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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고인 황제놀음-18화 (18/230)

두 번 고인 황제놀음 (18)

굳이 건드리시네

내 약혼녀의 아버지.

크로셀 후작이 웃으며 권했다.

“하하, 그리 긴장할 거 없네. 말에서 내려서 편하게 말하지.”

“예비 사위가 편해서야 쓰겠습니까? 참겠습니다.”

말에서 함부로 내렸다가는 일이 어찌 될지 모른다.

그때 부르작 후작이 목청을 높였다.

“크로셀 후작! 무슨 소리요! 저놈이 내 아들 도미닉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단…….”

“정신 차리시오, 부르작 후작.”

크로셀이 안색을 바꾸더니 부르작을 돌아보았다.

“지금은 대낮, 보는 눈이 많소. 그리고 리브라타는 엄연히 엘프들의 후원을 받는 가문이오. 그 가문의 아들들이 찾아왔는데 무슨 험한 소리요? 알라카스 산맥을 엘프들이 통치한다고 했던 자가 누구요?”

“으…….”

부르작은 신음을 흘렸다.

크로셀이 나직하게 말했다.

“내가 정리할 테니까 아들을 돌보시오.”

“……아, 알겠소.”

나를 노려보던 눈을 내리까는 부르작.

두 후작 사이에서 누구에게 주도권이 있는지 훤했다.

크로셀은 다시 나를 보며 말했다.

“자, 이제 됐나? 이제 편하게 이야기하지.”

“그러면…….”

내가 대답하려는데 소란이 일어났다.

주변에서 웅성거리던 인파가 갈라진다.

그 길을 따라서 금발의 여자가 다가왔다.

“알리시아 아가씨다…….”

사람들의 놀란 신음 소리.

그럴 만한 미녀였다.

길게 기른 금발, 꽉 조여서 몸매를 강조하는 하얀 드레스.

무슨 일인지 다리가 물에 젖었고 손에는 신발을 들고 있었다.

젖은 몸, 손에 신발을 들고 맨발로 걸어 다니는 미녀.

하지만 사람들은 외려 그걸 그녀의 매력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귀는 뾰족했으니까.

인간보다는 길고 엘프보다는 짧은 귀.

“하프엘프?”

엘프와 인간 사이에 나오는 혼혈.

카라카스에는 아주 드문 종족이다.

사실은 하나의 종족으로 당당히 인정받지도 못하는 이들인데…….

“아버지, 손님이 오셨나 봐요?”

“…….”

하프엘프는 대뜸 크로셀 후작에게 말했다.

크로셀 후작은 잠깐 틈을 두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약혼자인 리브라타의 도련님이 오셨다.”

“5년 만이네요? 오랜만이네요. 이런 데서 보게 될 줄은 몰랐어요, 리젠.”

알리시아는 나를 돌아보더니 생긋 웃었다.

보통 남자는 단번에 사랑에 빠질 만한 미소.

알리시아는 통통 튀는 걸음으로 다가와서는 내 말 옆에 섰다.

“아버지, 오랜만에 만난 제 약혼자와 대화 좀 할게요. 아버지는 이 자리를 정리해 주실래요?”

“그래?”

“여기 정원은 잘 가꿔졌잖아요? 같이 돌아보려고요.”

알리시아는 말하면서 날 보았다.

목소리는 발랄한데 눈은 심각하다.

나는 후작을 향해 말했다.

“그럼 오붓하게 이야기 좀 나누고 오겠습니다. 다들 따라와.”

“예? 두 분이서만…….”

가룰이 의아하게 말했지만 나는 시선으로 주의를 주었다.

일단 이 자리를 떠야 한다.

정원 길.

내 말 옆에서 걸으면서 알리시아는 한숨을 크게 쉬었다.

“아, 진짜…… 어떻게 된 거예요? 당신이 당할 줄 알았는데 외려 도미닉이 당하다니.”

“돈이라도 걸었어?”

“아뇨, 굴러들어 온 행운에 기뻐하는 중이에요. 일단 정자에 가서 이야기해요.”

알리시아는 정말 가벼운 걸음으로 앞섰다.

로데릭이 말했다.

“……방금 대화는 곡절이 있어 보이더군.”

“크로셀 후작이 진범입니다. 하지만 크로셀 후작은 다들 보는 앞에서 우리들을 처단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알리시아는 다들 보는 앞에서 약혼녀 행세로 우리들을 빼내 준 겁니다.”

내 설명에 다들 놀란 얼굴을 했다.

나는 하인켈을 흘겨보았다.

“이미 정답을 다 알고 있는 놈이 뭘 놀란 척을 해.”

“도련님이 대뜸 맞힐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거든요.”

“자세한 설명은 앉아서 하마. 여기 위험한데.”

가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정원 곳곳에서 우릴 보는 사람들이 있군요.”

“그래. 정원사치고는 너무 숫자가 많고 몸이 좋아.”

크로셀 후작이 감시하라고 명령했겠지.

정자.

약간 솟은 언덕 위에 지은 정자는 사방이 탁 트여 있어서 누가 엿들을 염려는 없었다.

내가 정자로 들어가자, 먼저 와 있던 알리시아가 다리를 씻고 있었다.

“아, 잠깐만 나가서 기다려 줄래요?”

알리시아의 손끝에서 붉은 마력이 솟더니 물방울로 변해서는 흘러내린다.

아주 간단한 정령마술, 하지만 엘프가 아니면 못 쓴다.

“절반이라도 쓸 수는 있나 보군.”

“……처음부터 생각했지만 여전히 무례한 인간이군요?”

알리시아는 나에게 눈을 흘겼다.

“하프엘프는 보통 자기 혈통에 대해서 거론하는 걸 실례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네가 나한테 끼친 민폐가 훨씬 더 클 텐데?”

“그래서 신발도 못 신고 구하러 부랴부랴 달려왔잖아요?”

알리시아는 당차게 말하고는 발가락 사이까지 꼼꼼하게 닦아 냈다.

샌들을 신은 그녀는 무릎 위에 팔꿈치를 얹고, 그 손에 턱을 괴고는 나를 빤히 보았다.

“솔직히 다 포기했는데 당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이러면 상황을 뒤집을 승산이 생기는군요.”

“이야기는 다들 오면 해.”

다른 셋은 왠지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내가 손짓으로 부르니 그제야 들어와서 앉는다.

“……저희가 방해해도 됩니까?”

가룰이 주저하자 나는 혀를 찼다.

“우리가 지금 사랑싸움하는 줄 아냐? 엿 된 거 정리하려는 거야.”

“그래요, 약혼은 질색이지만 이건 마음이 맞네요?”

알리시아도 동의했다.

다들 모이자 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단 여긴 아주 위험하다.”

“그게 이해가 안 가는데요. 리브라타는 엘프들의 후원을 받는 가문이고, 또…….”

가룰은 하인켈을 보았다.

다크엘프가 공증을 선 이상 해코지를 할 수 없는 거 아니냐고.

“그래, 나도 그래서 단출하게 온 거야. 부르작이 꼭지가 돌아도 칼은 뽑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크로셀은 여차하면 우리들을 죽이려고 할 거야.”

내 말에 다들 놀랐다.

알리시아는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고.

내가 추가로 말했다.

“아까 부르작에게 대놓고 말했잖아. 대낮이니 자제하라고. 밤이라면 죽일 수 있단 거지.”

“그건 제가 두고 볼 수 없는데요? 일이 아주 커질 수도 있는데, 크로셀 후작이 그리 무모할까요?”

하인켈이 이의를 제기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넌 가룰이나 로데릭을 지켜 줄 어떤 의리도 없어. 나도 3천만 원 받는 계약 끝나면 지킬 이유가 없지.”

“아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도련님 약혼녀의 아버지, 장인어른 아닙니까? 왜 그가 우리들을 죽이려고 한다는 겁니까?”

“그래요, 정말 왜 그럴까요?”

묵묵히 듣던 알리시아가 갑자기 나섰다.

로데릭과 가룰이 진짜 어이없다는 눈으로 보았다.

지금 우리를 몰살하려는 크로셀의 딸이 그녀 아닌가?

“어머, 내가 너무 뻔뻔한가요? 여러분들을 죽이려고 한다는 남자의 딸이 이렇게 걱정해 주는 게 이상해요?”

“아니, 그게 저…….”

알리시아가 도도하게 웃자 가룰이 허둥거리면서 눈길을 피했다.

나는 눈을 흘겼다.

“왜 이야기 맥을 끊어?”

“당신이 와서 놀랍고 반가워서 맨발로 달려 나왔는데 머리가 식었거든요. 당신이 어디까지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지, 지금 상황을 해결할 능력과 의지가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요.”

알리시아는 매력적으로 웃었다.

“아, 반갑다고 한 건 남자로서가 아니에요. 기대하지 않았던 외부 조력자라는 의미예요.”

“날 시험하겠다? 내가 커트라인에 걸리면?”

“나 혼자 해야죠. 당신이 죽건 말건 돕지 않을 거예요.”

“내가 통과하면?”

“내 모든 것을 걸고, 당신이 크로셀 후작을 쓰러트리는 데 협조하겠어요. 만약 크로셀 후작만 막는다면 날 마음대로 해도 좋아요.”

알리시아가 작심한 듯이 말하자 나도 진지하게 말했다.

“너 돈 많냐? 연봉 얼마야?”

“……예?”

“앞으로 네가 버는 수입의 10%는 나한테 바치는 게 어때? 십일조 개념으로.”

“……?”

알리시아는 멍한 얼굴이 되었다.

로데릭이 헛기침을 했다.

“리젠, 얼른 설명해 다오. 지금 보통 상황이 아닌 것 같으니까.”

“도미닉이 우리 집에 와서 시비를 건 게 부르작 후작의 계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방금 보면 주도권은 확실하게 크로셀에게 있었죠? 결투로 날 박살 내려고 계획한 건 크로셀입니다.”

가룰이 이해할 수 없는 얼굴을 했다.

“……도련님과 자기 딸을 약혼시키고 왜 그럽니까?”

“나도 모르지. 하지만 크로셀이 지금 이 순간, 이 저택에 있는 자체가 그 증거야.”

“예?”

“크로셀 영지는 훨씬 남쪽이야. 우리는 어제 도미닉을 처리하고 오늘 왔고. 크로셀이 소식을 듣고 바로 출발했어도 우리보다 빠를 수 없어.”

카라카스는 교통이 불편하다.

또 후작이 행차하려면 그만한 준비를 갖춰야 할 테고.

나는 가룰에게 확인했다.

“내가 도미닉하고 싸우기 전, 오전에 너랑 대련했지? 그때 너,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

“예? 그게 잘…….”

“도미닉이 알리시아에게 치근덕거린다고, 네가 대신 결투하겠다고 했지.”

가룰은 자못 감격한 얼굴이었다.

자기 말을 윗사람이 기억해 주면 이런다니까.

“감동해 줘서 고마운데, 그러라고 꺼낸 이야기 아니야. 도미닉이 알리시아에게 접근한다는 걸 넌 어떻게 알았냐?”

“예? 그야 들었죠.”

“그래, 너만이 아니라 리브라타 저택 사람들 다들 알더라. 근데 그걸 어떻게 알고 있을까?”

물론 부르작 후작이 편지를 보내긴 했다.

하지만 리브라타 백작이나 로데릭이 함부로 떠들고 다닐 사람이 아니다.

그럼 기사들, 저택의 하인들은 어디서 누구에게 들었을까?

로데릭이 신음을 흘렸다.

“……설마 일부러 소문을 흘렸다는 건가?”

“예. 소문이 우리 쪽에 너무 빨리 들어왔어요.”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그것도 달릴 시간이 있어야지.

내가 추가로 말했다.

“알리시아가 도미닉하고 썸 탄다는 소문은 들어오는데 크로셀 후작이 부르작 저택에 있다는 건 몰랐다? 말이 안 되잖아요?”

“……그렇군. 그래. 도미닉과 네 약혼녀의 소문을 흘려서 널 낚으려는 거였어!”

로데릭이 얼굴빛까지 변해서 소리쳤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절 화나게 해서 낚아 보려던 거겠죠. 하지만 마침 그때 저는 침대에 있었고요.”

마력약 먹고 다스리던 후유증으로.

나는 상황을 정리했다.

“크로셀은 내가 화나서 부르작 저택으로 쳐들어오리라고 예상했겠죠. 하지만 내가 반응 없으니까 도미닉을 등 떠밀어서 보낸 거예요.”

이어서 나는 하인켈을 보았다.

“하인켈, 넌 지금 이 모든 상황을 다 알면서도 시침을 뚝 뗐지?”

“하하.”

“나한테 이런 정보를 미주알고주알 다 말해 줄 의리는 없으시지? 이 비밀 친구 아저씨야.”

“친구가 되었다면 다 알려 드렸죠.”

“나한테 친구는 섹스 프렌드뿐이야. 남자는 해당 사항 없다.”

하인켈은 내 친구도 아니고, 리브라타 사람도 아니다.

물론 내 계약이 마무리될 때까지는 자기 목숨을 걸고서라도 나를 지킬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는 다크엘프의 이득이 우선이다.

나는 손뼉을 쳐서는 환기했다.

“자, 이제 약혼 이야기는 머릿속에서 지워 버려. 크로셀은 우리 리브라타를 노리는 적이다.”

“…….”

“크로셀의 본래 계획은 도미닉을 시켜서 날 죽이거나 재기 불능으로 만드는 거다. 한데 그게 틀어졌다. 다시 날 죽일지 말지 고민하고 있겠지.”

“……그러면 지금 당장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여긴 위험합니다!”

“야, 우리가 왜 왔냐?”

나는 가룰에게 심각하게 말했다.

“돈 받으러 왔잖아? 돈 받고 가야지.”

“도, 도련님. 아무리 그래도 너무 위험합니다. 당장 이 저택만 해도 병사가 쉰 명은 넘을 텐데…….”

“말했지만 크로셀도 지금 고민하고 있을 거야. 또 엘프의 후원에 하인켈이 있으니 대놓고 날 죽이지는 못하고.”

나는 로데릭을 보며 말했다.

“형님이 수고 좀 해 주셔야겠습니다. 리브라타 본가로 가서 아버지에게 지금 이야기를 전해 주시죠.”

“내가 말이냐?”

“일단 나는 못 갑니다. 아마…….”

나는 정자 주변을 한번 둘러보았다.

“이 근처에는 사람이 안 보이지만 크로셀 후작은 내가 저택을 나가면 막으라고 명령했을 겁니다. 하지만 내가 여기 남고 형님을 보내면 놔둘 겁니다.”

“사람을 시키면…….”

“마땅한 사람이 없습니다. 백작님이 이 일을 알고 계셔야 크로셀도 함부로 준동하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너는…… 어쩌고?”

로데릭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나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저 정도면 잘생겼단 소리 들으니까.”

“…….”

“농담입니다. 말했잖아요. 크로셀도 함부로 저를 도모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형님이 백작님에게 알린다면 더더욱 그렇고요.”

로데릭은 이해하면서도 망설였다.

최전방에 아군을 놔두고 자기 혼자만 본진으로 돌아가야 하는 병사의 얼굴.

나는 최전선에서 싸우던 황제 시절처럼,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당장 가 주셔야 합니다. 지체할수록 일이 복잡해집니다.”

“……그래, 알았다.”

일어난 로데릭이 내 어깨를 누르면서 걱정스럽게 일렀다.

“내가 당장 돌아가서 아버지에게 말을 전하고 기사와 병사들을 끌고 돌아오겠다. 그동안 몸조심해라, 리젠.”

“몸조심은 이 저택의 처녀들이 해야지. 드디어 내가 왔으니까!”

“야, 이 녀석아…….”

로데릭은 나를 어처구니없이 보았다.

옆에 니 약혼녀가 듣고 있다고.

당연하지만 난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로데릭도 지금 나만 남겨 두고 돌아가기가 개운치 않을 것이다.

그러니 최대한 가볍게, 아무것도 아닌 척해야 한다.

날 살리겠다고 달려가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이제 얼굴 본 약혼녀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왜요? 형도 노리던 여자가 있어서 막 돌아가기 아쉽고 그래요?”

“아, 이놈아…….”

“그게 아니면 얼른 집에 가서 저 좀 살려 주세요. 무서워 죽겠다고요.”

“……못 말리겠군.”

나무라려던 로데릭은 내 능청에 결국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 하인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 저택 밖까지 동행하겠습니다. 제가 함께하면 누구도 로데릭 도련님을 막지 않을 겁니다.”

“왜 갑자기 착한 척이야?”

“알면서도 모른 척하던 게 들켜서요. 지금이라도 착한척해서 호감 쌓아 보려고요.”

“원래도 없던 호감이 혐오감이 되겠다. 하지만 고맙다.”

내가 웃으며 말하자 하인켈도 마주 웃었다.

로데릭과 하인켈이 떠났다.

내가 한숨을 돌리는데 알리시아가 입을 열었다.

“사람이 변했군요?”

“원래 남자는 잘 변해. 특히 하반신이 자유자재로 신축하지.”

“…….”

“왜? 나 죽이려는 분 따님이 뭐 하실 말씀 있으신가?”

알리시아가 한숨을 쉬고는 정중하게 머리를 숙여 보였다.

“미안합니다, 리젠 리브라타. 이번 일은 우리 크로셀 가문이 리브라타에 아주 큰 잘못을 했습니다.”

“네가 낸 시험은 통과한 거고?”

“……예. 5년 사이에 몰라볼 정도로 달라지셨군요. 작금의 상황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대처하고 계십니다. 저보다 훨씬 우수하군요.”

알리시아가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희미한 미소.

내 양손을 꼭 잡으면서.

“리젠 리브라타, 당신을 믿고 함께하겠습니다. 부디 저와 함께 크로셀 후작을 막아 주세요.”

“나는 널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만.”

나는 손을 빼내고는 다그쳤다.

“크로셀 후작이 내 목을 노린다는 건 알겠는데 왜지? 내 잘린 목에 꽃 꽂고 감상하려고?”

“…….”

내 말에 알리시아는 질색했다.

강단은 있지만 곱게 자랐나 보군.

막 대답하려던 알리시아가 홱 돌아보았다.

다가오는 기척들.

말에서 내린 크로셀 후작이 정자로 들어왔다.

“로데릭이 안 보이는군?”

“갑자기 배가 아파서 화장실 갔습니다.”

“하하, 이 저택에도 화장실은 있다만?”

“전용 변기가 아니라면 불편하다네요.”

크로셀이 멍한 얼굴을 했다.

로데릭이 돌아갔다는 걸 알고는 꼬투리 잡으려고 했나 본데.

형님! 명예는 아우가 지켜 드렸습니다!

“……그, 그래. 화장실은 중요 사항이지. 초대 황제가 아주 좋은 일을 했어.”

“휴지의 발명은 문화 혁신이었죠.”

서론은 여기까지.

나는 크로셀 후작에게 청했다.

“방 있습니까? 모처럼 약혼녀도 보고, 후작님도 만났는데 오늘은 여기서 묵고 가겠습니다.”

“위험하지 않겠나? 부르작 후작이 자네를 아주 벼르고 있을 텐데?”

“하하, 아까처럼 크로셀 후작님이 절 지켜 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크로셀 후작도 짐짓 고민하다가 크게 웃었다.

“암! 장차 내 사위가 될 텐데! 내 모든 걸 걸고 자네의 안전을 보장하지!”

“하하, 감사합니다.”

서로 속을 감춘 대화.

크로셀은 자기 계획대로 나를 해칠 생각이겠지.

그리고 난 그걸 모른 척하다가 반격하면 되고.

편하게 살려는 사람을 건드리셨다?

고스란히 갚아 드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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