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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고인 황제놀음-9화 (9/230)

두 번 고인 황제놀음 (9)

니들만 사기 치냐? 나도 치자

리브라타 백작가의 별채.

10년 전부터 한 엘프가 독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시종이나 메이드를 두는 것도 마다하고, 근처에 사람의 발길이 오는 걸 거부했다.

그렇게 고고하게 살아가는 엘프, 멜리우스의 거처는…….

“홀아비 냄새가 수북하네.”

“뭐?”

“결혼 안 했지? 했으면 이런 데 밀어 넣을 리가 없으니까. 변방 발령은 독신남 퍼스트지.”

“…….”

멜리우스가 어이없이 보자 나는 덧붙였다.

“미녀인 엘프 여자를 변경에 보내면 별 미친 새끼가 껄떡거리거든. 물론 엘프 미남에게도 온갖 게 들러붙지만. 하여간 엘프는 숲 나오면 고생이라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자리에 앉으라고 해 줘야지. 그래야 대화가 성립하니까.”

“…….”

멜리우스는 적잖이 놀란 얼굴이었다.

엘프의 예법은 일단 집주인의 초대를 받고 들어가서가 끝이 아니었다.

집주인이 앉으라는 말을 하기 전까지는 본론에 들어가지 않는 것.

인간도 비슷하지만 엘프는 이걸 보다 철두철미하게 지켰다.

멜리우스는 거실의 의자를 가리켰다.

“우리들의 문화를 잘 아는 인간은 드문데…… 용케도 아는군. 앉아라, 리젠과 그 일행.”

내가 천연덕스럽게 앉자 가룰은 그 뒤에 섰다.

멜리우스는 내 맞은편에 앉아서는 빤히 보았다.

관찰하는 눈빛.

긴 침묵 끝에 멜리우스가 먼저 말했다.

“거두절미하고 바로 묻지. 내가 돌아갈 수 있게 해 주겠다고?”

“그 전에 확인 하나, 엘프들이 왜 12가문의 레이스를 지지하지?”

“그건 위쪽의 결정 사항이다. 내가 아는 바는 적고, 알더라도 섣불리 말할 수 없다.”

멜리우스는 담백하게 대답했다.

나는 가능한 한 남 일처럼 물었다.

“황제, 시릭과 당신들 종족 사이에 낳은 자식이 분명히 있을 텐데? 그 자식을 황제로 추대할 생각이 없다고?”

“…….”

나, 황제 시릭은 이종족 여자들을 황후로 맞아서 자식을 보았다.

당시에야 어렸지만 100년이 지났으니 성장했으리라.

멜리우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생각이다. 그 당연한 생각은 다른 종족도 마찬가지지. 황제의 자식 중 누구 하나를 황제로 삼겠다면? 다른 종족이 양보할 리가 없으니 바로 황위를 두고 겨루는 대전쟁이지. 실제로 그 직전까지 갔고.”

멜리우스도 내가 죽은 직후에 보고를 들었으리라.

나는 생각하며 짚었다.

“하지만 그러면 제국은 내전, 한 치 앞을 모르는 수렁에 빠지지. 그래서 일단 인간의 12가문을 들러리로 내세워서 시간을 번 건가?”

“들러리라고요?”

듣던 가룰이 깜짝 놀랐다.

본래 호위는 침묵을 지켜야 하지만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12가문의 레이스라는 건 새빨간 거짓말일 거야. 각 종족들은 자기들의 대표, 황제의 피를 이은 자식을 다음 황제로 만들고 싶어 하지. 그리고 이건 딱히 대단히 비밀도 아닐걸?”

“인간적으로 생각하는군, 인간.”

멜리우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너희 인간들을 완충재로 사용하는 건 사실이지만…… 2대 황제가 인간이어도 우리에겐 큰 상관이 없어. 설사 인간이 황위에 올라도 고작 100년도 버티지 못하고 바스러질 테니까.”

“그럼 인간을 징검다리 삼아서 차기, 차차기 대권을 노리시겠다?”

“우리들이 아쉬울 게 없단 거다. 보다 신중하게 가겠다는 거지.”

“그렇겠지, 엘프들은 신중하게 판단하시니까. 이번에도 다크엘프들에게 기선을 빼앗기시려나?”

“…….”

내가 비꼬자 멜리우스의 낯빛이 변했다.

지금 시대의 인간들이야 잘 모르겠지만 전생의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세운 세력, 천년제국에 엘프들은 다소 늦게 합류했다.

개국공신 사이에서도 서열이 나뉘는 법.

그리고 엘프는 늦게 합류했다는 이유로 제국 내에서 발언권이 약했다.

그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으리라.

“……많은 걸 아는 인간이로군.”

“몰라서 물어보는 거다. 그런데 이런 판을 대체 누가 짰지?”

나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졌다.

“인간 중에서 2대 황제를 뽑아서 징검다리 삼자는 계획, 제법 절묘하잖아. 거기다가 일곱 종족이 죄다 동의하다니. 설득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을 텐데?”

“말했지만 나도 확실히 모른다. 다만…….”

멜리우스는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이제 내가 돌아갈 방법을 말해 주지?”

“……교섭 좀 치네?”

나는 웃으며 답을 주었다.

“당신이 여기에 파견 나와 있는 이유는 하나잖아? 리브라타 백작 가문과의 친선 사절은 구실이고, 인간이 허튼짓을 할지도 모르니 감시하는 거지. 당신은 귀양 온 기분일 거고.”

“…….”

“방법은 간단해. 엘프들에게 가서 다른 엘프로 교체해 달라고 하면 되지.”

“뭐?”

멜리우스가 어이없어했지만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생각해 봐, 당신이 직접 요청하는 건 불가능해. 장로들의 지시에 대놓고 불만을 토하는 게 되니까. 앞으로 50년, 100년 이상 여기에 있어야 할지도 모르지.”

“…….”

“하지만 리브라타 가문이 엘프들에게 직접 엘프의 변경을 요청하면 이야기가 다르지. 내부의 항명이 아니라 외부의 요청인 거야. 이해돼?”

멜리우스는 생각에 잠겼다.

나는 추가로 덧붙였다.

“물론 이유야 좋게 붙일 거야. 우리 멜리우스 님은 너무나 자상하고 관대한 엘프라서 불만이 없지만. 다른 엘프는 어떠한지 우리 인간들이 겪어 볼 필요가 있다는 식으로 잘 말해 주지.”

“흐음…….”

모양새 좋게 귀향시켜 주겠다는 의미.

멜리우스가 말했다.

“하지만 네 요청을 장로들이 들어준다는 보장이 없는데?”

“내가 아니라 리브라타 백작의 요청이라면 무게감이 다르지. 어려운 요구도 아니고. 엘프와 리브라타 가문은 서로 친교를 맺은 사이잖아?”

“확실히…….”

멜리우스는 신음을 흘리면서 숙고했다.

생각하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네 말을 믿어 보지.”

“아, 물론 내 쪽에서도 조건이 있지. 이번에 황도에서 벌어지는 원탁회의, 당신도 같이 올라가야 해.”

“……인간과 동행하라고?”

“장로들에게 담당 엘프 바꿔 달라고 요청하려는 작업 중 하나야. 자, 여기 서명해.”

나는 미리 작성해 둔 계약서를 내밀었다.

멜리우스는 문서를 내려다보고는 정색했다.

“이건 엘프 문자인데?”

“아, 니들은 오래 산다는 핑계로 별 이상한 짓 다 하잖아? 그래서 특별히 준비했지.”

“…….”

엘프는 거래, 계약하기가 굉장히 까다롭다.

엘프는 자기들이 오래 산다는 걸 종종 이용하니까.

가령 엘프에게 돈을 빌려줬다?

떼먹지는 않아.

갚긴 갚아.

너 죽고 네 증손자에게 갚아 준다고.

대개 이런 식으로 계약서 조항을 종종 빠져나가서 아주 귀찮다.

그래서 나는 조항을 각별히 신경 쓰고 일부러 엘프어로 적어 왔다.

“으으음…….”

엘프는 엘프어로 된 계약은 깍듯하게 지킨다.

안 그러면 동족들 사이에 얼간이 취급당하거든.

멜리우스도 그걸 알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엘프들을 잘 아는 놈이로군. 누가 가르쳤지?”

“너도 결혼 사기당해 봐. 나처럼 된다?”

“…….”

난 진심으로 말했는데 멜리우스는 농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생각하던 멜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서명하지. 단, 약속은 지켜야 한다.”

“어겨서 좋을 게 뭐가 있겠어?”

쓰윽.

멜리우스가 서명을 마치자 나는 계약서를 챙겼다.

이제 이걸 백작에게 보여 주고 마력약을 받아 내면 된다.

멜리우스는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리젠이라고 했나? 리젠 리브라타. 처음 보지만 범용한 인간은 아니군. 너의 말에서는 지혜의 향기가 나고 행동에서는 바람의 재간이 느껴진다.”

“10년 동안 이웃사촌이었는데 빨리도 알아봐 주시네.”

“재간에 대한 답례로 말해 주마. 엘프들이 인간을 차대 황제로 추대하는 데 찬성한 이유 말이다.”

자리를 마무리하려던 나는 귀를 기울였다.

멜리우스가 조용히 말했다.

“12가문의 레이스가 벌어진 건 황제, 시릭 카라카스의 유언 때문이라고 한다.”

별채에서 나온 나는 한참을 걸었다.

멜리우스가 듣지 못할 거리까지.

자갈길을 걷던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떤 새끼가 사기를 쳤네.”

황제였던 나는 말 그대로 비명횡사했다.

유언을 남길 시간도 없었다.

유언장? 그런 것도 없었지.

“멜리우스가 잘못 알고 있을 수도 있지만…… 아귀는 맞는데.”

2대 황제는 인간으로, 징검다리 삼는다.

장생하는 이종족들에게는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하지만 내가 죽은 직후, 힘으로 다투면 유리하다고 자신하던 놈들도 있었겠지.

“그놈들까지 얌전해진 건…….”

내 유언이라니까 먹힌 거다.

물론 그건 완전히 새빨간 거짓말, 위조고.

“기가 막히는구만.”

명의 도용당한 게 짜증 나지만…… 좀 걷다 보니 가라앉았다.

괘씸하긴 해도 당시에는 최선이었겠지.

뭐, 내전이 벌어지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

“저기, 도련님.”

뒤따르던 가룰이 걱정스럽게 불렀다.

“왜?”

“그런 약속을 하셔도 괜찮겠습니까? 엘프들의 장로들에게 요청한다고 반드시 들어준다는 보장이 없잖습니까?”

“그건 내가 걱정할 게 아닌데?”

내가 웃으며 말하자 가룰이 눈을 끔뻑거렸다.

나는 손에 쥔 계약서를 흔들어 보였다.

“이건 그냥 멜리우스가 황도에 같이 올라간다고 적힌 계약서야. 그거 말고 아무 조건도 안 적혀 있다?”

“그럼 사기…….”

“아니, 사기는 아니지. 요청할 거야. 엘프들의 장로가 씹어 버리면 나로선 할 말이 없단 거지.”

나는 웃으며 말했다.

“최선을 다해 봤지만 안 됐네요. 욕 좀 보세요~ 정도?”

“……그럼 저 엘프가 화내지 않겠습니까?”

“원래 엘프는 결정이 느려. 내가 올해 변경 요청을 보내도 내년에나 답이 돌아올걸? 들어준다면 괜찮고, 아니라면 다시 보내고. 그렇게 편지 오가면 5년은 훌쩍이야.”

가룰은 당황해서 말했다.

“……그럼 그거 사기 아닙니까?”

“최선을 다했지만 안 된 거라니까 그러네. 그리고 그렇게 편지 좀 오가다 보면 나도 이 집안을 떠날 테고.”

나는 외려 설파했다.

“야, 날 사기꾼으로 모는데, 억울하다? 내가 뭐, 돈을 뜯었냐, 몸을 노렸냐? 그냥 황도에 한 번 같이 올라가잔 거 말고 뭘 했는데? 10년 내내 방 안에 틀어박혀 있던 외톨이 데리고 나들이 한번 다녀오면 되는 거지, 내가 뭘 더 해 줘야 하는데?”

“음, 그렇게 말씀하시니 또 그렇네요…….”

가룰이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놈의 어깨를 툭 치고는 말했다.

“물론 멜리우스와 괜히 척질 필요는 없지. 가능한 한 성사되게 할 거야.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고. 우리가 걱정할 게 아니라는 거지.”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뭐, 황제의 유언을 날조하는 놈들도 있는데 내가 한 건 양반 아니냐?

“내가 이런 제안을 하고 엘프들에게 문의하는 동안, 멜리우스도 돌아갈 수 있단 희망을 품을 거 아냐. 서로 좋은 일 아니냐?”

“……어, 그러네요? 도련님, 훌륭한 일을 하시는군요.”

가룰은 듣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놈, 사기당하기 딱이네.

나는 측은하게 보다가 몸을 돌렸다.

“계약도 따냈으니까 오늘 저녁에 보고하자.”

“아, 그렇군요! 백작님이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이번 리브라타 백작가의 황도행에 엘프의 일원이 동행하는군요. 작년과는 다를 겁니다. 다른 가문들도 이젠 쉽게 보지 않을 거고요!”

“초등학생 소꿉놀이에 중학생 데려가는 셈이지.”

황제 관두고 싶었던 나로서는, 그거 해 보겠다고 모인다는 게 기가 막히지.

하여튼 그딴 건 아무래도 좋다.

나는 마력약만 받아 내면 그만이다.

이 폐급 몸을 고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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