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19)
정보를 정리하고 다음을 정리하려고
해 질 녘.
부르작 후작 저택의 객실.
크로셀 후작은 흡족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얼간이가 죽으려고 왔군.”
“리젠 리브라타를 어떻게 하실 겁니까?”
묻는 건 갑옷을 입은 인간 남자였다.
이름은 필론, 아마도 가명.
이전 경력은 크로셀 후작도 모른다.
하지만 동지였고, 실력은 확실한 기사였다.
“그야 죽여야지.”
“하지만 그는 부르작 후작에게 받을 돈이 있고, 다크엘프 하인켈을 공증인으로 세웠다는데요?”
“아, 걱정할 거 없네. 내가 부르작에게 이미 말을 해 놨네. 수표로, 오늘 저녁에 당장 내줄 거야.”
“……돈을 주고 그 직후에 죽인다고요? 하인켈이 그걸 보고 가만히 있겠습니까?”
크로셀은 픽 웃었다.
“자네, 뭘 그리 꼬치꼬치 따지는가? 다크엘프들은 자기 종족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이들일세. 들어 보니 도미닉이 멋대로 한 일이더만. 또 그 다크엘프가 리젠을 위해서 싸우겠는가?”
“만에 하나라는 게 있습니다.”
“그래 봐야 하나지. 또 그 만에 하나로 다크엘프가 리젠의 편을 든다고 쳐도 자네라면 충분히 정리해 버릴 수 있잖은가?”
인간 기사들은 이종족 전사보다 개별 전투력이 뒤떨어진다는 게 통념이다.
단련한 시간이 차이 날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인간 기사들도 그걸 보완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리고 크로셀이 보기에는 필론의 실력은 충분했다.
정작 필론은 굳은 얼굴이었다.
“싸움은 해 봐야 아는 겁니다. 또 하인켈을 죽여 버리면 일이 커지지 않겠습니까? 다크엘프 쪽이 냄새라도 맡는다면…….”
“암살여왕의 귀에 들어갈 거라고? 전혀 걱정할 거 없네.”
크로셀은 씩 웃었다.
“오늘 밤에 모두 잿더미가 될 테니까.”
“오늘, 하실 겁니까?”
“이미 준비는 다 해 두지 않았나. 좀 앞당겨서 처리하지.”
“…….”
필론이 굳은 얼굴이자 크로셀은 눈살을 찌푸렸다.
계획을 실행하려고 하는데 이 실력 좋은 기사가 뭐 그리 겁을 내는지 모르겠다.
“대체 왜 그러나?”
“지금 머무르는 리브라타의 도련님, 마력이 하나도 없다고 했죠?”
“그래, 변변찮은 색골이라고 소문이 났지. 마력도 없으면서 여자에게만 껄떡거리는 무능한 놈.”
“그런데 어떻게 도미닉을 이겼습니까?”
필론이 불쑥 말했다.
“도미닉이 맞은 걸 보니 정말 엉망으로 두들겨 맞았습니다. 일방적으로 당한 겁니다. 반면 리브라타 도련님은 상처 하나 없어 보였고요.”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증거는 없습니다만.”
필론이 나직하게 말했다.
“사전에 계약서를 쓰고 다크엘프를 공증인으로 세웠습니다. 도미닉은 성미가 급하고, 또 크로셀 후작님이 사전에 언질을 주신 것도 있었으니 얼른 정리하려고 했을 겁니다.”
“그래, 리젠을 부수고 돌아오면 바로 알리시아를 품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지.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헐레벌떡 뛰어나가는 꼴이 참 웃기더군.”
크로셀이 껄껄 웃었다.
쳇바퀴를 열심히 굴리는 쥐새끼를 보는 것처럼 혐오와 경멸을 담아서.
필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문제였을 겁니다. 아마도 도미닉은 마력을 초장부터 계속 낭비했을 겁니다. 리젠은 계속 피하기만 하다가 도미닉이 지친 다음에 역습했겠죠.”
“그래? 그렇구만.”
크로셀 후작은 별 흥미가 없었다.
그도 귀족, 마력이 있다.
그것도 크로셀의 가주로서 선대에게 물려받은 것, 상대가 누구건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크로셀은 애들 싸움보다는 자기가 꾸민 계획의 성취가 훨씬 더 중요했다.
필론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뭔가가 마음에 걸립니다.”
“그만 좀 하게. 난 자네 실력을 존중하지만 너무 신중하게 굴어. 이제 우리의 대업을 위해서 크게 내디디려는데 뭐 그리 소심하게 구나?”
“죄송합니다. 괜히 긴장한 것 같군요.”
필론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크로셀은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르작 후작이나 리젠을 대할 때와는 다르게 거짓 하나 없는 웃음.
그와 필론은 뜻을 같이하는 동지였으니까.
“계획과 다르게 리젠이 이쪽으로 왔지만 달라질 건 없어. 어차피 그놈은 지금 알리시아와 저녁 식사를 하고 있으니까. 보나 마나 알리시아와 잠자리를 갖고 싶어서 안달복달이 나 있을 거야. 물론 우리야 그래 주면 일이 편하니 고맙지.”
“예, 제가 너무 고심했습니다.”
“물건은 준비해 뒀나?”
“예, 성능은 확실합니다.”
“그래. 그럼 오늘 저녁, 아니 내일 새벽 2시쯤이 좋겠군. 그때 정리하지.”
“예. 그런데…….”
필론이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알리시아 아가씨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
웃던 후작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한참 뒤.
후작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내 딸도 아니니까.”
“예?”
“아니, 아니야. 죽으면 그냥 지 운명이지. 설사 살아남는다고 하더라도…….”
크로셀 후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됐네. 신경 끄고 준비하세.”
* * *
초저녁.
부르작 후작 저택의 식당.
나와 알리시아는 마주 앉아서 식사하고 있었다.
단둘, 아니 셋뿐이다.
내 뒤에는 가룰이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야, 다리 안 아프냐?”
“괜찮습니다. 여긴 적지입니다. 제가 목숨을 걸고 도련님을 24시간 지킬 테니 저는 신경 쓰지 말고 식사하시죠.”
“나만 먹으면 불편해. 너도 옆에 앉아서 먹든가.”
“……제, 제가 어찌 동석하겠습니까? 저는 신경 쓰지 말고 알리시아 아가씨와 한담을 나누시지요!”
“니가 무슨 기사뚜냐? 여자랑 잘해 보라고 등 떠밀게?”
달칵.
나와 마주 앉은 하프엘프, 알리시아는 식기를 내려놓았다.
“두 사람 다 전혀 긴장감이 없네요.”
“너도 없잖아. 설명하기도 바쁠 텐데 태연하게 식사나 하고 있고.”
“이미 크로셀 후작에게 포섭당한 사람들의 눈과 귀가 있어요. 그들을 피해서 이야기를 나눠야 하잖아요.”
나는 심드렁하게 받았다.
“사실 크로셀 후작은 무조건 날 죽이려고 한 게 아니야. 나와 도미닉, 둘 중 하나가 박살 나면 그만이었어. 귀족이 결투한다고 반드시 죽는 건 아니니까.”
또 대리 결투로 마무리할 수도 있다.
변수가 많다.
“중요한 건 리브라타와 부르작의 자식들을 싸움 붙이는 거야. 그리고 미끼인 너는 하프엘프, 엘프 피가 절반은 섞였지. 인간 남자라면 선망할 테니 나와 도미닉은 서로 맹렬하게 싸우겠지.”
자기 이야기인데도 알리시아는 별 반응 없이 들었다.
“둘 중 하나가 크게 다치는 게 기본, 죽으면 좋고, 둘 다 죽으면 더 좋고. 이게 크로셀 후작의 생각이었겠지.”
“그다음은요?”
“부르작 후작은 소인배지만 아들은 아끼더군. 도미닉이 죽었다면 눈 돌아갔겠지.”
실제로 앞뒤 사정 가리지 않고 병사들로 공격하려고 하기도 했고.
“반대로 내가 죽었어도…….”
백작은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12가문 리브라타의 위신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행동에 나서야 했지.
“결론, 크로셀의 목적은 부르작과 리브라타의 유혈 충돌이다. 그리고 넌 그 미끼로서 크로셀 후작에게 협조했을 텐데? 내가 왜 널 믿어야 하지?”
물론 알리시아가 나에게 협조적인 건 맞다.
하지만 그녀는 크로셀의 딸, 무작정 믿을 수가 없었다.
“방법이 없었어요. 어차피 나 혼자선 막을 순 없었으니까. 협력하는 척하다가 크로셀 후작의 덜미라도 잡을 기회를 잡아야 하니까.”
“당연히 못 믿겠는데?”
“믿건 안 믿건 일단 내 말을 들어 봐요. 나는 크로셀 후작 아래에서 은밀하게 정보를 모아 왔으니까.”
이 하프엘프는 참 거침이 없었다.
진취적인 건 흥미가 간다.
“당신 말이 다 맞아요. 크로셀 후작은 12가문인 리브라타 백작 가문과 부르작 후작 가문을 싸움 붙이려던 거죠.”
“그걸로 크로셀 후작이 뭘 얻지? 내가 그걸 모르겠거든.”
나는 귀를 기울였다.
황제 시절, 유능한 행정가의 브리핑을 듣던 것처럼.
“크로셀 후작은 이 유혈 충돌을 발판으로 천년제국의 세력 구도를 개편할 생각이에요. 그가 왜 하필 이 북방, 알라카스 산맥의 리브라타를 노렸냐고요? 12가문에서 가장 약하기도 하지만, 엘프가 통치하고 있으니까요.”
“엘프는 적극적으로 통치하지 않는다. 어지간한 사건이 일어나도 인간들끼리 알아서 하라고 방관할 것이다?”
“예, 최적의 조건이죠.”
알리시아는 빠르게 말했다.
“지금 제국 내부의 정치 세력을 아나요? 제국은…….”
“귀족원, 이종족, 제국군, 행정부. 거기다 철도헌병대. 하드디스크 조각모음 할 것도 아닌데 완전 중구난방이지. 또 귀족원과 12가문은 하나이면서도 둘이지? 황후들도 이종족이지만 미묘한 입장들이 있고.”
“정치 감각은 언제 길렀죠? 좀 놀랍네요.”
알리시아는 새삼스럽게 나를 보았다.
방금 전까지는 냉철했는데 지금은 순진한 소녀 같다.
그녀는 다시 차분하게 말했다.
“초대 황제 시릭 카라카스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100년 동안 제국은 어영부영하게 되어 버렸어요. 세상은 발전하지 않았고, 모호하게 파편화된 권력은 둥둥 떠다니기만 했죠.”
“다음 황제를 뽑았어야지…….”
나도 모르게 혀를 찼다.
결국 내 죽음 이후 제국은 현상 유지를 하는 게 고작이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만 불가능해요. 12가문은 100년 동안 논의했지만 단 한 번도 결론을 내지 못했죠. 앞으로 100년, 200년이 흘러도 똑같을 거예요.”
“…….”
“정말 만에 하나, 기적적으로 12가문이 결론을 낸다고 쳐도 이종족들이 인정할까요? 그것도 각기 생각과 가치관이 다른 일곱 이종족들이?”
“그렇게 말하는 댁도 이종족의 피가 절반은 흐르는데?”
“……자꾸 혈통을 거론하는군요.”
“당연하지. 크로셀의 딸이니까.”
“나는 지금 혈연을 떠나서, 제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 일을 막으려는 거예요. 이대로라면 가까스로 유지되고 있던 제국 내부에 큰 피바람이 몰아칩니다. 변혁을 말하는 이들이 초대 황제의 위업을 산산조각 낼 거예요.”
알리시아는 강하게 말했다.
내가 정리했다.
“크로셀 후작은 이 동네에서 큰 소동을 일으키고 그 책임을 리브라타에 뒤집어씌운다. 그래서 12가문의 리스트를 바꾸고, 이어서 제국 내부의 권력 구도를 완전히 갈아엎는다?”
“예, 개혁이라는 이름의 대전쟁이겠죠.”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알리시아가 딱 잘라 물었다.
“안 믿기나요? 내가? 아니면 내 이야기가?”
“아니, 사실 그럴 만해. 100년은…….”
이종족에게는 짧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너무나 긴 기간이다.
황좌의 공백이 100년.
앞으로 100년, 300년이 지나도 황제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그냥 황제 없이 살아도 되지 않나?”
“……갑자기 엄청나게 무책임한 소리를 하는군요. 황제는 있어야 해요.”
알리시아가 힘주어 말했다.
“시릭 카라카스의 용투(勇鬪) 덕에 우리는 칠죄신에게 해방되었고, 또 눈부시도록 발전했죠. 그가 황제로서 세운 위업을 알긴 아는 건가요? 그는 단순한 전쟁 황제가 아니에요. 물론 칠죄신과의 전투를 끝낸 것만으로도 창세영웅(創世英雄)이지만, 그의 진정한 위업은 전쟁을 끝낸 이후부터죠. 가장 먼저 굶어 죽는 아이들이 사라졌어요.”
“야.”
“그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인구수에 맞서서 식량난을 해결했고 의료의 질을 개선했죠. 증기기관을 발명해서 철도를 깔고 물자의 수송을 원활하게 만들었어요. 교육환경을 크게 개선했고, 문자를 보급했죠. 뿐만인가요? 그동안 엉망진창이던 통화를 제도화한 데다가 제국은행을 세워서…….”
“야, 진정해. 왜 갑자기 말이 빨라져?”
“여기부터가 중요해요. 제국은행의 가장 큰 업적은 바로 화폐의 신뢰성을 공고하게 다졌다는 건데…….”
“알았으니까 그만해. 팬이야?”
초대 황제인 내 이야기가 나온 순간 완전히 정색하고 열변을 토하시네?
내가 기겁하자 알리시아는 당당하게 외쳤다.
“예! 전 그분을 존경해요. 아니, 숭배하죠! 저만이 아니라 그 시절을 기억하는 제국민이라면, 그 이후에 태어난 이들이라고 해도 많은 이들이 황제에 기대를 걸고 희망을 품고 있죠.”
“…….”
“황제는 있어야 해요. 조각난 제국을 하나로 모아서 다시금 이끌 황제가!”
뭐 이래.
……내 팬이다.
그것도 골수팬.
……설마 이게 요즘 시대 기본인가?
혹시 몰라서 내가 가룰을 돌아보니까.
끄덕, 끄덕.
감동해서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박수 쳐. 박수 치고 싶은 얼굴인데 그냥 참지 마.”
“예? 예.”
짝짝짝.
가룰은 진짜 박수를 쳤다.
알리시아는 박수가 부끄러운지 뺨을 붉혔다.
나는 이마를 누르고 한숨을 쉬었다.
“……미치겠다. 진짜.”
내가 이래서 은퇴하려고 했던 것 같아.
알리시아는 헛기침을 했다.
“아무튼 황제는 돌아와야 하는데, 그걸 아주 폭력적이고 불순한 방법으로 이루려는 무리들이 있어요. 그중 하나가 바로 크로셀 후작이죠.”
“무리들?”
“예. 당연하지만 후작 혼자서 이런 거대한 음모를 꾸밀 수 없죠. 그는 첨병에 불과해요.”
“…….”
들으면 들을수록 아득해진다.
결국 100년 동안 황제 없다고 돌아 버린 놈들이 일을 벌이려고 하고, 그중 하나가 크로셀이라고?
나는 머리를 누르고 물었다.
“그래서? 크로셀 후작은 이다음에 뭘 준비하고 있지?”
“……아마 부르작 후작과 당신을 죽일 거예요. 그리고 부르작 후작 가문의 사람들을 선동하겠죠. 당신이 부르작 후작을 살해했다고요.”
“내가 그럴 동기가…….”
“있잖아요. 당신은 도미닉을 밟아 버리고 돈을 받으러 왔어요. 부르작 후작으로선 체면이 깎여서 분노할 만해요.”
알리시아는 단호하게 말했다.
“설사 동기가 희박해도 상관없어요. 이미 크로셀 후작은 여기저기 은밀하게 돈을 뿌려 놨으니까요. 유사시가 되면 크로셀 후작의 의견이 힘을 얻을 거예요.”
“그리고?”
“양쪽 병사들의 일부를 돈으로 매수해 놨다고 알고 있어요. 일단 충돌하면 전선을 억지로 확대할 거예요.”
“역시 시간이 없군.”
크로셀 후작은 도미닉을 내게 보낸 순간부터, 아니 그 전부터 이 계획을 준비했을 것이다.
알리시아가 물었다.
“자, 이제 절 믿을 수 있나요?”
“넌 못 믿겠다. 그런데…….”
나는 혀를 찼다.
“네가 황제 빠순이라는 건 확실하네. 소름이 돋을 정도라서 믿을 수밖에.”
“어떻게 그분을 존경하지 않을 수 있죠? 난 당신이 더 이해가 안 가요.”
알리시아가 정색했다.
보통은 알리시아의 진의를 의심해야겠지만…… 날 존경하는 건 진짜다.
이 여자 혼모노야!
나는 잠시 생각하곤 말했다.
“내가 크로셀 후작을 선제공격하면? 성공해 봐야 난 무고한 후작 살해범이 되겠지.”
“…….”
“로데릭이 리브라타의 병사를 데리고 돌아오면 크로셀 후작은 타임아웃이야. 그는 내일 날이 밝기 전까지 모든 걸 끝내야 해. 즉, 오늘 밤에 크로셀 후작이 움직이면 내가 역습한다. 그리고 놈의 덜미를 붙잡고 놈이 속했다는 조직의 증거까지 잡는다.”
알리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증거라면 제가 봐 둔 게 있어요. 하지만 여기서 당장은 무리고, 좀 시일이 걸려요.”
“그럼 이번 일 끝나고 최대한 빨리 가져와.”
“……오늘 밤은 어떻게 넘기게요? 당신하고 당신의 기사, 둘뿐이잖아요? 이미 크로셀 후작의 사주를 받은 경비들이 감시하고 있을 테니 달아날 수도 없어요.”
“넷이다. 아니, 둘이지만 넷이지. 하인켈은 조건부로 내 편이고 넌 완전히 믿을 수 없지만 써야 해.”
알리시아는 별말을 안 했다.
그녀도 자기 입장이 신뢰받기 어렵다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내 팬만 아니라면 참 멀쩡한데.
“결국 열쇠는 부르작 후작이로군.”
“예?”
“크로셀 후작은 부르작을 죽이고 내게 뒤집어씌우려고 할 거야. 하지만 이게 웃긴 게 뭔지 알아?”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지금 제일 강한 건 나도, 크로셀 후작도 아니야. 바로 부르작이지. 여긴 부르작 후작 저택, 그의 안방이니까.”
똥개도 자기 집에선 강해지지.
그걸 이용한다.
“하인켈이 부르작 후작에게 돈 받아 내러 갔지? 수표 가져오고, 나 좀 보자고 해.”
크로셀 감독님이 멋대로 날 배우로 캐스팅하시고 상까지 주신다니.
수상 소감을 말하기 전에 무대 위로 불러 드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