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15)
달콤한 독
뻑!
내 일격에 도미닉이 눈을 뒤집고 정신을 잃었다.
놈이 풀썩 쓰러지기 전에 머리를 캐치.
“음, 안 죽었지?”
마력을 각성한 인간은 내구도가 튼튼하다.
도미닉은 숨은 붙어 있었다.
“편식은 금물, 가끔은 싫은 것도 먹어야지.”
나는 놈의 머리를 꽉 잡고는 정신을 집중했다.
의식을 잃은 도미닉에게서 흘러나오는 검은 아우라.
절망과 자포자기로 가득한 정신.
나에게 마음을 닫은 상대의 정신을 흡수하는 건 금물, 부정적인 감정이라면 더 위험하다.
하지만 딱 하나 예외는…….
“자포자기라면 내가 박사 과정이다, 이 새끼야.”
나는 전생에 이보다 큰 절망을 겪고 일어난 적이 있었다.
맞았다고 질질 짜는 놈의 절망 따위는 코웃음도 안 나온다.
나는 검은 아우라를 한도까지 흡수했다.
“후우우.”
상태 확인.
염동력이 강화됐다.
앞으로 한두 번 흡수하면 두 번째 초능력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고.
“좋아, 되네. 여전히 손이 많이 가고 귀찮은 방식이지만.”
적의 정신을 무너트려서 흡수하는 것도 된다.
환생하고도 초능력은 사용 가능했지만.
이건 좀 예외적인 방식이라서 검증할 필요가 있었다.
어차피 도미닉 정리할 거, 겸사겸사 실험이지.
툭.
내가 손을 놓아주자 도미닉이 옆으로 쓰러졌다.
실컷 먹었는데도 좌절과 절망의 아우라가 조금씩 흘러나온다.
나한테 이걸 당한 상대는 영혼에 공포가 각인된다.
도미닉은 내게 머리를 붙잡혀서 꼼짝 못 했던 걸 평생 잊지 못하리라.
앞으로 리브라타의 이름만 들어도 떨겠지.
“이거 많이 하면 공포정치 되니까 황제 시절에는 자제했는데…….”
뭐 이젠 황제도 아니고.
이렇게 정리하면 이놈 또 안 봐도 되겠지.
손을 턴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침묵.
구경하려고 모였던 이들은 멍하니 보고 있었다.
음, 내가 너무 일방적으로 발라 버렸나?
초반에 몰린 척을 해 줬는데.
우연히 이긴 척하면 도미닉 얼굴 또 볼 것 같아서 딱 정리했고.
짝!
나는 손뼉을 쳐서 관중들의 정신을 일깨웠다.
“자, 다들 뒷정리하자.”
“……어.”
“드, 들것!”
다들 정신을 차리고 부산하게 움직였다.
나를 흘끔거리는 시선들.
결투가 벌어지기 전과는 180도로 달라졌다.
난봉꾼 애송이가 아니라 정체불명의 뭔가를 보는 시선.
누구도 근처로 다가오지 않는다.
홀로 선 나는 손을 털었다.
“뭐 귀찮은 일은 이제 없겠지.”
가문의 하인과 기사들이 날 곱게 보지 않았지만 이젠 시선이 달라졌다.
괜히 건드리는 일은 없겠지.
도미닉도 정리했으니 돈 받으면 끝.
일석이조다.
앞으론 단련이나 하면서 안락하게 놀면 된다.
혼자인 거?
황제 시절에도 늘 혼자 먹고 잤다.
환생해도 마찬가지지.
“도련님.”
부르는 목소리.
다가온 아멜리아가 나를 살폈다.
누그러진 늑대 귀, 걱정하는 모양새다.
나는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자, 끝났…….”
“같이 가요.”
아멜리아가 내 팔을 잡고는 앞섰다.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순순히 따라갔다.
아우라를 볼 것도 없다.
날 꼭 잡은 작은 손.
걱정해 주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저택의 의무실.
아멜리아는 나를 데려와서는 상처를 살폈다.
침대에 앉은 나는 허벅지를 양손으로 누르고는 웃었다.
“한 대도 안 맞았다니까.”
“혹시 모르는 법입니다.”
아멜리아는 딱딱하게 말하고는 내 머리, 뺨, 어깨에 팔까지 남김없이 살폈다.
심지어 내 셔츠에 코를 대고는 킁킁거리기까지 했다.
내출혈이 없나 수인의 후각으로 확인하려고.
“……정말로 다치신 데는 없군요. 다행입니다.”
“그래. 그런데 아멜리아는 나 안 무서워?”
“예?”
“다들 무서워하잖아? 내가 잘게 다지긴 했지.”
도미닉이 앞으로 귀찮게 구는 일이 없게.
또 리브라타 안에서 괜히 이런저런 귀찮은 일 없게.
일석이조를 노리고 했는데…… 효과가 좋아도 너무 좋았다.
리브라타의 사람들은 내 실력에 감탄하면서도 꺼리고 있었다.
아멜리아가 조용히 말했다.
“가룰 기사님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분이 저에 대해서 모욕적인 언사를 해서 도련님이 화가 나셨다고요.”
“…….”
아, 도미닉이 더러운 수인 어쩌고 했었지?
그래서 처리한 건 아닌데.
아멜리아는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상반신을 기울였다.
가까워지는 얼굴.
은회색 머리카락의 메이드가 걱정스럽게 이른다.
“도련님의 마음은 정말로 감사합니다. 하지만 너무 위험한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
“…….”
아멜리아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내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주종 관계를 떠난 친애의 감정을 담아서.
아이를 어르는 부모처럼.
“당신이 아무리 강하고 의젓한 분이 되셨다 해도 안아 기른 저한테는 작은 도련님이니까요.”
“어, 음…….”
“다른 사람들에게는 도련님이 화나셨던 이유를 설명해서 오해를 풀겠습니다. 그러니까…….”
아멜리아는 옷소매로 내 뺨을 문질러 주고는 몸을 바로 세웠다.
“그렇게 혼자서 쓸쓸해하지 마세요. 적적하시면 언제라도 저를 불러 주세요.”
“……음, 그래.”
“잠시 여기 계세요. 의복과 목욕물을 준비하고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아멜리아는 정중하게 머리를 숙여 보이고는 나갔다.
의무실에 혼자 남은 나는 무심코 이마를 문질렀다.
“이런 게 대체 얼마 만이지?”
사람 대 사람으로 대해지면서 충만해지는 감각.
내가 황제일 때, 모두들 나를 존경과 숭배의 대상으로 대할 따름이었다.
내가 아무리 가볍게 대해도, 입으로 껄렁거려도 다들 몸을 낮추고 눈치나 봤지.
심지어 내가 사랑했던 여자들마저도.
정치와 권력과 이권과 시기의 소용돌이.
나를 변함없이 대해 주는 건 제국의 일, 업무뿐이었다.
“난 그저…….”
똑똑.
노크 소리.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다크엘프 남자, 하인켈이었다.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도미닉은?”
“숨은 붙어 있습니다. 설사 죽었다고 하더라도 리젠 도련님에게는 어떤 책임도 물을 수 없죠. 결투 중에 사망해도 죄가 인정되지 않으니까.”
하인켈이 말했다.
“결투의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리브라타에 당신 같은 인재, 보석이 숨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직접 와 보기를 잘했군요.”
“아부는 됐고. 돈이나 내놔. 결투하면 후작이 3천만 원 지급하기로 했잖아?”
하인켈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제가 공증을 선 이상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집행할 겁니다.”
“본론이 뭐야?”
나는 하인켈에게 대뜸 물었다.
인사나 하려고 온 게 아니겠지.
아니, 애당초…….
“너는 리브라타에 괜히 온 게 아니잖아?”
“…….”
“호위 대상인 도미닉이 나한테 쓰러졌는데도 진심으로 나를 칭찬하고 있어. 하긴, 다크엘프인 너는 후작가의 식객이지 충성을 바치는 건 아니지.”
나는 짚어 나갔다.
“리브라타는 엘프의 공식적인 후원을 받는 가문이야. 엘프와 사이 나쁜 다크엘프인 네가 방문하는 건 좀 구도가 요상하지?”
“후작님이 도미닉의 호위를 부탁했습니다…… 같은 건 그냥 말 돌리기죠.”
하인켈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저는 리브라타의 내부 사정을 염탐하러 왔습니다.”
“솔직해서 좋다.”
내가 웃자 하인켈도 웃었다.
“이미 짐작하신 투라서 말입니다. 애당초 저는 리브라타 그리고 멜리우스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해서 부르작 후작 가문에 머무르고 있던 겁니다. 혹시나 수상한 움직임이 보이면 다크엘프들에게 바로 보고하게요.”
“…….”
나도 내심 짐작하긴 했다.
하지만 자기 입으로 술술 말해 주다니?
하인켈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의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저는 공증을 선 몸, 도련님을 절대 해칠 수 없습니다.”
“계약이 끝나면 이야기가 다르지. 이렇게 다 말해 주는 이유가 뭔데?”
“영민하신 분에게 숨겨 봐야 괜히 이야기만 번거로워지죠. 오늘 당신의 전적을 짚어 볼까요?”
하인켈은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았다.
“첫째, 실력을 감춘 채로 도미닉을 도발해서 직접 결투를 성립시키셨죠. 둘째, 저를 공증인으로 삼아서 계약을 확고하게 다지셨죠. 셋째, 직접 결투에 들어서는 도미닉의 마력을 낭비시키셨고. 마지막으로 철저하게 박살 내서 후환을 제거했습니다.”
하인켈은 씩 웃었다.
“제 눈이 하나뿐인 게 아쉬울 정도였습니다. 애꾸가 아니었으면 훨씬 더 똑똑히 볼 수 있었을 텐데요.”
“입에 발린 아부에 경계심이 부쩍 드네.”
“진심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놀라는 걸 보니 리젠 도련님은 지금까지 자신의 실력을 철저하게 감춰 오셨더군요. 여색만 밝히면서 맞고 다니는 바보 도련님이라는 건 위장, 진짜 자신을 드러내신 거죠.”
아닌데.
네가 뭐 눈치챌까 봐 최대한 살살한 건데.
하인켄은 재차 말했다.
“저는 부르작 후작 가문을 위해서 일하지 않습니다. 저는 다크엘프, 어디까지나 우리 종족을 위해서 움직입니다.”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하인켈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하지만 리브라타 가문을 위해서 물심양면으로 일하고 싶어지는군요. 당신과 함께하면 다크엘프가 번영할 테니까요.”
“300년은 수련했을 다크엘프가 변방의 애송이에게 과한 찬사를 퍼붓는데?”
“12가문의 도련님이죠.”
황제가 될 자격이 있는 12가문.
그중 하나에 줄을 대겠다는 건가?
나는 혀를 찼다.
“나는 놀고먹고 싶을 따름이야. 괜히 귀찮은 일 가져오지 말고…….”
“리브라타를 위해서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들어 보시겠습니까?”
내가 대답하지도 않았는데 하인켈은 멋대로 말했다.
“리브라타가 12가문에서 빠져 줬으면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아주 위험천만한 소리를 하는데?”
나야 황제 자리가 질색이지만 보통 사람에게는 다르다.
제국의 12가문.
다음 제국의 지배자, 2대 황제가 이 중에서 나온다.
나는 하인켈을 보며 짚었다.
“리브라타는 변방의 백작, 12가문 중에서도 최약체지만 그래도 다들 주목하고 있어. 엘프가 10년째 머무르고, 너 같은 다크엘프가 얼씬거릴 정도지.”
“예, 12가문은 귀족 중의 귀족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12가문에서 빠지라고? 사회적으로 자살하란 소리지.”
“물론 그걸 노리는 분들도 정상적인 수단을 쓰는 건 아닙니다. 초대 황제 시릭 카라카스가 12가문을 직접 지정했는데…… 그걸 바꾸는 건 황제의 유지를 어기는 거죠.”
난 그런 유언 한 적 없다니까.
나는 혀를 차며 캐물었다.
“리브라타를 12가문에서 내쫓는 게 부르작 후작의 목적이라고? 자기 아들을 내보내서 날 파혼시키는 게 끝이 아니라 2중, 3중의 덫을 준비해 뒀다?”
“저도 아직 자세한 사정까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움직임이 있다는 건 확실합니다. 같이 알아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인켈이 거듭 제안하자 나는 잠깐 생각했다.
너무 좋은 이야기만 하면 의심해야지.
“네가 정보 요원이라는 거야 짐작했지만 본인이 고백하는 건 이야기가 다르지. 현장의 재량이라도 지나쳐. 다크엘프 윗선이 문제 삼을 수 있어.”
“…….”
“12가문의 도련님인 나한테 줄을 댄다, 얼핏 생각하면 괜찮은 발상이야. 하지만…… 내가 뭐 대단하다고 네가 정보까지 제공하면서 들이대지?”
나는 턱을 문지르면서 짚었다.
“도미닉 하나 털었다고? 내 호위인 가룰만 해도 놈을 털어 버릴 수 있어.”
물론 나는 마력을 하나도 안 쓰고 요리했지만.
그래도 하인켈이 이리 적극적으로 어필할 이유는 못 된다.
“즉, 이건 네 독단이 아니야. 기밀 정보를 제공해서라도 리브라타 사람을 포섭하라는 밀명이 따로 있었던 거지?”
“……으으음.”
의무실에 들어온 직후, 내내 미소를 띠던 하인켈이 곤혹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정말 아픈 구석을 찔린 반응이었다.
“……그렇게 완벽한 승리를 거두셨으니 들뜨셨을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정말 냉정하게 판단하시는군요.”
“귀찮은 이야기 들고 오는데 경계를 안 하겠냐?”
나는 잠깐 생각했다.
후작에게 돈을 받고 마무리할 생각이었는데…… 리브라타를 파멸시킬 생각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내가 놀고먹을 집에 불 지르겠다잖아?
문득 하인켈이 한숨을 쉬었다.
“예, 저는 특명을 받아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12가문에서 리브라타를 축출시키려는 음모를 지켜보고, 다크엘프들에게 최대한 이익이 되게 움직이라고요.”
“특명?”
“예. 그래서 당신에게 전부 다 밝히고 후원을 제안하는 겁니다. 물론 그분에게 사후 보고를 올려야겠지만…….”
“그분이 누군데?”
별생각 없이 물은 말.
한데 하인켈은 경외심을 담아서 대답했다.
“여왕님이십니다.”
다크엘프가 여왕이라고 부르는 게…….
나는 딱 굳어 버렸다.
여왕.
다크엘프의 암살여왕.
나, 시릭 카라카스의 셋째 부인.
뭐?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