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14)
먹으려면 뼈까지
나와 도미닉의 결투 성립.
도미닉의 호위로서 말리던 하인켈이 한숨을 쉬었다.
“도미닉 도련님의 뜻이 정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죠.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안 됩니다. 오늘은 이만 쉬고 내일 치르도록 하죠.”
나, 리젠이 마력이 없다는 건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상식적으로는 도미닉이 이기겠지만 내 도발에 흥분한 상태.
도미닉의 머리를 식히려고 하는데…… 놔둘 순 없지.
“그건 너무 오래 걸린다. 1시간 뒤로 하지. 그리고 뒷말 없게 계약서를 쓴다. 하인켈, 네가 공증을 서라.”
“예?”
“뭐?”
내 말에 두 놈은 놀랐지만 나는 무시하고는 계약서를 작성했다.
“카라카스에서는 말로만 약속하면 어기는 경우가 너무 많거든. 일단 계약서를 쓰고 봐야지.”
“뭐야? 저거 뭔 꼬부랑글씨야?”
“……다크엘프 문자입니다.”
도미닉의 물음에 하인켈은 나직하게 말했다.
인간인 내가 그 문자를 쓰자 상당히 놀란 모양이지만 별거 아니다.
다크엘프 문자야 엘프 문자의 사촌 수준이고.
애당초 나는 카라카스의 주요 문자는 다 쓸 수 있었다.
나는 계약서 2부를 작성하고는 내밀었다.
“자, 도미닉, 사인해라. 하인켈이 해석해 주고.”
“……오늘 도미닉 도련님과 리젠 도련님이 직접 결투를 치릅니다. 무기는 목검으로 한정, 도미닉 도련님이 승리한다면 리브라타 가문과 크로셀 가문의 약혼은 깨집니다. 또 어떤 결과건 부르작 후작 가문은 3천만 원을 리젠 리브라타 개인에게 보름 안에 지급합니다.”
“그게 다야?”
도미닉이 바로 사인하려고 하자 하인켈이 손을 들어서 막았다.
신중하게 나를 탐색하는 시선.
나는 웃으며 능청을 떨었다.
“내가 불리한 싸움이니 돈은 무조건 챙겨야지. 아니면 후작은 가슴 속에 3천 원도 없으신가?”
“3천만 원입니다만……. 좀 생각해 봐도 되겠습니까?”
하인켈이 말끝을 흐렸지만 도미닉이 냉큼 사인해 버렸다.
“하인켈! 뭘 꾸물거려? 저놈은 마력도 없는데 뭐가 무섭다고.”
“…….”
이어서 나까지 사인해 버렸다.
이제 계약이 발효됐다.
공란은 공증인 자리만 남았다.
하인켈은 한숨을 쉬었다.
“저보고 공증인을 서라고요?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아시는 거겠죠?”
“다크엘프가 공증을 선 계약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어긴다면 설사 황제라도 죽여 버린다.”
“…….”
다크엘프들이 스스로 자부했던 말.
하인켈이 망설이자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애당초 후작이 널 호위로 보낸 건 이러라고 보낸 거 아냐? 여자를 둔 결투는 승패가 갈려도 지지부진해지지만…… 다크엘프가 공증을 서면 깔끔해지지.”
“……알겠습니다.”
하인켈은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공증인에 사인했다.
이로써 결투 성립.
나는 계약서를 정리했다.
“오케이, 1시간 뒤에 붙자. 샤워나 하고 와라, 도미닉.”
“머리 깨질 준비나 해라. 가자, 하인켈!”
“용건이 있으니 도련님 먼저 가시죠.”
도미닉은 의아해하면서도 자리를 떴다.
하인켈이 대뜸 나한테 물었다.
“대체 무슨 속셈입니까?”
“넌 저놈 편인데 내가 왜 말해 줘?”
“장난치지 마시죠. 다크엘프 문자를 술술 쓸 정도라면 공증이 어떤 의미인지 아실 텐데요.”
하인켈은 크게 낭패하고 있었다.
그냥 도미닉 대리로 가볍게 몸 푼다고 왔겠지.
근데 내가 일을 키웠다.
“젊은 혈기의 치정극에 이게 뭡니까? 공증을 선 이상,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계약을 성사시켜야 합니다. 만약…….”
“결투 끝났는데도 후작이 돈 안 낸다고 버틴다? 그러면 네가 후작의 배를 째서라도 받아 와야 하지.”
“다 알면서 했군요…….”
카라카스에선 계약서를 써도 무시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다크엘프가 공증을 서면 달라진다.
다크엘프는 자기 목숨을 걸고, 상대를 죽여서라도 계약을 성립시킨다.
내가 제국을 세우기 전,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온 전통이었다.
덕분에 다크엘프는 공증인으로 높이 평가받는다.
고용할 경우에는 거금을 내야 하고
이 경우에는 그냥 공짜지만!
“이길 자신이 있어서 이러시는 겁니까?”
“인터뷰는 결투 후에 받지.”
내가 선을 긋자 하인켈은 혀를 차고는 나가 버렸다.
우리만 남자 가룰이 한숨을 푹 쉬었다.
“……엄청 강해 보이는군요.”
“뭐야, 너도 알아보냐?”
가룰은 착잡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인켈이 20대 청년으로 보여도 실제 경험은 200년 이상일 테니까.
“인간이 아무리 노력하고 힘을 기울여도 이종족 전사를 당해 내지 못한다는 건 압니다. 실제로 보니 서 있는 자세부터가 틈이 없었습니다.”
“나랑 하인켈이 싸우면 누가 이길 것 같냐?”
내가 장난삼아 묻자 가룰이 정색했다.
“도련님입니다.”
“아부 잘 먹었다.”
“농담 아닙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도련님이 이길 것 같습니다.”
가룰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이놈, 어리버리하면서도 감은 좋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나저나 저 다크엘프, 쓸데없이 신중해서 귀찮게 됐네.”
“예? 문제 있습니까?”
“이것저것.”
도미닉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날 알아볼 수도 있다.
하인켈은 내 전생, 황제 시릭의 시절에도 활동하던 놈일 테니까.
물론 내가 시릭의 환생이라는 걸 알아볼 리는 없지만…….
“뭐 적당히 해야지.”
안 들키게 조지면 되지.
연병장.
나와 도미닉이 싸운다는 소식을 들은 병사, 기사들이 몰려들었다.
다들 앉아서 수군거리는 소리들이 들려온다.
“그런데 왜 싸운대?”
“소문도 못 들었냐? 크로셀의 아가씨를 두고 두 사람이 결투를 벌인다잖아.”
“그런데 리젠 도련님이 직접 싸운다고? 호위가 아니라?”
“리젠 도련님은 허약하잖아?”
“뭘 모르네. 전에 가룰 쓰러트린 거 못 봤어? 기사장도 박살 났다는데.”
목검을 고른 나는 가룰을 돌아보았다.
“야, 가서 구경꾼 좀 정리해.”
“예?”
“한쪽에 모여서 구경하게 만들어. 여기저기 퍼져 있으면 정신없다.”
명령하는 내 눈에 로데릭이 보였다.
병사들과 좀 떨어져서는 근엄하게 팔짱을 끼고 계신다.
내가 손을 크게 흔들어 보이자…… 표정이 딱 굳더니 눈을 피하지만.
“결투하는 데 방해되지 않게. 알았냐?”
“예, 도련님! 반드시 이기십시오!”
가룰은 뛰어가서는 이리저리 퍼져 있던 구경꾼들을 한곳에 모았다.
목검을 잡은 나는 초능력을 점검해 보았다.
내가 익힌 초능력은 크게 일곱 가지다.
그중 하나가 염동력.
나머지 능력들은 아직 되찾지 못한 상태였다.
“요새 정신력 흡수할 일이 적긴 했지.”
나한테 마음을 연 상대에게 지속적으로 흡수하는 건 가능하다.
하지만 자주 흡수하기보다는 텀을 두는 게 훨씬 효과적이다.
“그러면…….”
정신력 흡수는 위험할 수도 있으니 보통 아군에게만 한다.
하지만 다소 절차를 거치면 적에게도 흡수할 수 있었다.
지금 살기가 등등해서 내게 다가오는 도미닉.
시간을 들여서 조리하면 초능력까지 강화할 수 있다.
도미닉이 으르렁거렸다.
“마력도 없는 허접 새끼가 감히 나한테 덤벼? 넌 오늘 나한테 죽을 줄 알아라.”
“결투로 벌어진 살해는 법적 책임을 묻지 않던가? 아직 그렇지?”
“그래! 이제 와서 살려 달라고 해도 늦었다!”
도미닉은 말하고는 구경꾼들을 바라보았다.
리브라타의 사람들, 그들의 앞에서 내 머리를 깨 버려서 뽐내겠다는 욕망이 얼굴에 가득하다.
싸우기 전부터 이겼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말했다.
“안심해라, 난 너 안 죽일 거야.”
“……뭐?”
진심이다.
저런 얼간이도 살려 두면 노동력 제공하고 세금 내니까.
“아니다. 그냥 불구로 만들어 줄까? 절뚝거리고 다니면 동정심을 느낀 여자가 간호해 줄지도 모르잖아? 난 돈 벌어서 좋고, 넌 드디어 여자에게 인기 얻고. 이게 바로 상부상조지.”
“이 개새끼가!”
폭발한 도미닉이 나에게 뛰어들었다.
다리, 허리, 몸통, 팔까지 이어지는 붉은 기운.
마력을 전신에 운용하고 있었다.
단숨에 내 머리를 쪼개겠다는 기세.
하지만 동작이 너무 크다.
나는 가볍게 물러나 피했다.
이제 이 몸은 허약하지 않다.
황제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꾸준한 단련, 그리고 마력을 각성하면서 좀 정상이 되었다.
그리고 제국 최강이었던 내 경험은 어디 가지 않았다.
휙! 휙!
나는 날아오는 목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면서 물러났다.
“어딜 도망가!”
일부러 아슬아슬하게 피하자 도미닉은 더 열을 올리면서 공격해 왔다.
“경지가 낮구만…….”
마력을 각성하면 1차적으로 육체를 강화하고 2차적으로는 무기를 강화한다.
도미닉은 이제 육체 강화가 고작.
검놀림도 영 별로다.
나이치고는 제법 물이 올랐지만 내가 보기에는 하품이 나왔다.
“어디 칠지 눈으로 예고해 주시네. 너 바보냐?”
“피하기만 하는 놈이 뭔 소리냐!”
휙! 휙! 휙!
놈이 휘두르는 걸 고개를 젖혀서 피하고, 돌아서 피한다.
상대가 마력을 써도 안 맞으면 그만이다.
멧돼지를 잡기 전에 힘을 빼 놔야지.
“이놈이!”
내가 계속 피하기만 하자 약이 오른 도미닉의 동작이 커지면서 틈이 드러났다.
백스웨이로 피하면서 가볍게 한 방.
빡!
적당히 휘두른 내 검격에 턱을 얻어맞은 도미닉이 비틀거리면서 물러났다.
설마 내가 반격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얼굴이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야, 마력으로 방어했으니 안 아프잖아? 얼른 계속해.”
“이놈이!”
놈이 대뜸 찔러 오자 나는 가볍게 돌아 피하면서 머리를 두어 번 때렸다.
딱! 딱!
도미닉은 헛바람을 흘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어, 으…….”
“이번에는 왜 아프냐고? 머리에 마력을 제대로 안 돌렸잖아. 슬슬 마력 떨어질 때가 됐지?”
카라카스의 전투에서 마력은 귀한 자원이다.
언제, 어디에, 얼마만큼 투자해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
하지만 도미닉은 처음부터 낭비했다.
이 결투에서 승리하는 건 당연. 관객들 앞에서 요란하게 폼을 잡고 싶었겠지.
“폼 나는 승전보를 들고 돌아가서 여자에게 자랑하고 싶었겠지. 그런데 어쩌냐?”
“너, 무…….”
내가 손에 마력을 불러일으키자 도미닉은 대경실색했다.
물론 나는 관객들을 등진 상황, 다른 이들은 내가 마력을 쓴다는 걸 모른다.
도미닉의 얼굴에 두려움이 번지며 내뿜던 아우라의 색이 점차 검어진다.
좀 먹을 만하게 변했네.
나는 웃으면서 마력을 확 지웠다.
“야, 겁먹었냐? 괜찮아, 마력 안 쓰고 그냥 싸워 줄게.”
“……이 새끼가!”
도발에 낚인 도미닉은 무모하게 덤벼들었다.
이젠 한 줌도 안 남은 마력을 모조리 다 사용하면서.
하지만 나는 제자리에서 선회하고 피하면서…… 바닥을 쾅 찍었다.
진각.
거기다가 염동력을 응용, 발끝에 실리는 힘을 배로 늘린다!
뻐어어억!
내 체중과 염동력이 합산된 팔꿈치가 적의 가슴에 명중.
“으커어어억!”
무모하게 달려들었던 도미닉이 가슴을 붙잡고는 물러났다.
전투 중에 염동력으로 내 신체를 조작하거나, 방금처럼 위력을 올릴 수 있었다.
이러면 나보다 덩치가 큰 놈도, 체급 훨씬 높은 놈도 맞설 수 있다.
물론 섬세한 컨트롤과 타이밍이 필요하다.
스승도 못 하던, 나만이 할 수 있는 응용.
염동권(念動拳), 환생하고 처음 써 보는데 잘 들어갔다.
“야, 뭘 그리 놀라? 마력으로 방어해서 안 다쳤잖아?”
“자, 잠깐.”
마력이 바닥난 도미닉이 손을 허공에 휘저었다.
다급한 타임 요청.
나는 그 손바닥을 퍽 후려쳤다.
“으아아악!”
마력방어가 끝나고 직접 육체를 치는 손맛.
도미닉은 불에 덴 듯이 놀라면서 되는대로 검을 휘둘렀다.
사이드스텝으로 가볍게 피한 나는 또 그 팔을 쳤다.
빡! 빡! 빡!
손등, 하박, 상박, 어깨 연속 치기!
“자, 잠깐만! 잠깐만!”
도미닉은 얼굴이 새파래져서 물러났다.
이제 붉은 아우라는 완전히 사라졌다.
나한테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이제야 알고 꼬리를 마는 것이다.
“조, 좀 쉬고…….”
짝! 빡!
말하다가 뺨을 얻어맞은 도미닉의 입에서 피가 흘렀다.
“커어억! 잠, 잠깐…….”
“응, 너는 말해. 나는 때릴 테니까.”
뻑! 빡! 뻑!
나는 놈의 허벅지, 옆구리, 팔을 순차적으로 쳤다.
머리와 목, 명치처럼 단숨에 쓰러질 급소만 피해서 연타.
물론 자비로워서가 아니다.
놈의 전의를 가루로 만들기 위해서다.
“컥! 커어어억!”
도미닉은 내게 얻어맞으면서 제 딴에는 반격이라고 검을 휘둘렀다.
사실은 다가오지 말라는 발악.
나는 무시하고 계속 쳤다.
놈에게서 검은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다.
절망, 포기.
나한테 뭘 해도 안 된다는 자각이 들면서 자포자기에 접어든 것이다.
저러면 흡수할 수 있지.
“크윽, 으으윽…….”
검을 놓친 놈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몰아쉬는 숨, 부어오른 얼굴.
눈에는 눈물까지 글썽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 앞에서 멈춰 서서는 놈을 내려다보았다.
도미닉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내가 졌다…….”
“뭐? 졌다고?”
도미닉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뭐야, 포기하는 거냐? 내 약혼녀에게 추근거리는 거 관두겠다고?”
“……그, 그래. 내가 졌다니까! 다 포기하고 물러나겠다!”
“우네? 아까 나보고 울보라고 하신 분이 지금 울고 계시네?”
“…….”
도미닉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무튼 돈은 벌었으니까 이 정도로 끝낼까?
내가 잠깐 생각하자 놈의 표정에 안도감 그리고 교활한 눈빛이 스쳐 지나간다.
나를 얕보고 쳐들어와서 시비 건 놈.
그래 놓고 자기가 불리해지니까 꼬리를 만다.
사람들이 다 보는데 무릎까지 꿇었으니 내가 더는 때리지 않을 거라 믿고 있다.
그러니까 이 자리만 어떻게 넘기고 나중에, 가문의 힘을 빌려서라도 갚아 주겠다는 간사한 눈빛.
지겹도록 봤던 표정.
이젠 안 속는다.
나는 목검을 내리쳤다.
“운다고 돈 안 내도 되는 줄 아냐?”
사냥감을 잡았으면 발라먹어야지.
뼈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