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5)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니라고
다음 날.
나는 이른 아침부터 기사들의 훈련장으로 향했다.
일단 체육관 건물부터 가 보자.
벌컥!
“아무도 없네?”
들어가니 내가 처음이었다.
운동기구들을 둘러본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먼지 봐라.”
바벨, 덤벨, 철봉 할 것 없이 먼지가 앉았다.
척 봐도 관리가 안 되어 있었다.
“보물이 썩네, 썩어…….”
나는 한숨을 쉬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샌드백도 없네. 이래저래 후진데?”
황제였던 나는 제국군의 단련을 위해서 지구의 운동기구들을 제작하고 배포했다.
하지만 이 북쪽 변방까진 미치지 못한 모양이다.
“없는 거라도 써야지.”
구석에 있던 걸레를 찾아낸 나는 청소를 시작했다.
굴러다니는 도구들을 좀 정리하고 아령을 닦던 나는 멈칫했다.
“……아니, 나 도련님이잖아?”
전직 황제이자 현직 귀족 도련님이 왜 손수 청소하지?
아무튼 기왕 시작한 일이다.
내가 제작한 훈련 기구들을 만지고 있다 보니 옛날 추억이 떠오르고 그립기도 하다.
적당히 닦기만 했는데도 시간이 훌쩍 갔다.
“후, 이것만 해도 지치네…….”
노곤해져서 앉아 있는데 밖에서 함성 소리가 들린다.
내가 밖을 살펴보니 연병장에 기사들이 모여 있었다.
기사 둘이 서로 대련하고, 구경하는 모양이었다.
“흠, 100년 사이에 검술은 발전했으려나?”
궁금해진 내가 다가가면서 살폈다.
나를 돌아본 기사들은 눈살을 찌푸리고는 고개를 홱 돌렸다.
인사도 안 하는 것들.
노골적인 무시였다.
“얼씨구.”
그냥 웃음이 나오네.
얼간이라도 섬기는 집안의 도련님 아닌가?
그런데도 이런 반응이라니.
기사들은 원래의 리젠을 아주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황제로서 늘 찬사와 환성만 듣던 나로선 외려 좀 신기하기도 했다.
그러니 일단 놔두고 대련하는 이들을 살폈다.
“흡!”
“합!”
갑옷을 입은 기사 둘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붉은 마력이 뿜어져 나온다.
치열한 검놀림.
내가 가만히 보고 있자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들린다.
날 향한 시선들.
애새끼가 뭘 알긴 알겠냐고 무시하는 건 알겠는데…….
“왜 저런 쇼를 하지?”
어이가 없네.
100년 사이에 무술은 얼마나 발전했나 기대했는데…… 헛짓하잖아?
갑자기 조용해졌다.
모두들 나를 본다.
겨루던 기사 둘도 멈춰서는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허허허, 허허허허.”
앉아 있던 기사 하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머리 반은 벗겨진 남자, 그가 다가오며 말했다.
“이거 막내 리젠 도련님 아니십니까? 또 계집질하다가 칼 맞았다고 들었는데 살아나셔서 참 다행입니다.”
“넌 말을 그따위로 하는데 살아 있는 게 다행이고.”
“하하, 제가 좀 입이 거칠기는 합니다만…….”
놈은 나한테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는 으르렁거렸다.
“그런데 방금 뭐라고 씨불이셨습니까? 우리 애들이 약하다고요?”
“그럼 저걸 강하다고 하겠냐? 마력 낭비하는 게 보이는데?”
“허허허허, 뭐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 보네요. 허허허, 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누구시더라?”
내가 짝다리를 짚고 불량하게 말하자 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리브라타 기사단을 지휘하는 기사장, 우로스입니다. 죽다 살아나시는 바람에 기억까지 날아가셨나 보네?”
여기저기 터지는 웃음소리.
기사장이 나에게 으르렁거리는 걸 손뼉 치면서 반기는 모양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 머리 반이나 벗겨진 기사장. 마침 만난 김에 하나 묻고 싶은 거 있는데, 체육관의 운동기구들 왜 관리 안 하냐?”
“그게 뭐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주 많지. 아주.”
체력은 국력이다.
한국에서야 표어지만 카라카스에서는 진짜였다.
칠죄신과의 전쟁은 아주 치열했고, 체력 단련으로 생사가 오간다.
내가 헬창이라서 몸을 만든 게 아니다.
마력이 다 떨어지면 근력과 지구력, 체력이지.
물론 나야 마력이 끝도 없었지만 일반 병사들은 그게 아니잖은가?
“마력을 제대로 다루려면 체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제국군 교본 첫 장에 나와 있지 않나?”
“제국군? 지금 그런 잡놈들 책 좀 봤다고 절 가르치려고 하시는 겁니까?”
그 잡놈들의 창시자이자 총수가 바로 나다.
하지만 다른 기사들도 하나같이 우로스의 의견에 동조하는 투였다.
생각해 보니 제국군과 귀족들의 사병은 서로 견원지간이었다.
“아, 그거네. 제국군 엿 먹어라, 니들은 니들 방식이 있다 이거냐?”
“그렇게 잘 아시면 얼른 돌아가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이러다 확 받아 버릴지도 모르니까.”
우로스가 위협적으로 말했다.
뭐 원래 이 몸의 주인이라면 오줌이라도 지렸겠지만…… 지금의 나는 웃음만 나온다.
“공교롭게도 나는 저 체육관을 좀 써야 해서. 회원 등록은 너한테 하면 되나?”
“……말귀를 못 알아들으시네, 도련님.”
“제대로 존대해, 새꺄. 갈아 버린다.”
나는 목소리를 바꿔서 으르렁거렸다.
“은근슬쩍 말 까는데, 나는 귀족이고 너는 그 아랫놈이다. 위아래는 확실하게 해야지? 반 남은 머리까지 싹 털려 봐야 정신 차릴래?”
“…….”
내가 감정을 실어서 이르자 다른 의미의 침묵이 감돌았다.
우로스 역시도 굳어서는 눈도 깜빡거리지 못했다.
포효(Roar).
초능력으로 목소리를 변모, 내 존재감을 일시적으로 강화하는 것이다.
황제 시절에는 군대의 사기 진작을 위해서 썼는데.
지금 내 초능력은 풋내기지만 이건 기본 중의 기본이라서 쓸 수 있었다.
“……말 하나는 거창하게 하시는군요.”
우로스는 두 걸음 물러나서는 나를 살폈다.
순간 압도당하고는 이유를 스스로도 몰라서.
내가 대꾸했다.
“행동도 거창하지. 어쩔래? 한판 뜰까?”
“진심이십니까?”
“대신 룰은 내가 정한다. 10초 대결, 무기는 양쪽 다 목검, 마력은 사용하지 않는다. 한 대라도 맞히면 승리, 어때?”
우로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목검이라도 맞으면 몸이 상하고 심지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안 하겠다고?”
“도련님, 제가 다소 무례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사과드릴 테니 그냥 돌아가시죠.”
우로스는 진지하게 권했다.
목검이라도 잘못 맞았다가는 훅 갈 수 있었다.
썩어도 준치라고, 백작가의 도련님이다.
큰 상처라도 입혔다가는 문제가 커진다.
“너희들이 약해서 못 싸우겠다고?”
“…….”
다른 기사들의 안색이 변했다.
원래 기사들은 모욕에 민감하다.
우로스도 부하들의 분위기를 읽고는 한숨을 푹 쉬었다.
“……정 그러시면 상대해 드리겠습니다. 가룰! 자네가 맡게!”
“…….”
아까 대련했던 젊은 기사가 벌떡 일어났다.
나는 우로스를 보며 말했다.
“아, 내가 이겼을 때 조건을 안 말했네. 내가 이기면 앞으로 체육관 기구들은 매일 청소해라. 먼지 하나라도 나오면 그냥 안 넘어간다.”
“이긴다면 그렇게 조치해 드리죠.”
“그리고 제대로 존대해라.”
나는 우로스를 노려보며 경고했다.
나는 황제치고는 허물없이 굴었지만 기어오르는 건 놔두지 않았다.
민주주의? 만민평등?
카라카스에서 사선을 넘나들면 그딴 소리 절대 안 나온다.
위아래는 확실하게.
그게 서로 편하다.
우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룰에게 이긴다면 정말 제대로 존중해 드리겠습니다.”
“좋아.”
나는 연병장에 비치되어 있던 목검을 골라잡았다.
하나는 길고, 하나는 짧은 것.
“이도류?”
“겉멋이잖아? 이도류를 어떻게 써?”
“막내 도련님이 검 휘두르는 거 본 적 있어?”
“없지. 단 한 번도.”
“누구에게 걸래?”
“야, 내기가 어떻게 성립되냐?”
뒤에서 수군거리는 기사들의 목소리.
나는 무시하고는 손안의 감촉을 확인했다.
양손에 목검을 든 내가 자리에 서자 상대 기사도 바로 섰다.
기사들도 물러나서는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았다.
우로스가 말했다.
“미리 말했지만 10초입니다. 몸에 한 군데 닿기라도 하는 순간 바로 승리입니다. 10초 동안 결판이 안 나면 무승부로 하겠습니다.”
사실 우로스로서는 이 판을 벌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 내가 죽기라도 했다가는 큰 문제가 될 테니까.
마력 사용 금지, 목검에다가 시간제한까지 걸어서 겨우 허락한 거다.
이런 걸 왜 쏙쏙 아냐고? 그야 황제가 되고 나서는 대련 한번 제대로 못 했으니까.
내가 몸 좀 풀려면 다들 기겁하고는 말렸거든.
“시작!”
“…….”
우로스의 외침, 가룰은 눈살을 찌푸리고는 그냥 서 있었다.
괜한 광대질에 어울려 줬다는 표정인데…….
나는 주저 없이 뛰어들었다.
왼손의 검을 던지면서, 오른손의 검을 휘두른다!
빠아아악!
상쾌한 소리.
움찔하면서 피하려던 가룰의 머리에 내리치기가 명중!
비틀거리던 몸이 풀썩 쓰러졌다.
정적.
“뭐, 뭐야…….”
“저래도 되는 거야!”
“어, 어어……. 가룰? 가룰?”
다들 기막혀하고 있었다.
우로스도 입을 크게 벌리고 나를 보고 있었다.
눈도 깜빡거리지 않는다.
“한판, 끝이지?”
“……기, 기사장님.”
“이게 말이 됩니까? 비겁합니다!”
다들 아우성을 치자…… 나는 숨을 들이쉬고는 고함을 질렀다.
포효.
“져 놓고 징징거리지 마라!”
“…….”
혼란스러워하던 기사들이 깜짝 놀라서는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초능력을 발휘하면서 쏘아붙였다.
“병사와 기사의 차이가 뭔가? 병사와 다르게 기사는 말을 타고 갑옷을 걸친 자, 누구보다 앞서 싸우고 병사의 방패가 되어야 하는 자 아닌가? 그런 놈들이 대가리 깨져 놓고는 너무하다고 따질래?”
“…….”
“내가 너희들이 약하다고 한 이유가 뭐냐고? 칼 휘두를 때마다 마력이 번쩍거려? 실전에서 그렇게 마력 펑펑 낭비하면서 싸울 기회가 주어질 줄 아냐? 대가리 깨지면 끝이야.”
인간이 드래곤도 아니고 마력이 무한할 리가.
좀만 싸우면 다들 허덕거린다.
그러니까 내가 제국군의 기본을 체력 단련으로 잡은 것이다.
다들 침묵하자 나는 포효를 끄고는 이젠 부드럽게 말했다.
“방금 내가 사용한 건 제국군 이도류 교본 첫 장에 나와 있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실전에서는 적의 정보가 없는 법, 칼을 날리고 시작하면 우선권을 가질 수 있다.”
“…….”
“대련이라고 방심하지 말고, 적이 약하다고 얕보지 마라. 어린애 손에 쥐어진 칼이라도 맞으면 죽는다.”
기사들의 침묵.
하지만 분위기가 변한 게, 좀 알아들은 눈치였다.
침묵하던 우로스가 조용히 말했다.
“우리가 졌습니다. 앞으로 애들을 시켜서 체육관을 잘 정돈하겠습니다.”
“그래. 그러면…….”
“잠깐 드릴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리를 옮길 테니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
우로스의 눈빛.
날 비비 꼬던 때와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공손하게.
내가 수락하자 우로스는 체육관으로 들어왔다.
그는 내가 닦아 놓은 운동기구들을 보고는 감탄했다.
“히야, 완전히 깔끔해졌군요.”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유지해야 해. 관리 제대로 하고. 애들 운동하는 분위기 조성해라.”
“예. 그리고 드릴 말씀은…….”
우로스는 극히 공손해져서는 말했다.
“실은 큰도련님에게 청을 받았습니다. 막내 도련님의 코를 좀 납작하게 해 달라고요. 여차하면 위해를 가해도 된다고요.”
“그래?”
얼굴 본 적도 없는 장남이 나를 엿 먹이려고 했다고?
하긴 우로스의 언동은 주가(主家)에 대한 것치고는 좀 지나치긴 했다.
장남의 사주가 있어서 벌어진 일이리라.
우로스가 나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전 별로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도련님을 적당히 내쫓으려고 했던 겁니다.”
그야 이 몸, 리젠은 비실비실한 약골이니까.
어린애를 조지는 것 같아서 우로스는 영 안 내켰던 모양이다.
“알았다. 그런데 나한테 이걸 밝히는 이유가 뭐지? 모르긴 몰라도 장남이 나보다 훨씬 잘났을 텐데?”
이렇게 미주알고주알 다 밝히면 우로스 입장이 난처해질 텐데?
그러자 우로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손을 좀 보여 주시겠습니까?”
“손뼉이라도 치자고?”
나는 주워섬기면서도 내밀었다.
하얗고 긴 손가락, 피아노 치면 딱이다.
우로스는 내 손을 살피고는 말했다.
“제가 알기로는 도련님은 검을 잡아 보신 적도 없습니다. 실제로 손에 그런 흔적이 전혀 없군요.”
“그런데?”
“방금 대련에서 보여 주신 발놀림, 검놀림은 정말 탁월했습니다. 체중 이동은 물론이고…… 타점, 호흡까지. 하나도 어긋남이 없었습니다. 설사 저라도 막지 못했을 겁니다.”
그야 내가 했으니까.
나, 시릭 카라카스는 제국군의 창시자이면서도 일선에서 싸웠다.
총사령관이지만 내가 나서야 해결되는 구간이 너무 많았지.
하여튼 알아보는 우로스도 눈썰미는 있었다.
“보면서도 눈을 의심했습니다. 정말 천부적인 재능이십니다. 그래서 말인데…….”
우로스가 진지하게 말했다.
“제 제자가 되어 보시지 않겠습니까?”
야, 반대 아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