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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고인 황제놀음-3화 (3/230)

두 번 고인 황제놀음 (3)

옹알이라도 해 드려야지

리브라타 백작가.

백작의 집무실에서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의자에 앉은 건 중년 남자.

리브라타 백작가의 가주, 엘런 리브라타였다.

영지 시찰을 마치고 막 돌아와서는 보고를 받는 중이었다.

“그래, 리젠 놈이 깨어났다고?”

“……예.”

서서 공손히 대꾸하는 건 늑대 수인 아멜리아였다.

메이드지만 단순한 메이드가 아니다.

백작의 자식들을 어린 시절부터 돌본 그녀의 발언권은 상당했다.

백작도 그녀를 신뢰했고.

“쯧. 죽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지만…… 도무지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겠군. 그놈은 대체 누굴 닮아서 그럴까? 여색을 밝히는 건 넘어갈 수 있다. 남자라면 그럴 수 있지. 물론 장남이라면 정결해야겠지만 그놈은 막내야. 좀 눈감아 줄 수 있어.”

“…….”

“한데 왜 애인 있는 여자에게만 흥미를 보이는 건가? 아, 그것도 안 들키면 몰라! 매번 들켜서 두들겨 맞기나 하고. 이번에는 사경까지 헤맸으니…….”

백작은 치를 떨었다.

황위에 도전할 자격을 가진 12가문, 그 이름에 매번 먹칠하는 게 막내인 리젠이었다.

“마력이 없어? 그럴 수 있어. 검술? 못할 수 있어. 학문? 못할 수 있어! 하지만 최소한 사고는 치지 말아야지! 황도의 원탁회의가 코앞으로 다가온 마당에 지 형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이런 멍청한 짓으로 집안 망신이나 시키고 말이야!”

“…….”

“후우우우. 그래도 살았다니 다행이긴 하군. 일단 자네가 좀 옆에 붙어서 철저하게 감시해 주게.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아멜리아가 대답했다.

“가주님의 말을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응? 뭐지?”

아멜리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리젠 도련님이 글을 읽을 줄 아십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 자네도 잘 알잖아? 학문하기 싫다고 매번 밖에 놀러 다니던 놈인 거.”

카라카스의 문자 체계는 복잡하다.

각 종족의 말은 통하지만 문자들은 독자적으로 발전했다.

천년제국이 세워지고 그 문자 체계를 하나로 묶고, 교육기관을 만들었지만 여전히 문맹률이 높았다.

아멜리아가 말했다.

“그런데 도련님이 책을 읽을 줄 아시는 것 같습니다.”

“뭐라고?”

백작이 깜짝 놀랐다.

아멜리아는 송구해하면서도 말했다.

“한두 권 읽으신 것도 아닙니다. 오늘은 아침부터 서재에 들어가 계십니다.”

“자네가 허튼소리 할 자는 아니다만, 믿을 수 없군. 속은 게 아닌가?”

아멜리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저도 그걸 잘 모르겠습니다. 공용어만이 아니라 엘프의 책들까지 바로 읽고 저한테 설명해 주셨는데…….”

“그 무슨…….”

백작은 어이없어했다.

엘프들의 문자는 어렵다.

읽을 수 인간은 소수였다.

백작도 젊은 시절에 공부하다가 포기했고.

그 엘프 문자를 리젠이 술술 읽는다고?

“속임수겠지? 사기 치고 있는 거야.”

백작은 자기 아들 일인데도 믿지 않았다.

리젠의 지난 행적을 보면 당연했다.

백작은 이를 갈며 일어났다.

“내가 시찰을 마치고 돌아온다는 걸 알고, 미리 수작질을 부린 거지. 가세! 내 가서 그놈을 단단히 혼내야겠어!”

* * *

전생에는 황제였던 시릭 카라카스.

그리고 지금의 이름은 리젠 리브라타.

환생한 지 닷새째인 나는 서재에 있었다.

“아, 힘드네…….”

바닥에 엎드려서 팔꿈치와 발끝으로만 몸을 지탱한 자세.

플랭크다.

그리고 내 턱 아래에는 책이 펼쳐져 있었다.

“크으으윽…….”

나약한 육체의 고통 속에서 책을 노려본다.

넘어가라.

페이지야 넘어가라!

내가 감각을 집중하면서 노려보자 페이지의 끝자락이 움찔움찔했다.

염동력이 약간 발휘된다.

“조금만 더…….”

털버덕!

육체가 한계에 달한 나는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지친 숨을 몰아쉬던 나는 몸을 돌려서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아, 진짜 이거 몸 허약하네…….”

육체 단련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다.

“마력을 쓰려고 해도 몸이 받쳐 줘야 뭐가 되지. 대체 마력이 왜 없지?”

그나마 아멜리아의 정신을 흡수해서 초능력은 약간 발전이 있었다.

책장을 넘길락 말락 할 정도로.

“약해도 너무 약하잖아…….”

환생한 직후, 나는 아멜리아나 다른 사람을 통해서 정보를 입수했다.

이 몸의 원래 주인, 리젠 리브라타는 그냥 얼간이였다.

툭하면 우는소리 하는 허약 체질.

성격까지 찌질하다.

봐 줄 만한 건 얼굴 하나인 막내 도련님.

다 그렇다 쳐도 취미가 고약했다.

영지 안의 여자를 건드리는데 번번이 임자 있는 여자만 유혹했다.

또 그래 놓고 상대 남자에게 들킨다.

자기 여자랑 침대에서 뒹구는 애새끼를 보면?

백작가의 도련님이고 뭐고 없지.

“실제로 이번에 된통 당해서 죽었고…….”

그 몸을 차지한 게 바로 나다.

호흡이 좀 진정되자 나는 머리에 깔렸던 책을 눈앞으로 가져왔다.

“그래도 책 읽을 시간 많아진 건 좋네.”

이 세계, 카라카스에는 놀 거리가 별로 없었다.

지구에서야 전자게임을 하고, 만화를 보고, 방송을 보면서 치킨을 뜯지만, 근대 문명에 그런 게 있겠냐?

황제인 나도 즐길 수 있는 게 독서, 연극 관람, 사냥 정도였다.

그중에서 가장 괜찮은 게 독서였고.

서재에 있는 책들, 절반은 처음 보는 책이었다.

“하지만 봐도 이해가 안 가네…….”

내 아내들, 황후들의 극적인 협정으로 다툼이 사라졌다는 건 알겠다.

한데 또 인간 중에서 2대 황제를 뽑겠다는 건 왜지?

“여기는 제국의 북쪽, 알라카스 산맥 부근을 통치하는 리브라타 백작가고. 내가 통치하던 시절에도 귀족이긴 했지만 그때는 남작이었지. 지금은 백작으로 급이 오르긴 했는데…….”

여러모로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았다.

그 협정을 타결한 관계자들은 지금도 쌩쌩하게 살아 있으니 캐내면 정보가 모일…….

궁리하던 나는 도리질을 쳤다.

“아냐, 아니라고. 그놈들이 알아서 한 일을 내가 왜 염려하고 걱정해 줘야 해? 다들 잘 알아서 하겠지.”

난 이제 황제가 아니다.

그냥 철부지 막내 도련님으로, 집안 재산이나 축내면서 살 거다!

“그래도 몸은 만들자. 좀 사람 같아야 살 거 아냐.”

천하제일 황제 시절까진 아니어도 무시당하진 말아야지.

몸을 만들고, 마력을 수련하고, 초능력을 강화한다.

체력이야 단련하면 된다.

마력이야 지금은 한 방울도 없지만 내가 따로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

“그리고 초능력은…… 마구잡이로 흡수할 순 없지.”

타인의 감정, 정신을 흡수해서 힘을 늘리는 건 양날의 검이다.

아무나 무작정 흡수하면 기억까지 묻어서 들어오고, 내 영혼까지 오염된다.

타인의 기억을 내 영혼 속에 심어 버리면?

기억이 뒤죽박죽으로 섞이고 미쳐 버리게 된다.

그래서 초능력을 알려 준 스승이 각별히 당부했다.

나에게 마음을 열고, 해를 끼칠 의도가 없는 자만 골라야 한다고.

“귀신 들리기는 싫으니 당연히 그래야지…….”

황제의 책무에서 해방된 삶.

펑펑 놀고먹을 소중한 시간이니 안전제일이다.

호흡이 좀 정상이 되자 나는 다시 책을 아래에 내려놓고는 플랭크를 취했다.

육체와 정신의 동시 단련.

초능력을 수련하는 데 딱이다.

그때 서재 문이 벌컥 열렸다.

이젠 익숙해진 아멜리아, 그리고 성난 얼굴의 남자였다.

“……뭐 하는 거냐?”

“으, 어. 보면 몰라요?”

버티기도 힘든데 말시키지 마!

내가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남자는 뚜벅뚜벅 다가왔다.

아, 내가 초능력 쓰는 건 보여 주면 안 되나?

초능력은 황제인 시릭 카라카스만이 쓰는 신비한 힘이었으니까.

“리젠.”

내 앞에서 멈춰 선 남자가 험악하게 말했다.

나는 무심코 대답하려다가 결국 체력이 다해서는 바닥에 털버덕 쓰러졌다.

“도련님…….”

아멜리아가 얼른 다가와서는 일으켜 주려고 하자 남자가 노호성을 질렀다.

“아멜리아! 나서지 말게!”

움찔.

아멜리아는 얼른 머리를 숙이더니 뒤로 물러났다.

지쳐서 숨을 몰아쉬던 내 가슴속에 묘한 감정이 퍼져 나갔다.

분명히 처음 보는 남자인데…… 반가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이제 와서 아버지가 저한테 무슨 볼일이십니까?”

존대라니?

나는 내가 하고도 굉장히 낯설어했다.

제국의 황제로서 군림하던 내가 남에게 존대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 남자를 보자니 감정과 함께 절로 말이 나왔다.

원래 이 몸의 아버지, 엘런 리브라타 백작은 분노와 짜증이 섞인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건방지게 발랑 누워서는 내 말을 듣겠다는 거냐?”

“일어서도 건방질걸요?”

나는 지친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가슴속에 묘한 반발감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마도 이 몸의 원래 주인이 품었던 감정이리라.

백작은 기막힌 얼굴로 나를 노려보다가 말했다.

“네 행실에 대해서 할 말이 많다. 영지의 여인들을 마음대로 건드린 것, 용서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용서할 수 있다. 그런데 이미 남자가 있는 여인들만 건드리다니! 너무 추악하고 경멸스럽지만…… 그래도 질끈 눈을 감을 수가 있다. 정말 싫지만 그래도 자식이니까!”

“…….”

“한데 남자 놈에게 들켜서는 매번 얻어맞고! 이젠 사경을 헤매다니! ……집안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다. 내 아들이지만 앞으로 다시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내가 더 화가 난 건 그게 아니다!”

“아니, 여기서 더 화나면 숨넘어가시겠는데요. 릴랙스, 진정하시고.”

내가 양손을 들어 보이자 백작이 폭발했다.

“……이놈 자식이!”

짜아악!

제대로 정타가 들어오고는 골이 흔들린다.

하지만 나는 비틀거리면서도 자세를 바로 했다.

백작이 불꽃처럼 뿜어내는 정신, 붉은색 파장이 보인다.

나에 대한 분노였다.

백작은 몸까지 떨면서 화를 냈다.

“얕은 속임수로 아버지를 속인 것도 모자라서! 이젠 능멸하려고 들어!”

“여기가 도박장도 아닌데 속이긴 뭘 속입니까?”

나는 반항적으로 대꾸했다.

황제인 내가 맞았는데도 화가 난다기보다는 섭섭한 마음이 강했다.

아, 역시 이건 이 몸에 잔류하고 있는 감정이다.

백작은 나를 가리키며 쏘아붙였다.

“네가 글을 읽을 수 있다고? 글자 하나도 쓸 줄 모르던 놈이 어디서 그런 헛소리를 하는 게냐! 그런다고 내가 널 용서해 줄 줄 알았더냐!”

“어, 음…….”

나는 뺨을 만지면서 정리했다.

“그러니까 제대로 집안 망신을 시킨 제가, 아버지의 환심을 사려고 글을 읽을 줄 아는 척을 한다, 이겁니까?”

“그래! 못난 건 감싸 안으려고 했지만 그런 속임수는 용서 못한다! 너는 오늘부터 내 자식이 아니다!”

이미 아니긴 한데.

나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그럼 내가 읽을 줄 안다는 걸 증명하면 됩니까?”

“뭐라고? 이놈이 어디서…….”

“백작님. 외람되지만 도련님의 말씀을 들어 보시죠.”

물러나 있던 아멜리아가 나섰다.

놀랍게도 내 편을 들어 주는 것이다.

나도 놀라서 보고, 백작이 눈을 번뜩이면서 돌아보았다.

비록 아멜리아가 자식들을 업어 키웠다지만 이는 엄연히 집안의 일.

주제넘게 나서지 말라는 서슬 퍼런 경고였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물러나지 않고 말했다.

“리젠 도련님을 의심하시는 것도 당연하지만 정말 읽으실 줄 알았습니다.”

“……으으으음.”

백작이 화를 삭이지 못하자 나는 발치의 책을 주워 들었다.

“그럼 이거 읽어 보면 믿어 줄 겁니까?”

“……그건 공용어도 아니고 엘프 문자다. 내가 모른다고 속일 생각이라면 집어치워라. 서기관을 불러서 확인해 볼 테니까.”

“그러시든가요. 하지만 읽기 전에…….”

나는 손에 잡은 책을 흔들어 보이면서 말했다.

“내가 정말로 읽는다면 방금 때린 걸 사과해 주셔야겠습니다.”

“뭐라고?”

“내가 읽으면 아버지가 잘못한 게 맞잖아요?”

“…….”

백작이 수긍하는 기색이자 나는 추가로 말했다.

“그리고 추가 요구도 들어주셔야겠습니다.”

“뭐?”

“사과하는 거야 당연하고 거기에 플러스알파를 주셔야 이치에 맞죠. 모처럼 자식 놈이 맘 잡고 공부하고 있는데 방해도 하셨고요.”

내가 건방지게 말하자 백작은 냉큼 말했다.

“좋아! 내 사과는 물론이고 네가 원하는 거라면 다 들어주마! 하지만 허튼소리를 하는 거라면 넌 오늘부로 우리 리브라타 가문에서 쫓겨날 줄 알아라!”

“이런 놈도 받아 주신다니 백골이 난망하셔라.”

백작이 지금은 화내도 곧 180도 바뀌리라.

자식 놈이 옹알이 좀 하면 다들 껌뻑 죽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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