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20)
말이 길어 봐야
다음 날 새벽.
알리시아 크로셀의 침실.
나는 의자에 앉아서 책을 보고 있었다.
다 읽었다.
책을 덮은 나는 품에서 종이를 꺼냈다.
제국은행의 인장과 부르작 후작의 서명이 적혀 있는 수표다.
적힌 금액은 3천만 원.
이 수표를 갖고 제국은행에 가면 돈으로 바꿀 수 있으리라.
3천만 원이면 초짜 기사의 1년 연봉.
나름 큰돈이었다.
“은행은 잘 돌아가네.”
은행만이 아니라 상업, 농업, 치안.
내가 죽고 100년이 지난 지금도 문제없이 돌아간다.
내가 만든 세상, 천년제국은 평화로웠다.
“다 문제없는 줄 알았는데…….”
크로셀의 음모.
그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다른 이들까지 얽혀 있다면.
제국은 내부에서 썩어 가고 있다는 소리다.
“아니, 오히려 오래 버틴 거지.”
황제가 없는데 100년을 버티는 제국이 어디 있냐?
물론 내 아내, 황후들이 각자 대리 통치를 했다만.
그래도 100년은 길다.
인간들은 못 버티지.
“골치 아프네, 이거…….”
“으으응.”
침대 위에서 들리는 신음 소리.
금발의 하프엘프가 상반신을 일으켰다.
알리시아가 졸다가 깬 것이다.
“…….”
나를 흘끗 보고는 놀란 표정.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아무것도 안 했다. 넌 멋대로 잤고.”
“아, 예.”
“처음부터 설명했잖아? 너랑 내가 오늘 밤 같은 침실에 들면 크로셀이 나부터 습격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또 부르작 후작의 사람들을 선동하려면 부르작부터 처리해야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취한 조치다.
알리시아가 눈가를 비비자 나는 하품을 했다.
“졸리면 좀 더 자든가. 잠을 자야 일을 하지.”
“당신은 겁 안 나요?”
은은하게 일렁거리는 촛불에 비친 미녀의 얼굴.
곧 벌어질 일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뒤섞인 눈빛.
“너는? 넌 잘해 봐야 역적 수괴의 딸이고, 자칫하면 오늘 죽어.”
“…….”
“그런데 왜 나를 돕지? 제국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크로셀 후작이 실패하면 알리시아도 법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성공해 봐야 자기 딸을 미끼로 내던지는 인간이고.
어느 쪽이건 알리시아에겐 미래가 없었다.
알리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그 사람 딸이 아니에요.”
복잡한 사정이 있는 투.
나는 그녀의 뾰족한 귀를 흘끗 보았다.
하프엘프, 인간과 엘프 사이에 나오는 종족.
이 카라카스, 천년제국에는 인간과 일곱 이종족이 있다.
그 일곱에는 하프엘프가 포함되지 않는다.
하프엘프는 자식을 생산하지 못하니까.
엘프들에게는 불결한 돌연변이 취급, 다른 이종족들도 경원했다.
아름답지만 생식능력이 없는 이들은 구심점도 없고, 그저 뿔뿔이 흩어져서 살다가 사그라들었다.
이 아름다운 후작 영애 역시 마찬가지겠다만.
“그 얼굴과 몸매로 남자였다니. 기술 발달은 정말 무시무시하군.”
“…….”
알리시아는 기막혀서 보았지만 나는 딱 잘라 말했다.
“야, 난 이제 후작 목 치러 가야 해. 쓸데없는 정보로 사람 머리 혼란스럽게 만들지 마. 내가 그 사정 알면 크로셀 후작 조지는 데 도움 되냐?”
“아, 아뇨.”
“그럼 됐어. 지금은 무조건 살아남는 것만 생각해. 후작이 널 죽일 확률도 상당히 높으니까.”
나는 다시 말했다.
“정 말하고 싶으면 살아남은 다음에 해라. 네 우울한 인생살이를 돈 받고 들어 줄 테니까. 한 50만 원 받고.”
“…….”
“아, 이번 일에 정보도 제공하고 나름대로 협력했지? 반 깎아 줄게. 이거 완전 퍼 주는 거다?”
내가 진지하게 제안하자 알리시아는 멍한 얼굴이었다.
갑자기 밝은 웃음소리.
“……아하하하, 당신은 뭘 그렇게 시답잖은 소리만 해요?”
“주변에서 하도 안 받아 주니까 이리되더라.”
황제인 내가 뭔 소리를 해도 눈치만 보고, 비위나 맞추려고 했으니까.
내가 원래 편하게 말하는 성격이기도 하고.
똑똑.
노크 소리.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됐다. 간다.”
“예.”
알리시아는 일어나서는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부디 몸 조심히 돌아오세요. ……그, 혼약자?”
“우리 파혼할 건데?”
“……그래요? 그래요.”
알리시아가 묘하게 나를 보다가 눈을 깔았다.
나는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나갔다.
방문 앞에 서 있는 건 가룰, 그리고 하인켈이었다.
하인켈이 나직하게 말했다.
“크로셀 후작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이야기한 대로 해 놨지?”
“예.”
하인켈의 대답에 나는 가룰을 돌아보았다.
“알리시아를 지켜라. 단, 네 목숨이 위험하면 그냥 내빼.”
“무슨 소리십니까? 제가 반드시 목숨을 걸고서라도 알리시아 아가씨를…….”
“지랄하지 말고.”
포효.
가룰이 움찔하자 나는 포효를 끄고는 담담하게 일렀다.
“알리시아는 내 여자가 아니고, 설사 내 여자여도 네 목숨 걸지 마. 알리시아는 이번 사건의 증인이자 또 증거를 가져올 수 있다니 가급적 살려 보라는 거다. 위험하면 바로 내빼.”
“…….”
“난 내 주변 사람 죽는 거 싫다. 알았냐? 뒤지면 나한테 뒤진다?”
“예, 예.”
가룰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표정을 풀고는 하인켈에게 턱짓을 했다.
하인켈이 먼저 앞서 나갔다.
심야의 조용한 복도, 인적은 없다.
하인켈이 나직하게 말했다.
“생각과 다른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러고는 자기 귀를 가리킨다.
다크엘프는 엘프만큼은 아니지만 청력이 좋다.
주변에 다른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했다는 의미다.
“가룰 죽지 말라는 게 이상해? 난 네가 순순히 협조하는 게 이상한데?”
“하하, 아시잖습니까?”
“그래, 알지. 다크엘프의 이득을 위해서 움직이는 거.”
난 부르작에게 돈을 받았고, 하인켈이 더는 나를 지킬 이유가 없다.
하지만 하인켈도 돌아가는 사태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아니, 처음부터 이걸 파헤치려고 부르작 후작 아래 들어온 거겠지.
하인켈은 머리를 숙여 보였다.
“……음, 죄송합니다.”
“니들 일하는 방식 아니까 됐어. 함부로 발설하면 죽잖아.”
하인켈도 악의가 있어서 내게 정보를 감춘 게 아니다.
다크엘프의 지침이지.
현장 요원인 하인켈은 내게 무작정 알려 줄 수 없었다.
“그나저나…….”
크로셀의 목적을 알고 나니 옛일이 떠오른다.
사람들은 제국이 세워진 이후의 눈부신 발전을 노래하지만 나는 그 전의 일들을 똑똑히 기억한다.
칠죄신과의 가혹한 전쟁.
사람들은 시릭 카라카스를 위대하다고 찬양하지만 나는 불세출의 명장이 아니었다.
오히려 패전이 많았다.
인류연합군 자체가 낯선 개념이었고, 칠죄신의 종복들은 너무나 강력했다.
때로는 부하들의 판단 미스로, 때로는 보급 문제로, 때로는 내 실수로.
나와 내 군대는 패배해서 물러났고, 쫓겼다.
그런 나를 인류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살아야 한다고 초개처럼 목숨을 바친 이들이 너무나 많았다.
제국군에 들어와서 밥은 굶지 않았다고, 너무나 행복했다고 말하며 내 앞에서 숨이 끊어진 병사들.
나를 모셔서 영광이었다면서 적을 향해 혼자 돌격한 기사.
사지에서 나로 위장하고는 스스로 미끼가 되었던 귀족.
“…….”
그 수많은 희생을 딛고 겨우 건설한 제국을 부수려 하다니.
황제의 부재를 그리도 못 참겠단 말인가?
내가 고개를 젓는데 하인켈이 모퉁이에서 멈춰 섰다.
미리 약속했던 수신호.
나도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한참 뒤.
끼이이익.
저 모퉁이 너머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
하인켈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인켈은 대뜸 복도를 달렸다.
질주.
나 역시도 그 뒤를 따라서 달렸다.
퓌이이익!
달리는 하인켈이 휘파람을 불고는 바로 문을 걷어차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뭐, 뭐야!”
침실에 먼저 들어왔던 이가 놀라서는 우리 둘을 돌아보았다.
안에 있는 놈은 둘.
하인켈이 불문곡직 앞에 있는 놈을 걷어찼다.
뻐어어억!
반사적으로 무기를 휘두르려던 놈이 맞고 날아갔다.
남은 건 한 놈.
비교적 침착하게 뒤로 물러나 있었다.
“다 끝났다.”
나는 선언하면서 가지고 온 마력램프를 켰다.
방 안이 확 밝아진다.
“뭐야, 진짜 크로셀이네? 필론이라는 기사를 보낼 줄 알았는데.”
남은 상대, 아직 서 있는 놈은 복면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떡 벌어진 어깨, 체형을 보면 크로셀 후작이 맞았다.
“아, 하긴 인력 부족이라서 직접 발로 뛰어야지? 그건 나도 절감하는 중이지.”
여긴 부르작의 저택, 크로셀도 사람을 많이 데리고 오지 못했다.
아니, 데려왔어도 이런 기밀에 쓸 수 있는 사람은 적으리라.
그러니 손수 나서야지.
크로셀이 창문을 흘끗거리자 내가 먼저 말했다.
“그쪽에도 이미 병사가 대기하고 있다. 뛰어내려도 아프기만 해.”
“…….”
크로셀은 소리 없이 고민했다.
나와 하인켈을 잡으면 나갈 수 있지 않나 싶어서.
아니면 침대에 이불을 덮고 불룩하게 누워 있는 상대를 마무리할지…….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그때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부르작 후작과 병사들이 하인켈의 휘파람을 듣고는 침실로 달려온 것이다.
크로셀은 부르작 후작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 부르작 후작은 다른 방에서 잤어.”
“리, 리젠 리브라타!”
부르작은 나를 보고는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놈의 시선이 하인켈을 향한다.
어찌 된 영문이냐고.
하인켈은 웃으면서 설명했다.
“죄송합니다, 부르작 후작님. 후작님을 살리기 위해서 약간 거짓말을 했습니다.”
“크로셀 후작이 범인이라고 말해 줘야 안 믿었겠지. 멍청하니까.”
“뭐? 멍…….”
부르작은 화를 내려다가 멈칫했다.
자기 침실에 칼을 들고 서 있는 복면남이 수상하다는 거야 알 테니까.
그리고 내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도.
“그래서 내가 하인켈에게 누군가 부르작 후작의 목숨을 노릴지도 모른다고 전했지. 오늘 저녁에는 침실을 바꾸는 게 좋겠다고. 하지만 만약 주변에 알려지면 괜한 이야기가 돌 수도 있으니 아주 은밀하게 교체하라고.”
“…….”
“물론 부르작은 하인켈이 도미닉을 방관했다고 화를 냈지만, 다크엘프의 충고니 무작정 무시할 수도 없었지. 만에 하나라는 것도 있으니까. 결국 설득에 넘어갔어.”
내가 보자 부르작은 어물거리다가 시선을 피했다.
결국 이자는 욕심 좀 많은 소인배다.
“하지만 소인배는 소인배 나름대로 쓸 수 있지. 이제 그만 포기하시지, 크로셀.”
“…….”
“칼 들고 침실에 들어온 변명이라도 해 보겠다고? 복면을 쓴 이상 어떤 말도 안 통하잖아?”
크로셀은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입이 열린다.
“후후후. 후하하하하하하!”
쩌렁쩌렁한 웃음소리.
크로셀은 복면을 벗어 던졌다.
“크, 크로셀 후작. 당신이 대체 왜 나를…….”
부르작의 물음, 크로셀 후작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왜 죽이려고 했는지 알고 싶소?”
“그, 그래! 자네는 분명히 날 도와서 우리 부르작을 12가문에…….”
“거짓말이었소. 아니, 뭐, 사실 아무래도 좋았소.”
크로셀은 담담하게 말하고는 나를 보았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이미 다 아는 눈치로군. 알리시아가 다 말해 줬나? 아니, 설사 알리시아가 다 파악했다고 한들…… 어떻게 이리 기민하게 반응하지? 넌 멍청이일 텐데?”
“그 전에 하나만 묻자.”
나는 한숨을 쉬며 물었다.
“대체 왜 이 지랄을 하는 거냐? 리브라타와 부르작을 싸움 붙여서 대혼란을 일으키고 그다음에는?”
“…….”
“부르작은 차라리 이해가 가. 리브라타가 아니꼬우니까 밀어내고 자기들이 12가문에 들어간다? 용납은 못 해도 왜 그런지 이해할 순 있어.”
사회적 상승 욕구니까.
“하지만 크로셀, 넌 이미 제국의 귀족, 그것도 후작이다. 남부러울 거 없을 텐데? 그런 네가 왜 굳이 이런 미친 짓까지 하면서 제국에 혼란을 불러일으키려는 거지?”
“…….”
“이 천년제국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는데? 너도 귀족이라면 아버지, 할아버지에게 전해 듣지 않았나? 제국 귀족은…….”
“제국 귀족은 제국을 수호하기 위해서 가장 앞서야 한다.”
대답한 크로셀 후작, 나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대등한 남자를 상대할 때의 눈빛으로.
“그래서 지금 이러고 있지.”
“개소리하지 마. 제국은 만들어진 이후로 단 한 번도 전쟁이 없었어.”
내가 살았을 때는 물론이고, 내가 죽고 100년이 지났는데도.
국지적인 소란, 무력 충돌 사태는 있었지만 본격적인 전쟁은 없었다.
“그게 문제지.”
“뭐?”
“제국은 칠죄신과의 치열한 전쟁을 거쳐서 만들어졌다. 초대 황제 시릭 카라카스의 지도 아래에 24년 동안 눈부시게 발전했지. 하지만 그 뒤에는? 초대 황제가 급작스럽게 죽은 다음에는 뭐가 달라졌지?”
“…….”
크로셀의 얼굴에 분노가 깃들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어! 오히려 퇴보했지! 제국은 사실상 토막이 났는데도 다들 그걸 외면하고 도피할 뿐이야! 황좌는 비었고 국정은 이종족들이 멋대로 농단할 뿐이지!”
“뭐?”
“이미 제국은 썩어 버렸다. 완전히 갈아엎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해!”
“야, 그걸 말이라고…….”
“자네가 12가문의 일원이라고 뭐 대단한 줄 아는가? 착각이야! 결국 이종족이 좀 더 예뻐하는 개새끼일 뿐이지!”
크로셀이 힘주어 말했다.
“12가문? 그중에서 황제를 결정한다고? 100년이 넘게 아무것도 안 했어! 대체 언제쯤 황제가 나올까? 내년? 10년 뒤? 500년 뒤에?”
인간에게 100년은 너무 긴 시간이다.
크로셀이 목이 터져라 외쳤다.
“설사 그렇게 황제를 결정한다고 한들, 이종족들이 그가 황제로 부적합하다고 거절하면 그만이야! 결국 제국의 모든 최종 결정권은 이종족들이 쥐고 있어!”
“…….”
“그 12가문들도 이종족들의 후원을 받으려고 알랑방귀를 뀌는 게 현실 아닌가? 시릭 카라카스는 인간이었다. 한데 그 영광스러운 황제의 뒤를 잇는 게 어째서 이종족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거지?”
크로셀이 나를 노려보았다.
“리젠 리브라타, 자네도 생각이 있다면, 제국의 앞날을 걱정하는 귀족이라면 나를 이해할 텐데? 아니, 오히려 동참해야지! 제국을 새롭게 바꾸기 위해서는 우리 귀족들이 앞장서서 일어나야 해! 이 세상의 뿌리부터 바꿔야 해!”
일장 연설.
나는 혀를 차고는 칼자루를 잡았다.
“개소리 길게 한다고 말 되는 거 아니다. 내가 깔끔하게 정리해 주마.”
아버지, 리브라타 백작이 채워 준 검.
아들이 부디 무탈하게 돌아오라는 기원을 담은 검을.
뽑아서 적에게 겨눈다.
“야, 이 반란군 노무 새끼야.”
하다 하다 나한테 반란하자고 꼬시냐?
넌 사람 잘못 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