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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고인 황제놀음-13화 (13/230)

두 번 고인 황제놀음 (13)

내가 더 셀 텐데?

추태를 보인 귀족, 도미닉.

본래라면 하인들이 얼른 수건을 건네겠지.

하지만 그들의 주인은 리브라타 백작 가문, 그리고 나는 거기 아들이다.

내가 구경하라고 했으니까 다들 하는 중이다.

“저…….”

하인들은 전전긍긍하며 아멜리아를 살폈다.

저 귀족을 계속 더럽게 놔둘 수 없으니 아멜리아에게 날 좀 말려 보라는 의미로.

정작 아멜리아는 다소곳하게 양손을 앞에 모으고 서 있었다.

정말로 다들 구경만 하자 흙투성이가 된 도미닉이 입을 떡 벌렸다.

“이놈들이…… 단체로 미쳤나?”

“도, 도련님! 일단 이걸로 닦으시죠!”

뛰어내린 마부가 얼른 천으로 얼굴을 문질러 주었다.

임시방편이라서 큰 효과가 없지만.

도미닉은 부들부들 떨면서 나를 노려보았다.

“리젠 리브라타!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지?”

“먼지투성이라는 건 알아보겠다.”

“……난 부르작 후작 가문의 차남, 도미닉 부르작이다! 일단 씻을 물을 대령해라! 갈아입을 의복도! 내 용건은 그다음에 밝히겠다!”

“내 약혼녀, 인질로 잡았다고?”

놈이 흠칫했다.

주변 사람들도 깜짝 놀라는 가운데 내가 말했다.

“병이나 다른 사정 때문에 못 오는 거라면 사람을 시켜서 소식을 전하면 그만이지. 네가 굳이 직접 와서 이러는 건 그 여자를 네놈 집에 붙잡아 뒀다는 거지. 물론 너는 보호라고 변명할 거고.”

“뭐, 뭐?”

“야, 귀족들의 그 수작질을 내가 모를 것 같냐?”

사람 감금해 놓고 보호 핑계 대는 건 정말 초보 기술이다.

내 이야기를 들은 하인들의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도미닉이 귀족인데도 노려본다.

주가(主家)에 시비 걸러 온 놈팡이니까.

분위기를 휘어잡은 내가 정리했다.

“다행히 양쪽 다 후작 가문, 정말 위해를 가할 수는 없을 테니 여자는 안전하겠지.”

“……말해 두지만 그녀는 여기에 오기 싫다고 했다.”

“정말로 그렇다면 친필 편지 정도는 가져왔어야지.”

“…….”

도미닉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단수가 높은 놈이라면 가짜 편지까지 준비할 텐데.

설마 내가 이렇게 정면으로 받아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자, 이 다음은 뭐냐?”

“……뭐?”

“내가 얌전히 수락할 수 없단 거야 알잖아? 설사 내가 그러고 싶어도 가문의 체면 때문에라도 그냥 넘어갈 수 없지.”

귀족의 명예를 들먹일 것도 없다.

다른 남자 놈이 자기 약혼녀 데리고 있다는데 고개 끄덕이고 물러나면?

물론 나는 파혼할 생각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주도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깨지면 평생 얼간이 취급당하리라.

도미닉이 새삼 노려보았다.

“네놈이 뭘 믿고…….”

“결투하자고 온 거지?”

귀족들은 의견이 충돌하면 결투로 승패를 가리는 경우가 잦았다.

여자를 사이에 둔 경우에는 특히 더 잦았고.

“그래, 결투로…….”

도미닉이 대답하는데 마차 문이 안쪽에서 열렸다.

다들 무심코 그쪽을 보고는 탄성을 질렀다.

“에, 엘프?”

“아니, 다크엘프다…….”

마차에서 내린 건 다크엘프 남자였다.

연갈색 피부, 한쪽 눈에 안대를 찬 다크엘프에게 하인들의 시선이 쏠렸다.

이 백작가는 아멜리아를 제외하면 전원 인간, 다른 종족을 보기 어려우니까.

이종족은 인간보다 훨씬 더 아름답기도 하고.

“…….”

다크엘프는 말없이 도미닉의 뒤에 섰다.

말들이 날뛰는 동안 마차 안에서 버텼다는 건 실력이 있다는 건데…….

하필 엘프와 사이가 나쁜 다크엘프가 왔네?

나는 그 다크엘프를 살피면서 물었다.

“야, 도미닉. 네 호위냐?”

“물론! 우리 부르작 후작 가문에 머무르는 다크엘프다. 지금은 내 호위로 왔지!”

도미닉이 으스댔다.

후작이 무슨 깡으로 아들만 보냈나 싶었다.

약혼녀의 억류에 내가 꼭지 돌아서 기사들을 동원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다크엘프 호위라면 충분하다.

보통 인간이 무예를 갈고닦아 봐야 50년.

하지만 엘프, 다크엘프 같은 종족은 300년은 기본이다.

재능이 비슷하면 오래 수련한 쪽이 더 강하지.

“…….”

내 호위 기사, 가룰도 긴장한 얼굴이었다.

여차하면 나를 대신해서 저 다크엘프와 싸워야 할 테니까.

나는 다크엘프에게 직접 물었다.

“이름이 뭐지?”

“하인켈이라고 합니다.”

“성은 알려 주지 않네. 뭐 일단 넘어가고.”

하인켈이라고 이름을 밝힌 다크엘프는 좀 놀란 기색이었다.

방금 언급한 건 다크엘프의 고유문화니까.

나는 턱짓하면서 몸을 돌렸다.

“자기소개 끝났으면 이제 들어가자.”

대리 결투라면 가룰과 하인켈이 붙는다.

그러면 뻔한 결과.

직접 손을 봐야지.

저택 라운지.

금고에 넣어 놨던 서류를 챙기느라 좀 시간이 걸렸다.

먼저 온 도미닉은 선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기특하네. 소파에 흙 묻을까 봐 사양하냐?”

내가 웃으면서 자리에 앉자 도미닉은 인상을 팍 썼다.

“손님이 왔는데 주인이 직접 나오지도 않다니. 백작은 어디서 뭘 하기에 얼굴도 안 비치지?”

“집무실에서 일하고 계신다. 이번 일은 내가 처리하기로 했으니까 그리 알아.”

“뭐? 부르작 후작 가문의 아들인 내가 왔는데도 나와 보지도 않는다고? 하! 이래서 벼락출세한 백작은 못 써먹겠군. 어디서 돼먹지도 않은…….”

“야.”

나는 목소리 톤을 바꿨다.

포효.

굳이 언성을 높이지 않아도 말에 무게를 더할 수 있었다.

“우리 아버지가 니 친구냐? 뒤질래?”

“…….”

도미닉은 입을 다물면서도 발끈한 얼굴이었다.

나한테 눌려서 말이 안 나오는 걸 인정할 수가 없어서.

“앉으시죠, 도련님.”

도미닉을 따라온 하인켈이 나직하게 권했다.

포효가 딱히 대단한 기술은 아니다.

전장에서 병사들을 휘어잡는 용도니까.

그래도 동요 안 하는 하인켈은 상당한 실력이었다.

떨떠름한 얼굴이던 도미닉은 애써 얼굴을 굳히고는 앉았다.

자기가 방금 ‘쫄았다’는 걸 숨기려고 노력하면서.

짝!

나는 가볍게 손뼉을 쳐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자, 그럼 용건으로 들어가자.”

“리젠 리브라타, 네놈에게 그녀는 어울리지 않아! 그녀의 곁에는…….”

“너 같은 등신이 어울린다고? 1절만 해.”

도미닉은 말문이 턱 막혔다.

포효의 효과가 남아서 악도 못 쓴다.

그사이에 나는 다크엘프 하인켈에게 물었다.

“이건 후작의 묵인이 있어야 가능한 일인데, 맞나?”

“저는 부르작 가문의 식객으로 있습니다. 대답드리기 어렵군요.”

“내 약혼녀 억류하기 전에 부르작이 크로셀에게 암시 정도는 던졌겠지. 크로셀은 명확한 답을 안 주고 눈치 보다가 고르려고 할 테고.”

“…….”

내 뒤에 선 가룰이 신음을 흘렸다.

상상도 못 했다는 반응, 나는 설명해 주었다.

“이건 표면적으로는 사랑싸움이지만 실제로는 부르작 후작과 리브라타 백작의 힘겨루기야. 서로 감정도 안 좋았는데 부르작은 이번 기회에 리브라타를 납작하게 눌러 보자고 결심한 거지.”

“소문과는 다른 분이로군요.”

하인켈도 놀란 눈치였다.

다들 감탄하자 도미닉이 으르렁거렸다.

“리젠 리브라타. 잔말이 많군. 그래서 어떻게 할 거지? 그녀는 널 버리고 날 택했어.”

이놈을 어떻게 처리할까.

마침 초능력의 다음 단계를 시험해 보고 싶기도 했는데.

좋아, 다 받아 내자.

“돈부터 내고 그런 소리를 해.”

“……뭐?”

“골키퍼가 있어도 슈팅해 보고 싶은 마음이야 알겠다. 그러면 페널티킥 이용권을 사야지? 1회에 3천만으로 시작할까?”

“무, 무슨 소리야?”

“결투하러 왔잖아? 나와 결투하려면 3천만 원 내라.”

천년제국의 화폐는 원, 한국과 동일한 단위다.

황제인 내가 그렇게 정했으니까.

도미닉은 얼빠진 얼굴이다가 이를 악물었다.

“결투하려면 돈을 내라고? 누가 그런 미친…….”

“너랑 왜 공짜로 싸워 줘? 그리고 돈 안 내겠다면 너희 둘 다 이 자리서 죽는다.”

“그게 될 것 같냐?”

내 협박에 도미닉은 헛웃음을 흘렸다.

자기 가문의 이름, 그리고 호위인 하인켈의 실력을 믿고.

정작 하인켈은 신중했다.

“실례지만 그 말씀의 근거를 볼 수 있겠습니까?”

나는 금고에서 꺼내 온 계약서를 들어 보였다.

엘프, 멜리우스와의 계약서.

“이번 리브라타 가문의 황도행에 엘프 멜리우스도 동행한다는 계약서군요.”

“그것도 엘프어로 쓰여 있지. 이게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지?”

“…….”

하인켈은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다크엘프가 오래 수련한다고? 엘프도 마찬가지다.

하인켈은 여차하면 멜리우스와 겨뤄야 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었다.

사실 그 엘프 놈이 리브라타 가문을 위해서 그래 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하인켈이 착각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하다.

나는 도미닉을 보며 말했다.

“자, 이제 설명 끝났지? 나랑 직접 붙고 싶으면 돈 내라.”

“직접 결투? 마력 한 방울도 없는 등신이 나랑 결투하겠다고? 죽고 싶은 거냐?”

“잠깐. 귀족 자식들이 직접 결투해도 되던가?”

나는 가룰을 돌아보며 물었다.

“계승 서열에 따라 다릅니다. 장자가 아니라면 결투에 딱히 제약은 없습니다.”

“그랬지? 좋아. 하자.”

사실 내가 세워 둔 법, 당연히 안다.

나와 도미닉의 직접 결투로 못 박으려고 일부러 말한 것이다.

듣던 하인켈이 도미닉의 어깨를 눌렀다.

“도미닉 도련님, 진정하시죠.”

“뭐?”

“침착하셔야 합니다. 상대는 마력이 없는 분, 직접 결투는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행여 일이 커지면 후작 각하께서 언짢아하실 겁니다.”

날뛰던 도미닉이 멈칫했다.

하인켈이 단호하게 말했다.

“결투는 제가 하겠습니다. 믿고 맡겨 주시길.”

“으음…….”

하인켈이 대신 나서면 나도 가룰을 내보내야 한다.

이게 귀족 결투의 원칙, 그리고 하인켈이 이길 확률이 99%다.

이걸 막으려고 한 건데…….

나는 도미닉을 보면서 말했다.

“나랑 싸우는 게 무섭냐?”

“웃기지 마. 누가…….”

“나랑 경쟁해서 그녀의 마음을 얻을 자신이 없다 그거네. 하긴 나는 여자 홀리고 다니는 솜씨는 기가 막힌다고 온 동네에 소문났는데 넌 쥐뿔도 없잖아? 그러니까 네가 조금이라도 자신 있는 주먹질로 해 보자고 달려오셨는데, 이거 어쩐다?”

“…….”

“주먹질도 내가 더 셀 텐데?”

나는 일부러 악센트를 강하게 주었다.

깔보는 시선을 던지면서.

단순한 도발, 하지만 효과적이었다.

도미닉은 자기 어깨를 누르고 있던 하인켈의 손을 쳐 냈으니까.

“이 새끼가 여기저기서 맞고 다니다가 기억을 상실했나? 야, 10년 전에 나한테 맞고 질질 짜던 거 기억이 안 나냐?”

“그랬었나?”

귀족의 자제들은 서로 교분을 맺기도 한다.

하지만 척 봐도 도미닉과 리젠은 옛적부터 좋은 관계가 아니었다.

도미닉이 코웃음을 쳤다.

“그 더러운 수인 계집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펑펑 울던 꼴이 얼마나 한심하던지! 어른답게 처리하려고 했는데 알아서 매를 버는군.”

“앉아서 돈을 버는 거지. 돈 내고 결투할 거야?”

내가 턱을 괴고 재촉하자 도미닉은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감히 자기를 그렇게 봐서는 안 된다는 얼굴.

자기가 훨씬 더 강하고 잘났다는 굳건한 믿음.

“오냐, 내가 오늘 너를 완전히 박살 내 주마!”

“손님이 원하시는 대로 요리해 드리지.”

그물에 고기가 걸렸다.

그럼 회 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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