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 고인 황제놀음-6화 (6/230)

두 번 고인 황제놀음 (6)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우로스는 바보가 아니었다.

백작의 자식들의 미묘한 알력 다툼, 끼어들고 싶지 않지만 줄을 댄다면 당연히 장남이다.

막내? 리젠 리브라타는 소문난 얼간이 아닌가?

하지만 방금 대련을 본 순간, 그 선입견은 모조리 날아가 버렸다.

리젠은 완벽했다.

발놀림, 대련 상대의 동태를 살피는 눈썰미, 칼을 던진 직후에 뛰어드는 타이밍에다가 내려치는 동작까지.

칼로 기사장까지 꿰찬 우로스가 보기에는 흠잡을 데가 하나도 없었다.

검신의 경지!

리젠은 칼 한번 잡아 본 적이 없으니……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천재 아닌가?

이 소년을 제대로 가르친다면, 분명히 제국 제일의 기사가 되리라!

그리고 우로스는 제국 제일의 기사를 길러 낸 스승이 될 테고!

우로스는 장남의 부탁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리젠의 압도적인 재능 앞에는 세속적인 형제 싸움 따위 아무래도 좋다!

우로스는 불타는 눈으로 리젠을 보았다.

저 고운 얼굴의 미소년이 훗날 제국 최강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 * *

우로스의 뜨거운 시선에 나는 혀를 찼다.

이놈, 완전히 착각하고 있네.

전생의 황제, 제국 최강이었던 내가 이런 촌구석 기사에게 검술을 배우리?

시간 낭비다.

그냥 적당히 둘러대고 자리를 피하자.

내 속도 모르고 기사장 우로스는 열성적으로 설득했다.

“도련님은 검술의 천재십니다! 실로 백 년,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재능입니다!”

“야, 이도류인 것처럼 방심시키고 검 하나 날려서 자세 무너트리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야. 또 기사들은 나를 얼간이로 보고 방심했고. 각종 제어장치도 있으니까 내가 지면 더 이상했지.”

“이거 받아 보시죠.”

갑자기 우로스가 검을 뽑더니 거꾸로 잡고 내밀었다.

무인(武人)이 자기 무기를 건네주는 경우는 흔치 않기에 나도 반사적으로 받았다.

우로스는 콧김까지 뿜으면서 감탄했다.

“칼 쥐는 법도 완벽하시군요. 그냥 타고나셨습니다!”

“아, 이거…….”

마력이나 체력은 바닥이어도 습관은 변하지 않는다.

칼을 휘두르고 살았던 나는 검을 잡는 게 익숙했고.

하지만 사정을 모르고 보면 그냥 타고난 천재 검사로 착각하리라.

“왜? 아예 칼을 던지는 궤도와 뛰어드는 타이밍도 천재적이라고 아부하지?”

“암요! 그럼은요! 제가 하나만 보고 이렇게 권유하시는 줄 아십니까? 저 칭찬에 인색한 사람입니다?”

우로스는 침을 튀기면서 말했다.

“적에게 칼을 날리고 자세를 무너트린 다음에 처리하는 거야 실전적이긴 하죠. 하지만 손에 굳은살도 없는 도련님이 아주 완벽하게 펼쳐 내셨단 말입니다. 호흡, 동세와 검세, 마무리까지 하나도 흠잡을 데가 없었습니다!”

“야, 귀 따가워. 진정해.”

내가 무기를 내밀자 우로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좀 휘둘러 보시죠. 제가 보고 싶습니다.”

“아니, 내가 싫다. 받아.”

“……으으음.”

우로스는 정말 서운하고 섭섭해하면서 칼을 받아 들었다.

“첫 대련이셨으니 피곤하셨겠죠. 죄송합니다. 그러면 훈련은 내일부터 할까요?”

“앞으로도 안 할 건데.”

“……예?”

우로스는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나를 원망스럽게 보았다.

머리 반은 벗겨진 아저씨가 이러니…… 참 누가 볼까 봐 두렵구만.

“도련님, 그런 놀라운 재능이 있으신데 검술을 훈련하지 않으시겠다고요? 보물을 썩히시겠다고요?”

“아니, 체력 단련은 할 거야. 할 건데…….”

“강한 인간이라면 마땅히 기사가 돼야죠! 설마 제국군에 입대하실 겁니까? 그건 절대 안 됩니다. 재능을 썩히는 길입니다!”

그냥 체력 단련이나 하러 왔는데 찰싹 달라붙네.

어떻게 떼어 낸다?

난 이놈에게 배울 수준이 절대 아니거든.

하지만 대놓고 거절하면 서운해하고, 쉽게 포기도 안 하겠지.

나는 생각하곤 말했다.

“네가 내 스승이 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네.”

“물론 제가 당대의 내로라하는 기사들에게 처지기는 합니다. 하지만 리브라타 기사단은 제국 이전부터 존재했던 이들, 대대로 내려온 검식(劍式)은 수준이 높습니다. 도련님이 제 제자로서 계승해 주신다면 훨씬 발전하겠죠. 이종족 전사들에게도 밀리지 않는 기사 말입니다!”

“그게 아니라…….”

체육관을 돌아본 나는 바벨을 가리켰다.

“난 나보다 강한 사람의 말만 듣는다.”

“예?”

“데드리프트, 저거 빡세게 들면 내가 너한테 좀 배워 주마. 당연하지만 마력 쓰지 말고. 네 힘과 근성이 감복할 만하면 스승으로 삼아 주지.”

“하하, 저거 한번 드는 게 뭐 어렵다고 그러십니까?”

우로스는 코웃음을 치면서 바벨 앞에 섰다.

“야, 대뜸 들려고 하지 말고. 자세부터 잡아.”

우로스가 덩치가 있고 근육이 있지만 배도 상당히 나왔다.

체계적인 훈련을 한 몸이 아니다.

“자, 이제 무게는 얼마로 할 거냐? 무거울수록 내 존경심도 무거워질 것 같은데?”

“하하, 이 정도는 어떻겠습니까?”

우로스가 자신만만하게 100kg을 채워 넣자 나는 혀를 찼다.

“야, 네 덩치로 장난하냐? 어디서 약을 팔아.”

“……음, 예. 하하하.”

“내 스승? 400kg을 들어도 마음에 안 차는데?”

지구의 세계기록이 500kg을 넘었던가?

내가 계속 무게를 올리자 우로스의 얼굴이 점차 굳어졌다.

300kg.

익숙한 기사라도 쉽게 도전하지 못하리라.

하물며 우로스는 자세도 잡을 줄 모르는 놈.

“……으으으음. 이쯤에서 해 보죠.”

“정말? 내 존경심이 이 정도여도 괜찮겠어?”

내가 웃으면서 말하자 우로스는 이를 악물더니 20kg을 더 올렸다.

320kg.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자, 제대로 배까지 들어 올려라. 안 되면 그냥 포기하고.”

“으으음. 으으으음!”

바를 잡은 우로스는 용을 썼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아니, 바가 떨리기는 하는데…… 무리다.

근육양도 모자라고, 요령도 없었다.

“으으음! 으으음!”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나는 손뼉을 치면서 우로스를 독려했다.

아, 남이 노력하는 걸 보면 응원하고 싶어진다니까?

황제 시절에 자주 이랬는데…… 왠지 다들 죽는 얼굴을 하더라.

“끄으응! 크으으윽!”

“무리면 포기하고.”

“아, 아닙니…….”

우로스는 나를 똑바로 보며 힘을 쥐어짜 냈다.

부들부들.

떨리는 팔, 조금씩 바가 올라간다.

그 순간, 내 영안을 통해서 우로스의 아우라가 보였다.

파란색.

우호심이었다.

날 제자 삼겠다는 목표를 가지면서 마음을 연 모양이었다.

아무튼 바로 흡수.

나는 손을 펼쳐서 우로스의 아우라를 빨아들였다.

몸에 감도는 쾌청한 감각.

초능력이 한층 더 강해졌다.

“이 정도면…….”

염동력의 기초는 가능하겠군.

내가 상태를 확인하는데 바를 억지로 들어 올리던 우로스가 비명을 질렀다.

“어, 어어어억!”

뚜두둑!

콰가아앙!

우로스가 바벨을 떨어트리고 뒷걸음질을 쳤다.

휘청거리던 몸, 엉덩방아를 찧고는 숨을 몰아쉰다.

“야, 괜찮아? 설 수 있겠냐?”

“허, 허리가…….”

아무래도 무리하게 하다가 몸 상한 모양이다.

“야! 밖에 아무나 없냐!”

“도, 도련님. 저 아직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소리쳐서 부르자 우로스는 억지를 부렸다.

나는 부드럽게 말했다.

“네 뜻은 잘 알았다. 우로스.”

“도련님, 그러면 저한테 가르침을…….”

“다음에는 350kg에 도전해 보자. 그 무게가 바로 내 존경심이 된다니까?”

의욕은 알겠다만 이제 와서 남의 제자 할 생각은 없거든!

날 애타게 보던 우로스가 고개를 푹 떨어트렸다.

우로스를 기사들에게 맡기고 간단한 유산소운동을 한 나는 방으로 돌아왔다.

늦은 오후다.

“러닝머신이 없으니 그냥 연병장이나 뛰는 수밖에……. 일단 최대한 체력을 기른 다음에 근력운동을 시작할까?”

황제 시절, 지구의 운동기구들을 재현했지만 몇몇은 불가능했다.

카라카스의 문명은 21세기 지구보다 낙후되어 있었다.

황제로서 내가 이것저것 설계하긴 했지만…… 이제 철도가 깔린 정도다.

지금 내 방 안을 밝히는 마력램프도 전기 구동이 아니고.

“역시 전기가 절실한데. 전기를 발명해야 빠른 근대화가…….”

마력램프를 툭툭 치며 생각하던 나는 흠칫했다.

카라카스의 문명 발전에 고심할 필요가 뭐 있지?

“나 아닌 누군가가 알아서 하겠지! 암!”

일만 죽도록 하다가 환생했는데도 또 일하랴?

그냥 몸이 너무 허약하니 체력, 마력, 초능력을 강화해서 사람 구실만 할 정도로 강해질 작정이었다.

이후로는 쉬고, 놀고먹을 생각이고.

“이제 와서 검술은 무슨.”

나, 시릭 카라카스는 살아 있을 적에 인류 최강이었다.

100년이 흐른 사이에 강한 놈이 나왔나 궁금하다만…….

“에라, 일단 초능력부터.”

나는 침대 위에 꽂혀 있던 책을 향해 손을 뻗었다.

“으으음.”

바로 되진 않았지만 힘을 짜내자…… 책이 둥실 떠올랐다.

컨트롤, 컨트롤.

염동력은 초능력의 기초지만 미세한 컨트롤이 어렵다.

중력 때문이다.

만물을 떨어트리려는 절대적인 힘.

염동력은 그 중력의 속박을 이겨 내고 사물을 휘두르는 것이니까.

내가 정신을 더욱 집중하자, 책이 둥실둥실 위아래로 흔들리면서 내게 날아왔다.

“조금만 더……. 끄으으윽!”

착!

잡았다!

내가 기뻐하는데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리면서 사람이 뛰어 들어왔다.

“도련님!”

메이드 아멜리아였다.

굉장히 놀랐는지 은회색 늑대 귀가 뾰족하게 서 있고, 메이드복에서 빠져나온 꼬리도 꼿꼿하게 서 있다.

“넌 뭐 노크도 없이 들어오냐? 이러다 애 떨어지면 책임질 거야?”

내가 능청을 부리는데 아멜리아가 급히 말했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기사장에게 큰 봉변을 당하셨다고요?”

“뭐?”

아멜리아는 내 상태를 위아래로 살피고는 좀 표정을 풀었다.

경악, 당황의 노란색 아우라가 녹색으로 바뀌어 간다.

“……다행히도 다치신 곳은 없나 보군요.”

“그냥 운동하고 끝이었는데. 뭔 소문을 들은 거야?”

“그게…… 막내 도련님과 기사장이 서로 시비가 붙었다고 들었습니다. 기사장이 허리가 나갈 정도로 큰 부상을 입었다고 하고요.”

아멜리아는 지나치게 당황했던 게 부끄러웠는지 얼른 표정을 굳혔다.

늑대 귀와 꼬리도 살살 누그러진다.

“그래서 도련님도 크게 다치셨나 했습니다.”

“그냥 기사장하고 근육 증진을 했지.”

“…….”

아멜리아는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기사장이 크게 다쳤다는데 정작 허약 체질인 나는 무사하니 앞뒤가 안 맞는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나와 기사장은 싸운 게 아니라 그냥 운동 같이 했어. 그러다가 기사장이 무리해서 허리가 나간 거고.”

“……그렇습니까?”

“그렇다니까. 너도 조심해. 운동은 계획적으로 해야 한다.”

아멜리아는 가슴께에 손을 올리고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온 그녀가 일렀다.

“도련님, 오늘 저녁 식사에 참석하라는 백작님의 분부가 있으셨습니다.”

“지금까지는 계속 거절했지?”

“……애당초 부르지도 않으셨죠.”

백작은 내가 엘프어를 술술 읽는 걸 보고는 선입견을 바꾼 모양이었다.

그 이후로 꾸준히 초대하고 있었는데 내가 몸이 아직 불편하다는 핑계로 거절했고.

아멜리아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키지 않으시다면 제가 또 거절하겠습니다.”

“어떻게 둘러대게?”

“기사장과 운동을 한 직후라서 녹초가 되었다고 둘러대겠습니다.”

“여전히 정직하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가족끼리 마주 앉아 하는 식사.

생각해 보면 나도 그런 자리가 오래됐다.

황제가 혼밥 하냐고?

이런저런 이유로 황후들을 멀리하면서 그렇게 됐지.

“큰형이 나 싫어하냐?”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될까요?”

“늘 솔직하잖아.”

“이 백작가에서 도련님을 좋아하는 분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뭐야, 아멜리아도 나 싫어해? 흑흑.”

내가 우는 시늉을 하자 아멜리아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애써 표정을 감추지만 당황한 게 보인다.

“전 도련님을 싫어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나무라고 꾸짖는 건 언제나 도련님이 엇나간 행동을 하셔서…….”

“엉엉. 훌쩍훌쩍. 아멜리아가 나 싫어한대. 울어야지. 울어 버려야지!”

“……도련님, 체통을 지켜 주세요.”

황제 시절에도 많이 들었던 말이지만 당연히 무시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내가 계속 장난을 치자 아멜리아는 난감해했다.

“……적어도 최근의 도련님은 달라지신 것 같습니다.”

“걱정 마, 이렇게 울고 내일모레면 또 밖으로 뛰쳐나가서 임자 있는 여자 꼬시다가 흠씬 두들겨 맞을 테니까.”

“…….”

“농담이니까 경계하지 마. 여기가 백작가라면 마력약 정도는 있겠지?”

내가 이야기를 돌리자 아멜리아가 물었다.

“마력약이라면…… 사람에게 마력을 깨우치게 하는 영약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거.”

먼 옛날, 인간은 마력을 사용할 수 없는 종족이었다.

하지만 마력약을 마시고, 체내에 마력이 깃든 인간이 자손을 보면 그 자식은 날 때부터 마력을 타고난다.

이런 계승을 거치면서, 인간 중에서 마력을 쓸 수 있는 이들이 늘어났다.

또 거기서 한 걸음 나아가서, 마력이 다음 세대, 핏줄로 쭉쭉 이어진다.

그게 바로 귀족 가문이었다.

모든 귀족은 마력이 있다.

그런데 정작, 이 리젠 리브라타는 백작의 아들이라면서 마력이 한 방울도 없었다.

처음에는 의아해했는데 조금 짐작 가는 게 있었다.

아멜리아는 한참 생각하곤 말했다.

“집사님에게 물어보면 좀 더 확실해지겠지만…… 재고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마력약은 귀중품, 백작님의 허락 없이는 반출할 수 없습니다.”

“아, 훔쳐 먹을 생각은 없어. 그냥 달라고 할 거야.”

“음, 도련님. 외람된 말씀이지만…….”

“아멜리아는 언제나 직언만 하잖아? 얼른 푹푹 찔러 봐.”

내가 웃자 아멜리아는 저어하면서 말했다.

“큰도련님이 반대하실 겁니다. 마력약은 귀중품인데…….”

“자기가 먹을 영약을 무능한 막내인 나한테 넘겨주지 마라? 뭐, 그거?”

아멜리아는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나도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그럼 오늘은 쉬고 내일 저녁 식사에 참가한다고 전해.”

“예?”

“가족이 밥 먹는 자리에 아버지도 나오고 큰형도 나오겠지?”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가서 달라고 하지, 뭐.”

집안 재산 좀 축내 보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