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8)
집 밖의 말은 엘프가 듣는다
다음 날 아침.
늘어지게 자고 있자 아멜리아가 들어와서는 나를 깨웠다.
“도련님, 이제 점심시간입니다. 그만 좀 일어나세요.”
“엄마, 5분만 더.”
새벽 내내 염동력을 수련해서 피곤하다.
능청을 부려도 아무 반응이 없네?
내가 못 이긴 척 일어나자 아멜리아는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 제가 도련님을 뵐 때마다 속이 터지긴 했어도 배 아팠던 기억은 없습니다.”
“엄마가 기억상실이다!”
“도련님, 그런 장난은 삼가 주세요. 행여나 남이 들을까 봐 두렵습니다.”
아멜리아는 정색하고는 타일렀다.
나는 턱을 괴고는 말했다.
“그래도 이 집에서 내 편을 들어 주는 건 아멜리아밖에 없는데? 엄마는 세상없어도 내 편이지?”
“그러니까 그렇게 부르시면 안 됩니다.”
“별관의 엘프에 대해서 알아?”
내가 갑자기 화제를 돌리자 아멜리아는 다소 안도한 기색이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은 없습니다. 식사를 전해 주는 하인들도 사담을 나눠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놈이 리브라타 본가에 머문 게 얼마나 됐지?”
“대략 10년은 되었을 겁니다.”
아멜리아는 걱정스럽게 덧붙였다.
“이상한 생각 하시면 안 됩니다. 엘프를 보고 싶어 하던 하인들이 근처를 얼쩡거리다가 들켜서 일이 커졌으니까요. 백작님이 그 하인들을 해고하셔서 겨우 수습했죠.”
“엘프답게 엄청 까탈스럽네.”
“그분은 엘프와 리브라타 가문의 우호 증진을 위해서 머물러 주시는 분입니다. 행여나 도련님이 괜한 무례를 범했다가 엘프가 화내면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엘프는 자기들끼리 사는 걸 선호한다.
그런 놈들이 이 인간 귀족 가문에 사람을 심어 놓은 이유?
리브라타는 2대 황제가 될 자격을 갖춘 가문이니까.
“12가문의 레이스라…….”
“도련님, 점심 식사부터 하세요.”
아멜리아가 권하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를 마치고 나는 연병장에서 훈련했다.
달리기로 땀을 빼고 지치면 쉬었다가 근력운동을 한다.
요 며칠 계속 그러니 조금씩 체력이 붙는 게 느껴졌다.
“저기, 막내 도련님…….”
체육관에 앉아서 수건으로 땀을 닦고 있자 기사 하나가 다가왔다.
봤던 얼굴.
“아, 전에 내가 이도류로 때린 놈이던가? 괜찮냐?”
“아, 괘, 괜찮습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기사는 내 옆에 앉아서 말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기사, 가룰이지? 우로스가 제법 마음에 들어 하던데.”
사람 얼굴하고 이름 외우는 거야 황제 시절의 버릇이다.
내가 대충대충 살고 너스레나 떠는 것 같지만 이런 부분은 확실했다.
사람은 높은 사람이 자기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고 가정사를 챙겨 주면 쉽게 감동하거든.
가룰 역시 감격한 얼굴이었다.
“예, 그렇습니다. 그때는 정말 실례가 많았습니다.”
“때린 내가 미안하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실례가 아니라면…… 제가 도련님을 호위하고 싶습니다.”
“…….”
본래 귀족들은 시종과 기사들을 데리고 다닌다.
시종은 귀족의 뜻을 대신 전달하고, 기사는 귀족을 보호하는 한편 여차할 경우에는 무력도 대행한다.
이른바 높은 분의 증명이다.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 그건 안 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예?”
“너도 마력을 검에 부여하는 단계지? 그 나이에 마력검의 경지에 이르렀다면 출세가 눈앞에 어른거릴 텐데? 그럼 나보다는 형에게 붙는 게 낫지 않을까? 아, 형은 이미 호위가 있나? 그래도 여차할 경우에 공을 세워서 눈에 들면 되지. 아니면 내가 추천장이라도 써 줘?”
“…….”
가룰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내가 진짜로 거절하는지, 아니면 둘러대는 건지 알 수 없어서.
자기보다 높은 사람이 말하면 곧이곧대로 못 받아들인다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잘 알다시피 나는 사고뭉치다. 재산 받을 거 없는 막내인 데다가 야심도 없어.”
“음…….”
“진짜 없다니까? 나는 형을 제치고 이 가문을 차지하겠다거나 그런 욕심 전혀 없다.”
난 황제도 관두고 싶어 했다.
이런 변방의 백작 자리가 탐이 날까?
가룰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럼 리젠 도련님은 앞으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장차 로데릭 도련님이 작위를 계승하신다면…… 리브라타 가문에 계속 머무르실 수 없을 텐데요?”
“집 나가서 따로 먹고살아야지. 아주 편하게 놀고먹을 생각이다.”
“그럼 앞으로 제가…….”
가룰은 결심한 얼굴로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는 머리를 숙여 보였다.
기사가 주인에게 바치는 경의였다.
“도련님의 편한 길을 위해서 검을 휘두르겠습니다. 부디 저를 호위로 삼아 주시죠.”
가룰이 간청하자 나는 좀 의아해했다.
“나 따라와도 별 볼 일 없다니까 그러네? 너 그렇게 마력 펑펑 써 댄 거 보면 나름 이 기사단에서 에이스급 아니냐?”
“그런 평판 따위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때 도련님과 겨뤄 본 뒤로, 전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딸 쳐. 그럼 잠 온다. 아, 내 생각 하면서 치진 마라?”
“…….”
진지하게 말하던 가룰의 입이 벌어졌다.
“……아, 아무튼 도련님을 계속 따라다니면서 여러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내가 너보다 약한데? 그때야 기습으로 한판 따낸 거고.”
“지금은 그럴지 몰라도 훗날, 근시일 내에 다시 싸우면 다를 겁니다. 반드시 달라질 거고요.”
가룰이 타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내가 마력이 없고 체력이 없다지만 익힌 기술, 몸놀림은 어디 가지 않는다.
나와 겨뤄 본 가룰은 그걸 직감하고는 이리도 달라붙는 것이리라.
“뭐, 나도…….”
호위 하나쯤 있으면 좋긴 하지.
지금 이 몸은 너무 약하거든.
만에 하나 자객 같은 게 덤비면 귀찮아질 테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렇게 말렸는데도 굳이 고생하고 싶다니 고생시켜 드려야지.”
“감사합니다! 앞으로 충심으로 보필하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충성해 봐.”
“예?”
“같이 별관에 좀 들어가야겠다.”
활짝 웃던 가룰의 얼굴이 굳어졌다.
늦은 오후.
나는 가룰을 데리고 별관으로 접근했다.
별관은 본관과 분리된 2층 건물인데, 거길 통째로 엘프에게 내주고 있었다.
나를 따라 수풀에 숨은 가룰이 만류했다.
“……도련님, 관두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말해 봐, 들어줄게.”
윗사람이 귀를 기울이면 아랫사람은 흥이 나지.
가룰이 반기면서 말했다.
“아시다시피 엘프는 고고하고 도도한 이들입니다. 허락도 구하지 않고 접근하면 불쾌해할 겁니다.”
“여긴 우리 집이고 우리 땅이다. 세 들어 사는 놈이 인사 한번 안 오는데 확인해 봐야지.”
“……그게 그렇게 됩니까?”
가룰은 멍해하다가 말했다.
“아니, 그, 그래도 엘프잖습니까? 또 리브라타 가문의 후원자기도 합니다.”
“그 후원 말인데…….”
잠깐 생각하던 나는 털어놓았다.
“12가문의 레이스가 뭐냐?”
“예? 그야 차기 황제를 뽑기 위해서 귀족 가문들이 서로 논의하는 것 아닙니까?”
“그건 우리 인간 입장이지. 다른 일곱 종족들이 왜 그랬을까? 자기들이 황제 할 수도 있었는데?”
“그야…….”
가룰은 한참 끙끙거리다가 말했다.
“제국의 평온을 위해서 아닐까요? 초대 황제가 돌아가신 직후에, 엄청나게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고 하니까요. 누구 하나가 황제가 되겠다고 나서면 다른 이종족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테고 발끈했을 겁니다.”
“그래, 그게 100년 전의 일이지.”
나는 나직하게 말했다.
“인간들에게는 까마득한 옛날이지만 엘프들의 시간관념으로는 재작년 일이다. 저 별채에 머무는 엘프 놈은 그때 어떤 논의가 있었는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자세히 알고 있을 거다.”
“…….”
가룰은 깜짝 놀라서는 나를 보았다.
얼간이 도련님이 이런 깊은 생각을! ……하는 게 보인다.
표정 관리가 안 되는 놈이네.
뭐, 밉진 않지만.
가룰이 의아해했다.
“하지만 도련님, 물어본다고 엘프가 순순히 대답해 주겠습니까? 인간과는 제대로 말도 섞지 않을 정도로 도도한 것들인데요.”
“아, 걱정하지 마. 여기에 파견 나올 정도라면 등신이니까.”
“예?”
“이런 변방의 인간 집까지 찾아온 엘프가 제대로 된 놈이겠냐? 엘프들 사이에서도 무시당하는 놈인 게 틀림없어.”
“확실히…….”
가룰이 고개를 주억거리는데 별채 문이 열렸다.
나온 건 금발의 청년이었다.
훤칠한 키에 뾰족한 귀.
가는 팔다리의 우아한 동작, 거리가 있지만 척 봐도 엘프였다.
“좋아. 오셨네.”
물론 방금 대화는 다 들리라고 한 거다.
엘프는 청각이 민감해서 설사 건물 안에 있어도 이런 대화를 잡아낼 수 있었다.
정신을 집중하면 또렷하게 들을 수 있고.
문 앞에 선 엘프는 나와 가룰이 숨어 있는 수풀 쪽을 쏘아보았다.
긴장한 가룰은 턱이 땅에 닿을 정도로 몸을 수그렸다.
“뭐하냐? 우리 다 들켰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룰이 깜짝 놀라서 내 다리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뿌리치고.
나는 엘프에게 태연하게 말했다.
“아, 인간에게 먼저 자기소개를 하는 건 자존심이 상하지? 그러니 내가 먼저 자기소개를 하지. 나는 리젠 리브라타, 당신이 머무는 이 동네 집주인의 막내아들이다.”
“어쩌라는 거지?”
목소리에 눌어붙은 분노.
엘프들은 모욕에 민감하다.
가룰도 상대의 적의를 느꼈는지 얼른 내 앞에 와서 섰다.
만에 하나, 자기가 방패가 돼서 나를 지키겠다고.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당신에게 좀 괜찮은 이야기를 가져왔어. 집에 함부로 들어갈 수 없어서 당신을 나오게 한 거고.”
“뭐라고?”
“엘프들은 초대와 방문의 예의를 심각하게 따지잖아?”
엘프들은 예법에 까다롭다.
특히 예고 없는 방문을 격렬하게 싫어했다.
자기가 부르지도 않은 손님이 찾아와서 문을 두드리기만 해도 짜증을 부리고 분노한다.
전에 하인들이 주변을 기웃거리니 화낸 것도 그런 이유고.
“본래라면 편지로 좋은 때를 골라서 만남을 청해야겠지만, 내가 시간이 그렇게 많지는 않아서. 하지만 지금 이건 당신이 알아서 집 밖에 나온 거니 별 상관없지?”
“…….”
내가 엘프의 예법에 대해서 짚자 상대의 얼굴에 약간의 놀라움이 담겼다.
인간이 이리도 엘프의 문화, 삶을 술술 아는 건 드무니까.
“그래서?”
물론 그렇다고 저놈이 나를 좋게 본다는 건 아니다.
나는 조용히 말했다.
“당신이 엘프들의 고향, 정령수로 돌아갈 방법을 알려 주지.”
“……뭐라고?”
“엘프에게 10년은 긴 시간이 아니지만 동족이 하나도 없는 여기서 지내는 건 짜증 날 테지. 음률과 정령환을 즐기지도 못할 테고. 그저 귀양 온 심정으로 여기에서 하루하루 머무르고 있을 테지.”
“…….”
말은 안 해도 얼굴이 곧 대답이었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서 당신이 고향으로 돌아갈 방법을 가져왔어. 들어 보겠어?”
“허튼소리는 아니겠지?”
“정령수에 맹세코 아니지.”
엘프들의 약속 방식을 거론하자 상대는 한참 말이 없었다.
가룰이 나를 돌아보았다.
뭔가 잘못됐냐는 시선, 나는 설명했다.
“생각하느라 저래. 원래 엘프는 판단하기 전에 몇 번이나 숙고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그냥 기다려.”
“……나는 콘다르의 자식, 멜리우스다. 리젠과 그 일행, 안으로 들어와라.”
엘프의 자기소개와 집 안에 들어오라는 권유.
일단 이야기를 들어 보겠단 의미였다.
물론 여전히 나를 경계하는 게, 완전히 믿는 건 아니지만…….
제국을 다스렸던 나는 네놈들의 문화, 사고방식에 빠삭하거든.
약점도 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