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10)
팔자 고칠 시간
저녁 식사 시간.
리브라타 저택의 식당.
전처럼 백작과 로데릭이 모인 가운데, 나는 문서를 백작에게 내밀었다.
“멜리우스와의 계약서입니다.”
“…….”
백작은 흘끗 내려다보았다.
아, 엘프어를 읽을 줄 모르지.
나는 설명했다.
“리브라타 가문이 황도로 올라가는데 멜리우스가 동행한다는 계약서입니다. 엘프들이 툭하면 계약을 멋대로 해석하지만 엘프어로 된 계약은 좀 달라서요. 이걸 내세우면 멜리우스도 말을 바꾸지 못합니다.”
“…….”
백작이 대답을 않고는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로데릭이 얼이 빠져서는 물었다.
“……그 멜리우스의 동의를 얻어 냈다고? 대체 어떻게?”
“글쎄에? 예쁜 여자 소개해 준다고 했을까?”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멜리우스는 미혼이지만 짝을 찾는다면 자기 종족 안에서 찾겠지.
인간인 내게 다리를 놔 달라고 할 일은 없다.
로데릭도 뒤늦게 깨닫고는 험악하게 노려보았다.
“대체 뭘 약속한 거지? 너, 얼토당토않은 걸 내준 거 아니냐?”
백작도 말은 안 해도 시선으로 물었다.
도도하게 굴던 멜리우스의 동의를 어떻게 단숨에 얻어 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리라.
나는 설명했다.
“멜리우스는 자기 동족들에게 돌아가고 싶어 하고 있습니다. 인간인 우리들이야 여기가 편안한 스위트홈이지만 그에게는 괴로운 창살 감옥이니까.”
“그래서?”
“나중에 제가 백작님의 이름을 빌려서 엘프들에게 편지 한 통 넣어 주기로 했습니다. 멜리우스와 교체할 엘프를 보내 달라고 말입니다.”
백작은 생각하곤 말했다.
“엘프들이 그 말을 들어주겠느냐?”
“그건 해 봐야 알죠? 하지만 편지가 오가고 결정이 내려지는 데 시간이 제법 걸릴 겁니다. 그리고 멜리우스도 사실 우리가 반드시 성공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냥 뭐라도 해 보는 게 낫지 않겠냐, 정도겠죠.”
“…….”
“물론 이 계약서는 멜리우스를 동행시키는 게 고작입니다. 황도에 동행한다고 해서 그가 적극적으로 우리 편을 들어 준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다른 가문들을 혼란에 빠트리고 착각시킬 수는 있겠죠. 작년보다 좀 더 목소리를 높일 수도 있을 테고요.”
나는 로데릭을 보며 웃었다.
“거기서부터는 형님 하기 나름 아니겠습니까?”
“으으음…….”
로데릭은 신음만 흘렸다.
백작은 계약서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알았다.”
“서기관 불러서 내용 확인해 보시지 않으십니까?”
“금방 들통나는 거짓말을 하진 않겠지.”
백작은 냉정하게 말하고는 나에게 일렀다.
“식사가 다 끝나고 내 방으로 와라. 약속한 마력약을 건네주마.”
“감사합니다만…….”
나는 로데릭을 빤히 보았다.
로데릭은 흠칫했다.
그와 나는 따로 약속한 게 있었다.
내가 멜리우스의 동행을 얻어 내면 마력약을 하나 더 주기로.
“…….”
나는 재촉하지 않고 그저 시선만으로 압박하였다.
물론 지금 이 몸에게 마력약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하지만 없다고 죽는 건 또 아니다.
로데릭이 과연 어떻게 나올까?
그냥 모른 척하면야…… 그릇이 그것밖에 안 되는 거지.
백작이 나직하게 물었다.
“더 할 이야기 있느냐?”
“……아버님.”
로데릭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리젠에게 마력약을 하나 더 내어 주셨으면 합니다.”
“하나 더?”
백작이 이해할 수 없단 얼굴을 했다.
마력약은 귀중품, 귀족도 마음대로 구할 수 없었다.
잘 보관해서 후대의 자식들에게 물려줘야 할 가보 취급이었다.
실제로 내가 먹는다니 저번에 로데릭이 정색했는데…….
로데릭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리젠에게 따로 약속한 게 있습니다. 그리 조치해 주셨으면 합니다.”
“…….”
백작은 로데릭을 물끄러미 보다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약속했다면 그래야지.”
“감사합니다, 형님.”
내가 로데릭에게 인사해도 그는 눈을 감고 무시했다.
뭐, 적어도 자기가 한 말을 지키는 놈이긴 하군.
식사 끝.
좀 시간이 지난 뒤에 나는 백작의 집무실로 불려 갔다.
집무실 의자에 앉아 있던 백작이 말했다.
“이미 알겠지만 이게 마력약이다.”
책상 위에 놓은 작은 병 두 개.
피처럼 붉은 마력이 넘실거린다.
드래곤이 특별히 조제하는 1급 마력약이었다.
백작은 나에게 하고픈 말이 있는 시선을 보냈다.
그래서 나는 바로 받지 않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저한테 마력약을 내주는 데 조건이 두 가지 있다고 하셨죠? 첫 번째가 멜리우스를 설득하는 거였고. 두 번째는 주시면서 말씀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 조건이 뭡니까?”
“그 전에 물으마. 왜 이제 와서 마력약을 필요로 하는 거냐?”
“음, 그야…….”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설명했다.
“잘 아시겠지만 카라카스의 귀족들은 전원 마력을 타고납니다. 저처럼 한 방울도 없는 경우는 전례가 없죠.”
“그래. 그래서 내가 너에게 마력약을 몇 개나 먹였지.”
“그리고 마력약을 먹고도 마력을 얻지 못한 사례는 보고된 적이 없고요.”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젠 리브라타는 밑 빠진 독이었다.
온갖 영약을 퍼부어도 차도가 없는 몸.
“제가 지금까지 먹은 마력약은 어디 도망간 게 아닙니다. 뭉쳐 있죠.”
“뭉쳐 있어?”
“여기 이 부근에, 말입니다.”
나는 내 가슴, 심장을 가리켰다.
“간단히 말해서 이 심장이 완전히 돌연변이입니다. 온갖 마력을 꾸역꾸역 흡수하고 단 한 방울도 안 내놓고 있죠. 제가 죽을 때 죽더라도 심장마비로 죽는 일은 없을 겁니다.”
마력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순환하는 것이다.
한데 리젠의 심장은 탐욕스럽게 온몸의 마력을 흡수해 버렸다.
마력약을 먹여도 마찬가지.
백작이 멍한 얼굴을 했다.
“……그런 일이 세상에 가능하단 말이냐?”
“원인 없는 결과는 없습니다. 마력약까지 먹었는데 몸에 마력이 안 돌면 신체 장기에 문제가 있다는 거고요.”
이 정도로 마력을 탐욕스럽게 흡수하는 기관은 내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굳이 백작에게 알려 줄 이유는 없지.
리젠이 이런 걸 줄줄 꿰고 있는 것도 이상하고.
“그냥 몸을 고쳐 보려고 이것저것 찾다 보니 알게 된 겁니다.”
“……그래서 마력약을 추가로 주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거냐?”
“예.”
“알겠다. 그러면 두 번째 조건을 말하마.”
백작은 나를 진지하게 보았다.
“이번 리브라타의 황도행에 리젠 너도 동행해라.”
“예?”
생각도 못한 소리에 나는 깜짝 놀랐다.
아니, 이 아저씨가 뭔 소리래?
백작은 빤히 나를 보았다.
“싫으냐?”
“집안의 수치인 저를 황도에 투척해서 뭘 어쩌실 생각입니까? 황도의 임자 있는 여자들에게 몸 로비라도 하라고요?”
내가 되는대로 말해도 백작은 꿈쩍도 안 했다.
“가기 싫으냐, 리젠?”
“아니, 그렇게 물으면 또…….”
이 몸, 리젠은 이제 스물이다.
한국이었다면 이제 고등학교 졸업하고 군대 갈 나이지만 카라카스는 열다섯 살만 돼도 성인 취급이었다.
스물이면 결혼하고 자식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나도 머지않아 리브라타 가문을 떠나서 먹고살 궁리를 하긴 해야 한다.
물론 가급적 편하게! 돈은 적당히 벌어도 좋으니 일을 최대한 적게 하는 쪽으로!
“……아, 뭐, 가죠. 귀찮지만 가서 요즘 유행하는 문물도 구경해 보고 뭐.”
“로데릭과 같이 가는 게 싫으냐?”
백작이 거듭 묻자 나는 쓴웃음을 흘렸다.
“다 아시면서 왜 물으십니까. 형제간에 우애가 깊다는 거짓말이라도 해 드릴까요?”
“그런 건 필요 없다.”
백작은 한숨을 쉬었다.
“내 자식은 셋이다. 장남 로데릭, 황도에 있는 장녀, 그리고 너. 셋 다 문제가 있다. 로데릭은 너무 신경질적이고 강박적이야.”
“설마 저보고 백작 하라는 거 아니시죠? 저, 안 합니다?”
나는 정색했다.
황제도 지겨웠는데 이런 산골짜기의 백작이 되어서 일하라니.
죽었다가 살아난 보람이 전혀 없잖아~!
백작은 나를 빤히 보며 물었다.
“생각이 없다고?”
“없습니다. 애당초 제국법에 장자 계승이 원칙으로 땅땅 박혀 있을 텐데요? 굳이 이 계승 순서를 바꾸려면 귀족원의 허가를 얻어야 하고요. 이야, 말하기만 해도 구질구질한 과정이 펼쳐집니다요.”
만에 하나 백작이 나를 후계자로 삼고자 한다면?
황도의 귀족들에게 뇌물을 바치고 알랑방귀를 뀌어서 구워삶아야겠지.
그 과정에서 집안 재산이 거덜 날 거다.
그렇게 백작이 된 내게 남겨진 건 허리가 휘청거릴 빚일 것이다.
사실 나, 시릭 카라카스가 귀족들에게 어지간하면 계승 순위 바꾸지 말라고 못 박아 둔 것이다.
이름난 가문의 전사자가 나올 때마다 계승 문제로 분란이 너무 일어났거든.
“무엇보다 그 관련 법률은 초대 황제 시릭 카라카스가 각별히 신경 쓴 겁니다. 2대 황제에 도전하는 우리 리브라타 가문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면 자격 미달이라는 각종 클레임이 걸리지 않을까요?”
“설득은 그만하면 됐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하나다.”
백작이 묵직하게 말했다.
“나는 형제간에 우애가 있었으면 한다.”
“그건…….”
“안다. 너희들 3남매가 서로 견제하고 아주 불편한 관계라는 것. 그리고 내가 말하는 것 또한 이상론에 불과하다는 것도 안다.”
백작이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우리 리브라타 가문은 사방이 적이다. 12가문 중에서 약체, 엘프들이 우리들과 친교를 맺고 있다고는 하나 사실 그들은 다른 가문에도 이미 줄을 대고 있다.”
“…….”
뭐, 그럴 것 같았어.
엘프들에게 리브라타는 그냥 보험에 지나지 않았다.
멜리우스만 봐도 엘프들 중에서 뛰어난 놈은 아닌 것 같거든.
백작이 나를 보며 말했다.
“형제, 남매간에 우애와 정이 있어야 한다. 이상론이라고 해도 그렇다. 형제간에 우애 하나 없는 것들이 어찌 큰 권력을 잡겠느냐? 만에 하나, 형제를 제치고서 황좌에 오른다고 한들 그게 즐겁고 편안한 자리겠느냐?”
“하시는 말씀은 알겠지만…….”
“형제조차도 포용하지 못하는 녀석이 어찌 제국의 백성들을 끌어안겠느냐?”
백작이 힘주어 말하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이상론이다.
동시에 너무나 올발랐다.
“나는 너희들이 우애를 다지고, 서로 힘을 합쳐서 앞으로 펼쳐질 난국을 헤쳐 나가기를 바란다. 그게 바로 너에게 마력약을 내어 주는 조건이다, 리젠.”
“…….”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이번 황도행에 합류해서…… 로데릭을 가능한 한 돕겠습니다.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그래, 충분하다.”
백작은 내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마력약을 챙긴 나는 내 침실로 돌아왔다.
침대에 정좌하고 앉은 나는 좀 전의 대화를 되새겼다.
물론 나는 백작이 될 마음은 전혀 없다.
하지만 로데릭은 괜히 나를 견제하던데…….
“일단 약속을 지키는 놈이지만…….”
이 몸에는 원래의 리젠 리브라타의 감정이 잔류하고 있었다.
내가 백작을 보고 자연스럽게 존대하던 것처럼, 형인 로데릭에 대한 감정도 어렴풋하게 느껴졌다.
불만과 짜증,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생각하던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중에 생각하고.”
나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초능력은 정신력, 육체에 깃든 영혼에서 뿜어내는 의념이다.
초능력을 갈고닦으면 자기 육체의 내부 상태도 훤히 볼 수 있었다.
지금 내 초능력이 약하다고 해도 이전의 경험으로 쉽게 할 수 있었다.
손끝에 몰렸던 예민한 감각.
시간을 들이니 전신으로 번진다.
몸의 골격, 내장, 피의 흐름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뭐가 됐건 팔자부터 고치고 보자.”
나는 마력약의 봉인을 뜯어냈다.
고물로 환생한 팔자.
새롭게 태어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