“…….”
크로셀이 말했다.
“하지만 나는 달라. 나와 함께하면 자네의 안전은 물론이고, 모든 것을 약속하지. 리브라타의 백작? 되고 싶다면 되게 해 주지. 백작과 장남이 죽으면 그 자리는 바로 자네 것 아닌가? 아니면 더 바라는 게 있나?”
“굳이 날 포섭하려는 이유가 뭐지?”
내가 묻자 크로셀이 진지하게 말했다.
“자네는 유능하니까.”
“…….”
“옆의 부르작 후작은 물론이고 그 누구도 몰랐던 계획을 꿰뚫어 봤지. 아, 물론 알리시아는 어느 정도 눈치를 챘지. 하지만 알리시아는 계획의 한복판에 있으니 내가 일부러 좀 정보를 흘려 둔 거야. 그래야…….”
“실제 작전 상황은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는 법, 물샐틈없는 계획보다는 일부러 한 군데 틈을 만들어 둔다. 그러면 적들은 그 빈틈을 공략하겠다고 전력을 다하게 된다. 우리는 적을 의도대로 조종할 수 있을 것이다.”
내 말에 크로셀이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이어서 흡족한 표정을 짓는다.
“시릭 카라카스의 칠죄전장, 회고록 3장이지.”
“정석은 아니지. 도박이다.”
“그러니까 황제의 위대함이 돋보이는 거지.”
그냥 군량 없고, 병력 적어서 쥐어짜 낸 거야.
나는 혀를 찼다.
“그래, 당신 계획의 빈틈은 바로 알리시아였지. 나와 도미닉은 그녀의 미모에 매료되어서 정신을 못 차릴 테고, 알리시아 본인은 당신 계획을 알아봐야 결국 당신 손바닥 안에서 놀아날 테니까.”
알리시아는 외부의 조력자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크로셀이 흡족하게 말했다.
“……그래, 영민해. 너무 뛰어나! 대체 이렇게 뛰어났다는 걸 왜 몰라봤을까? 난 정말로 사람 보는 눈이 없어.”
크로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리젠, 나와 함께하자. 지금의 제국을 파괴하고 보다 평등하고 희망찬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그래, 정말로…….”
나는 웃으면서 손에 힘을 주었다.
“사람 보는 눈이 없군!”
기습, 방 안으로 뛰어들면서 크로셀에게 칼을 휘두른다.
마력은 일단 감춰 두고 찌르기!
“음?”
내 검격을 본 크로셀의 안색이 달라졌다.
얼른 뒤로 물러났지만 소용없다.
내가 염동력을 발휘, 일순의 머뭇거림도 없이 재차 땅을 차면서 따라붙었으니까.
“큭!”
크로셀은 나를 뿌리칠 수 없다는 걸 알고는 검을 휘둘러서 쳐 냈다.
마력으로 강화된 완력, 내 몸은 그대로 밀려났다.
“흡!”
하지만 상관없다.
내 직후에 따라붙은 하인켈이 검을 휘둘렀다.
침실이 넓다지만 그래도 셋이 싸우기에는 좁다.
오히려 내가 튕겨 나서 하인켈은 마음대로 공격할 수 있었다.
타타타탕!
“크으윽!”
하인켈의 빠른 연타, 일격마다 마력이 담긴 마력검이었다.
같은 마력검이 아니라면 상대할 수 없다.
인간은 보통 저렇게 남발은 금물이지만 이종족인 하인켈은 마력이 훨씬 많았다.
“으으음!”
몇 번 막던 후작은 결국 불리하다는 걸 알고는 얼른 몸을 굴려서 빠져나왔다.
전세를 보던 내가 이미 뛰어들고 있었지만.
“뭐…….”
빠아악!
후작은 내 검은 막았지만 이어지는 돌려차기는 막지 못했다.
염동권, 마력으로 방어해도 몸속이 울리는 충격을 준다.
“크, 으…….”
방구석에 몰린 크로셀이 나를 놀란 눈으로 보았다.
나는 재차 말했다.
“항복해라, 크로셀 후작. 너는 못 이겨.”
“…….”
크로셀 후작은 숨을 고르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 하인켈.
그리고 부르작 후작과 그 주변의 병사 십여 명.
크로셀은 외통수였다.
“항복해서 네가 아는 모든 걸 다 불어라. 그럼 선처해 주마.”
알리시아의 말도 그렇고, 작전의 스케일도 그렇고.
지금 이건 크로셀의 단독 작전이 결코 아니다.
이놈의 배후에 도사린 놈들, 덜미를 잡아야 한다.
“항복? 내가?”
크로셀이 씩 웃었다.
“반대일걸?”
불이야아아아!
멀리서 들려오는 고함 소리.
쿠우우웅!
이어지는 둔중한 충격.
발바닥을 통해 전달되는 진동, 건물이 뒤흔들린다!
“뭐…….”
그 순간 크로셀이 내게 뛰어들면서 검을 휘둘렀다.
나는 뒤로 넘어갈락 말락 한 자세로 검을 휘둘렀다.
염동력을 자세 제어에 사용하면 불안정한 자세로도 검을 펼쳐 낼 수 있었다.
타타닥! 까앙!
오가는 공방, 그리고 크로셀이 마력검을 발휘하면서 찔러 온다!
나는 급히 검을 뒤로 뺐지만 늦었다.
“윽!”
내 어깨에 출혈.
크로셀이 연속 공격을 펼치려고 했지만, 하인켈이 끼어들어서 걷어 내 주었다.
크로셀은 눈살을 찌푸리고 나를 보았다.
“……아주 희한한 검법을 쓰는군.”
“방금 그거 폭탄이냐?”
저택이 흔들릴 정도의 진동이 연이어진다.
안에서 폭탄을 터트린 것이리라.
하지만 폭탄은 군용품, 제국군 밖으로 반출 금지다.
내가 황제로서 딱 박아 놨는데?
어떻게 된 일이지?
크로셀은 침묵하고는 신중하게 나를 노려보았다.
“부, 불입니다!”
“부르작 후작님! 피하셔야 합니다!”
부르작 주변의 병사들이 떠들었다.
실제로 복도, 방 쪽으로 검은 연기가 몰려오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대로 계속 저택에 남아 있으면 타 죽는다.
“어쩔 텐가? 계속할 텐가?”
크로셀의 도발.
부르작은 발을 동동 구르다가 나를 보곤 외쳤다.
“리브라타! 얼른 달아나야 하네! 그만 가세!”
“…….”
나는 잠깐 생각하곤 하인켈에게 말했다.
“하인켈, 네가 부르작 후작을 호위해서 빠져나가.”
“예? 진심이십니까?”
“그래, 누구도 믿지 마라. 크로셀이 미리 사주한 누군가가 부르작을 죽이려고 들 수도 있으니까.”
부르작은 척 봐도 전투 능력이 없다.
아니, 귀족이니 나름 있겠지만 혼란 통에 누가 푹 쑤시면 답 없다.
“크로셀의 계획대로 부르작이 죽으면, 미리 포섭된 병사들이 날뛸 거다. 그러면 놈의 계획대로 되고 리브라타에도 피바람이 친다.”
하인켈은 나 그리고 크로셀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무운을 기원합니다.”
하인켈이 몸을 돌렸다.
부르작과 병사들이 달려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발소리는 멀어지고 열기와 연기는 밀려온다.
그래도 나는 침착하게 크로셀을 보고 있었다.
이보다 더 위험한 사선은 얼마든지 넘어왔다.
“…….”
어차피 크로셀도 살려면 뛰쳐나가야 한다.
동등한 조건, 먼저 틈을 보이는 쪽이 진다.
“마력이 있군.”
갑자기 크로셀이 툭 말했다.
나는 동요하지 않았지만 크로셀은 계속 말했다.
“……아니, 그게 당연하군. 모든 귀족은 마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리브라타의 얼간이는 없다. 그렇게 알려졌지만 그 자체가 위장이었군.”
“뭘 노리고 그런 위장을 하겠어?”
“모르지. 하지만 있다고 봐야지. 그게 아니라면 하인켈이 너만 남기고 저리 떠나지는 않았을 테니까.”
카라카스에서는 마력이 없으면 싸움이 성립이 안 된다.
일단 적의 마력방어를 못 뚫고, 반대로 적의 마력검을 못 막는다.
보통은 날 깔보거나 혹은 불길함을 느끼고 초조해할 텐데…… 크로셀은 나를 가늠하고 있었다.
저력이 있는 놈이다.
“크로셀 후작님!”
갑자기 복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나는 반사적으로 자세를 측면으로 바꿨다.
방 안의 후작, 방 밖의 적에게 동시에 대응할 수 있게.
젊은 기사가 방으로 뛰어 들어오다가 멈칫했다.
나를 알아보고 검을 겨누자 크로셀이 말렸다.
“기다리게, 필론.”
“시간이 없습니다. 얼른 나가셔야 합니다.”
“리젠, 마지막으로 다시 권하겠네. 우리의 대의에 동참할 생각은 없나? 제국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다시 살찌우기 위해서 피를 흘려야 하네!”
“피똥 싸 놓고 건강하단 개소리 말고 얼른 의사한테 가라. 치질은 병이야.”
“……없나 보군. 필론. 리젠은 마력을 숨기고 있네. 조심해서 정리하게.”
필론의 얼굴도 변했다.
보다 신중한 얼굴.
두 놈이 나를 향해서 검을 겨눈다.
검 끝에 맺힌 마력.
“아, 이거…….”
큰일인데.
솔직히 위기다.
물론 나한테 마력검 정도야 식은 죽 먹기다.
하지만 마력검을 쓰려면 그 사람만을 위해서 특별히 제조한 무기가 필요하다.
내가 지금 검에 내 마력을 담으면…… 무조건 깨진다.
거기다가 둘 다 나름 실력자에다가 좌우에서 포위한 상황.
밀려오는 불길, 불타는 냄새가 초조함을 더한다.
내 실력은 황제 시절보다 훨씬 아래고.
끔찍한 악조건만 가득하다.
“……그래도 항복할 마음은 진짜 단 하나도 안 드네.”
“뭐?”
“제국을 세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는지 아느냐, 알라이 크로셀 후작.”
나는 말했다.
백작가의 애송이 리젠 리브라타가 아니라.
황제 시릭 카라카스로서.
“전쟁이 없어서 문제라고? 네놈이 전쟁터에서 신음하는 병사들을 본 적이 있느냐? 동료의 시신을 뒤져서 가족에게 보낼 편지를 찾아내는 병사들과 함께한 적이 있느냐? 부상의 고통에 끙끙거리는 병사들과 베개를 나란히 하고 잠들어 본 적이 있느냐?”
“지금 무슨…….”
“없을 거다. 없으니까 그딴 개소리를 하지.”
난 있다.
사무칠 정도로.
“100년 동안 황제가 없었다고 해도, 12가문이 문제라고 해도, 네 주장대로 제국이 내부에서 썩어 문드러졌다고 해도…… 그래도 지금의 이 평화를 만들기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한 사람들을 안다면 어찌 파괴하려고 들까?”
“대체 무슨 소리를…….”
“천년제국을 세우기 위해서 누구보다 장하게 싸운 영웅들, 내가 반드시 해내리라 믿어 줬던 벗들을 잊어 본 적이 없다. 그러니 네놈을 여기서 처단하겠다.”
크로셀은 눈을 깜빡거렸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뒤이어서 온 기사, 필론이 크게 외쳤다.
“후작님! 서둘러야 합니다!”
“……알겠다!”
크로셀도 검에 마력을 잔뜩 불어 넣었다.
필론 역시.
두 놈의 검, 붉은색 마력이 주황색으로 물든다.
2계위.
마력검으로 2계위를 이루는 건 상당한 성취였다.
둘 다 선대에게 물려받은 것이리라.
“합!”
“흡!”
양쪽에서 동시에 덤벼 오는 놈들.
그 순간…… 나는 주저앉듯이 몸을 무너트리면서 원으로 검을 휘둘렀다.
내 검 끝에 맺히는 마력.
붉은색.
주황색.
그리고…… 노란색으로.
3계위의 마력검.
“뭐!”
크로셀의 경악하는 비명.
하지만 내가 더 빠르다!
이 검이 버틸 수 있는 건 단 한 번.
그럼 두 놈을 동시에 끝장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