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4)
환생도 해 본 놈이 잘하지
문맹.
현대 지구, 한국에서야 글자야 다들 읽고 쓰는 것이다.
하지만 카라카스는 험한 곳이다.
먹고살기도 벅찬데 글자 배울 시간이 어딨냐?
거기다 각 종족마다 쓰는 글자들이 판이한데, 다른 종족들에게는 안 가르쳐 주는 일이 많았다.
내가 공용문자를 반포했어도 좀처럼 뿌리내리지 못했고.
아무튼 백작과의 단판 승부.
나는 책을 들고는 읽어 내렸다.
“나무 아래에서는 헐떡거리는 신음만이 울려 퍼진다. 대낮, 그것도 마을의 정령수 아래에서 스커트를 걷어 올리고 벌이는 정사라니. 아일렌은 몸서리를 치면서도 뜨겁게 젖어 버린 걸 깨닫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부끄럽고 망측한 일이지만 이런 자리에서…….”
“뭐 하는 거냐!”
백작이 노호성을 지르자 나는 얼른 물러났다.
혹시나 또 때릴 것 같아서 미리 거리를 두길 잘했다.
“읽으라고 해서 읽고 있잖아요?”
“이 미친놈이 어디서…….”
“아, 진짜라니까요.”
나는 책을 덮고는 흔들어 보였다.
“이거 도색 서적이라서요. 엘프들도 성욕이 있으니 풀어야 하잖아요?”
“……뭐?”
“엘프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하고 잘 팔리는 책이에요. 작가가 손이 느린 걸로 유명하죠. 지금 이건 최신간인 6권인데 50년 전에 나왔네요.”
나는 책을 흔들면서 말했다.
“왜 저택 서재에 있느냐? 다들 이게 도색 서적인 줄 몰랐으니까. 왜 하필 이걸 읽고 있느냐? 사내놈은 야한 거라면 의욕이 고취되니까.”
“…….”
“외국어 공부는 그 나라 사람하고 섹스 파트너 하는 게 제일 빠르다니까? 진짜루?”
백작은 어이없어하면서 나를 노려보았다.
아들이 아니라 웬수를 보는 시선.
“아비를 능멸하는 것도…….”
“백작님. 서기관을 데려왔습니다.”
그때 서재 문이 열리고 아멜리아가 들어왔다.
따라 들어온 건 안경을 쓴 남자.
잠깐 나간다 싶더니만 눈치 좋게 심판을 불러온 모양이었다.
화내던 백작이 돌아보고는 말했다.
“멜콘! 저놈이 들고 있는 책 좀 읽어 보게!”
“예? 알겠습니다.”
멜콘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나를 향해 다가왔다.
나한테 책을 받은 그는 한참 진중하게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어, 이게……. 나무 아래에서……. 아니, 수풀 근처?”
“뮌프는 일반적으로 쓸 때는 수풀이지만 정관사가 붙으면 나무입니다.”
“아, 그러니까 나무 아래에서 얽히는……. 아니, 음, 소리. 신음 소리…….”
멜콘은 끙끙거리면서 읽고 있었다.
해석이 능숙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신음 소리가 퍼진다. 아니, 울린다?”
“울려 퍼진다죠. 탁점이 두 개 붙었으니 붙여서 동시 해석해야 합니다.”
내가 조언을 하자 멜콘은 고개를 끄덕이면 읽어 나갔다.
듣던 백작의 얼굴이 묘하게 변해 가기 시작했다.
“……뭐냐? 진짜로 읽을 줄 아는 거냐? 멜콘을 매수한 게 아니고?”
“이야, 보고도 못 믿으시니 너무하신다, 아버지.”
얼간이 아들이 갑자기 문자를 깨쳤다기보다는 서기관을 매수했다고 의심하다니.
이 몸의 원래 주인, 리젠은 어지간히 신뢰받지 못한 모양이었다.
“후우, 나무? 정령수 아래에서…….”
“그만, 됐네. 멜콘, 이만 나가 보게.”
“예, 예.”
나는 책을 돌려받고는 빙긋 웃었다.
백작은 나를 믿기지 않는 눈으로 보았다.
“……설마 문자를 익혔다고? 그것도 엘프어를?”
“하다 보니 되더라고요.”
“…….”
백작은 신음을 흘렸다.
곧 그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는 말했다.
“……좋다. 약속은 약속이다. 바라는 걸 말해라.”
“그 전에 사과부터 해 주시죠.”
“알겠다.”
백작은 눈을 감더니 머리를 정중하게 숙여 보였다.
“내가 순간의 착오로 너에게 손을 올리고 말았구나.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게 주의하겠다.”
“……아닙니다.”
아, 이거 막상 정중하게 사과받으니 좀 그러네.
잘잘못이 가려지자 자기 자식에게도 머리를 숙이는 백작도 보통 인물이 아니고.
왠지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나도 덧붙였다.
“저도 이래저래 문제 많이 일으켜서 죄송했습니다.”
“됐다. 지나간 일은 덮어 두겠다. 그래서 내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제가 호위가 필요해서 기사 중에서 하나 고르겠습니다. 허락해 주시죠.”
“호위?”
백작이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거라면…….”
“내가 워낙 추잡한 짓을 하고 다닌다고 기사들이 호위를 안 하려고 한다는 것쯤은 압니다. 백작님도 처음에는 붙여 주셨다가 그냥 눈감아 버리셨다고요?”
그러니까 임자 있는 여자 건드리다가 맞고 다니고 사경을 헤매지.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냥 제가 알아서 할 테니 기사들에게 말이나 전해 주시죠.”
“……기사장에게 말은 전해 두겠다. 한데 정말로 그걸로 괜찮으냐?”
“이거면 충분합니다.”
백작의 주변에서 흘러나오는 감정은 주황색.
보다 묵혀 놨다가 흡수하는 게 효율이 좋다.
백작은 의아하게 나를 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내가 기사장에게 따로 말해 두마.”
“감사합니다.”
“그래, 그럼…….”
백작은 몸을 돌리려다가 멈칫하고는 나를 보았다.
“……때려서 미안하다, 리젠.”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백작은 빠른 걸음으로 나가 버렸다.
그 등을 보고 있자니 묘한 감정이 몰아친다.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얼굴은 괜찮으십니까?”
아멜리아가 다가와서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나는 웃으면서 얼굴을 만져 보였다.
“왜? 아버지에게 고자질한 게 미안해서?”
“…….”
“농담이야. 오히려 눈치 좋게 서기관을 불러와 준 게 고마운데.”
이 몸의 원래 주인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영 아니었다.
언제 사고 칠지 모르는 놈.
아멜리아는 막내의 감시역이었지만 또 걱정해 주고 있었다.
나는 기지개를 켜면서 말했다.
“아, 아무튼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씻고 저녁 먹고 쉬어야지.”
“저기 그게…….”
“응?”
내가 돌아보자 아멜리아가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도련님도 이제 저녁 식사 자리에 참석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백작님에게 이야기를 올릴까요?”
환생 이후, 나는 지금까지 방에서 따로 밥을 먹었다.
명목은 회복 기간이었지만 사실 그것만이 아니다.
백작의 가족들이 모이는 식사 자리에 부름을 받지 못한다는 건 일종의 괄시였다.
“아니, 지금은 됐어. 지금 참석해 봐야 모욕이나 받겠지?”
“…….”
“이야, 아니라고는 안 하네.”
내가 웃자 아멜리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백작의 자식들을 키웠다는 이 메이드는 입에 발린 소리는 안 했다.
나는 몸을 풀며 말했다.
“같이 밥 먹는 건 사람 구실 좀 하고 나서지. 일단 내일 기사들 훈련장부터 가 보고.”
“저기, 죄송하지만…….”
“기사들 역시도 날 경멸할 거다, 뭐 그런 거?”
아멜리아는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이 부리는 기사들.
하지만 그들은 난잡하고 추잡하게 사는 막내, 리젠을 멸시했다.
“뭐, 그들의 마음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사실 난 호위를 고르러 가는 게 아니거든?”
“예?”
나는 팔을 들어서 이두박근을 강조해 보였다.
비실비실한 몸이지만 아무튼.
“몸짱 되러 간다.”
“…….”
“기사들 훈련장에 각종 운동기구 있을 거 아냐?”
내가 황제가 돼서 세운 업적 중 하나는 체계적인 훈련 기구를 만든 것이다.
쉽게 말해서 헬스장이다.
근손실 복구해야지.
“……도련님, 팔에 힘주셔도 아무것도 안 나오는데요.”
“3개월 뒤에 두고 보자고.”
내 호언장담에 아멜리아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웃음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는 얼굴.
내 시선에 그녀는 얼른 엄숙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행여나 자기가 비웃었다고 오해 살까 봐 우려하는 눈치였다.
뭐, 난 오해하지 않았지만.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아우라는 녹색, 호의였으니까.
“……그럼 저녁 식사는 어제처럼 방으로 가져다 드리면 되겠죠?”
“맛있는 걸로 부탁해.”
“주방장은 제가 아닙니다.”
아멜리아가 몸을 돌리자 나는 손을 앞으로 뻗었다.
정신을 집중하자, 그녀가 뿜고 있던 녹색 기운이 내 손으로 빨려 들어왔다.
“후우우우…….”
몸을 휘도는 충만한 감각.
좀 살 것 같다.
아멜리아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고 걸어 나가서는 문을 닫았다.
“역시 이게 낫군.”
내 초능력은 나에게 마음을 연 타인의 정신을 흡수해서 강해진다.
부정적인 감정도 흡수할 수 있지만 효율이 별로다.
나를 존중하고 호의를 품은 정신을 흡수하는 게 훨씬 연비가 좋았다.
아멜리아도 저번처럼 실신하지 않았고.
“자, 그러면…….”
나는 플랭크를 취하고는 책을 내려다보았다.
괴로운 자세에 다리가 떨리고 숨결이 가빠진다.
하지만 나는 굴하지 않고 버티면서, 배 속 깊은 곳에서 정수리로 끌어 올리는 걸 이미지 했다.
팔락.
그러자…… 책 페이지 끝자락이 팔락거린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다음 장부터는 더 야한 게 나올 거야!
“크으으으윽!”
파라라라락!
내가 안간힘을 쓰자 페이지가 정신없이 넘어가더니만 책이 확 뒤집혔다.
털썩!
“헉, 허어어억. 허어어억.”
몸의 한계까지 버티면서 정신을 짜냈는지라 녹초가 되었다.
나는 숨을 몰아쉬면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고작 책장 넘기기지만, 염동력을 발휘했다.
초능력은 일단 이 정도고…… 다음에는 육체와 마력이다.
“좋아, 내일은 몸 만들러 가 볼까?”
* * *
리브라타 본가의 방.
잘생긴 청년이 어이없어했다.
“리젠이 엘프어를 읽었다고?”
“예, 예. 문법도 정확합니다. 저보다 훨씬 더 뛰어났습니다.”
머리를 조아리는 건 서기관인 멜콘이었다.
청년은 혀를 찼다.
“속임수 아닌가? 엘프들은 자기들의 문자를 함부로 가르쳐 주지 않잖아? 우리가 엘프들의 책을 사들이는 거야 전시용이고. 우리 가문에서 엘프어를 익힌 자는 없었을 텐데? 대체 언제 배운 거지?”
“경위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확실합니다.”
멜콘이 덧붙였다.
“백작님이 말씀하시기를 막힘없이 술술 읽었다는데, 정말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 말대로라면 아카데미의 언어학과에서 수석을 차지할 겁니다.”
“아버님이 마음에 들어 하셨다고?”
청년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버님이 뭐라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말해 봐.”
“그게…… 꽤 만족하신 것 같았습니다. 기사도 붙여 주시겠다고 했고요.”
“기사? 누구를?”
“막내 도련님이 직접 고르시겠다더군요.”
청년은 턱을 만지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놈이 좀 나대는 모양이로군.”
“신경 쓰실 게 있겠습니까? 기사들도 막내 도련님을 좋아하지 않는데요.”
“아니,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야.”
청년이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 가문은 엘프들과 친교를 맺고 있지. 나도 엘프들의 문자를 익히려고 노력했지만 너무 어려워서 포기했는데 막내 놈이 엘프 문자를 익혔다는 게 알려져 봐. 장남인 내 체면이 대체 뭐가 되겠나?”
“으음…….”
“설마 그놈이 그런 술수를 부릴 줄은 꿈에도 몰랐군. 엘프들에게 아첨이라도 할 셈인가?”
“확실히 엘프들의 문자를 술술 읽는 인간은 드무니까요. 엘프들도 달리 보지 않을까 합니다.”
청년이 나직하게 말했다.
“설마 그놈, 엘프의 힘을 빌려서 나를 제칠 생각인가?”
“……솔직히 말씀드리면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리브라타 백작가는 엘프의 후원을 받고 있잖습니까? 그들이 막내 도련님을 지지하면 이야기가 복잡해집니다.”
“…….”
생각하던 청년이 날카롭게 말했다.
“기사장에게 내가 좀 보자고 전해. 은밀하게.”
“예?”
“주제 좀 알게 해야겠어.”
리브라타 가문의 장남.
로데릭 리브라타의 결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