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2)
누가 이렇게 환생하래
한없이 떨어지는 부유감.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커, 헉…….”
반사적으로 일어난 나는 얼른 주변을 살폈다.
“도,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나는 눈살을 찌푸리고는 상대를 살폈다.
정복을 입은 인간 노인이었다.
“어…….”
누구냐고 물어보려고 하는데 목소리가 안 나온다.
목이 괴롭다.
“…….”
괴롭다는 감각이 너무 오랜만인데?
내가 신기해서 목을 문지르는데 노인이 말했다.
“절 알아보시겠습니까? 집사, 파벨입니다!”
“…….”
처음 보는 얼굴인데.
내가 멍하니 있자 노인이 멋대로 말했다.
“열흘 만에 의식을 찾으셔서 몸이 말이 아니실 겁니다. 무리하지 마시죠.”
열흘이나 기절했다고?
그럼 제국의 정무는?
내가 하루만 손을 놓으면 서로 자존심 싸움 벌인다고 분탕질인데?
덜컥 걱정이 드는데 노인이 말했다.
“아멜리아, 도련님에게 물을 좀 드리게.”
그러자 침대 옆에 있던 여자가 내게 물그릇을 내밀었다.
은회색 머리카락, 머리 위에 쫑긋 서 있는 늑대 귀.
늑대 수인, 그것도 은회색 늑대 소녀였다.
수인 사이에서도 희귀한 종족, 혈통이 끊어지기 직전 아니었나?
나는 신기해하면서 여자가 주는 대로 물을 받아 마셨다.
노인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깨어나셔서 다행입니다. 다들 크게 걱정을 했습니다.”
“거야…….”
목소리가 왜 이래?
“아, 아. 아?”
황제인 내 목소리는 우렁차다.
전장에서 병사들을 독려하려면 응당 쩌렁쩌렁해야지.
그런데 지금 목소리는 음유시인의 청승이었다.
누구는 미성이라고 하겠지만 내게는 곡소리다.
“리젠 도련님? 혹시 목이 불편하십니까?”
“…….”
왜 도련님이라고 부르지?
내가 신하들에게 격의 없이 군다지만, 신하들이 나한테 건방지게 구는 건 아닌데?
내가 어이없이 보자 노인이 눈물을 글썽거렸다.
“일어나신 직후라서 아직 정신이 돌아오지 않으신 모양이로군요. 아무 걱정 하지 마시고 푹 쉬시지요. 가주님에게는 제가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멜리아, 당분간 리젠 도련님 옆을 지키면서 시중을 드세요. 저택의 세세한 일들은 제가 정리하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오가는 소리들, 황제가 들을 소리가 아니다.
나는 몸을 살피다가 손을 내려다보았다.
곱디고운 손.
검을 잡던 굳은살, 편지를 하도 써서 붙은 잉크 자국은 흔적도 없다.
“……어.”
환생했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내게 환생은 첫 경험이 아니다.
지구인이던 나는 이 세계, 카라카스에 환생해서는 온갖 우여곡절 끝에 제국을 만들고 황제가 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때는 분명히 아이였는데?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손은 성인의 것이었다.
실내를 살핀 나는 거울을 가리켜 보였다.
“예.”
메이드 아멜리아가 나를 향해 거울을 가져왔다.
거울에 비친 건…….
창백한 얼굴, 울적하게 가라앉은 눈매.
검은 머리카락에 푸른 눈, 가느다란 턱선.
“뭔…….”
이제 스물 안팎의 곱상한 애새끼였다.
그것뿐이면 말도 안 한다.
수련한 육체, 숭모근과 대흉근, 이두박근도 모조리 다 실종되었다.
말라비틀어진 사과 심이 셔츠를 입고 있다.
“근손실 오지네.”
“예?”
“아니, 아니야. 그…….”
일단 당황스럽지만 인정하자.
나, 제국의 초대 황제 시릭 카라카스는 죽은 모양이다.
그리고 이 말라비틀어진 놈의 몸에 들어왔고.
“……그래, 인간 남자인 게 어디야? 엘프 여자라도 됐으면 후끼약이지.”
“예?”
“육하원칙, 여긴 누구고 나는 어디지?”
“……리젠 도련님이시고 여기는 리브라타 백작가의 본가입니다.”
수인 메이드, 아멜리아는 당황하면서도 대답했다.
음, 전혀 모르겠군!
나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졌다.
“지금이 언제지? 제국 몇 년이지?”
“……제국력 124년입니다.”
내가 통치하던 시기에서 100년이나 지났네?
나는 가볍게 물었다.
“그럼 지금 황제는 누구지?”
“……예?”
고분하게 대답하던 아멜리아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이놈이 드디어 미쳤나 본데 얼른 정신병원에 신고해야 하나, 고민하는 투.
나는 픽 웃으면서 말했다.
“막 일어나서 머리가 어지러워서 그래. 좀 대답해 주라, 응?”
“……천년제국에 황제는 없습니다. 도련님.”
“뭐!”
왜 없어?
내가 죽었으면 누가 그 뒤를 이어야 할 거 아냐?
아멜리아는 더 기막혀하면서도 말했다.
“초대 황제가 서거하신 이후로 아직까지 황제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2대 황제를 선출하기 위해서 다들 열심히 노력하는 중입니다. 세상일에 관심이 없어도 상식이고, 가문의 일원이신 도련님에게도 남의 일이 아닙니다.”
“……뭐라고?”
듣던 나는 경악했다.
내가 죽고 100년이나 지났는데 다음 황제를 안 뽑았다고?
아, 황당하다!
“아, 진짜 미친 새끼들…….”
나는 반사적으로 욕하면서도 사정이 이해가 갔다.
그래, 인간을 제외한 종족들은 오래 살지.
엘프, 다크엘프, 천족과 마족, 수인, 드래곤에게 100년은 그리 길지 않다.
2대 황제를 선출하기 위한 준비 기간으로 친 건가?
“근데 그러면…….”
그래도 황제가 공석인데 제국의 통치는 누가, 어떻게 하고 있는 거지?
갑자기 엄청 걱정된다.
“아냐. 내가 걱정을 왜 해? 난 이제 걱정을 안 해도 되는데!”
초대 황제인 나는 죽었잖아?
사망신고서 발급한 지 100년이나 지났다.
제국이 뭐 어떻게 돌아가건 내 알 바가 아니다.
“…….”
혼잣말을 하는 내 뺨을 찌르는 시선.
아멜리아가 차갑게 쏘아보고 있었다.
나는 픽 웃고는 말했다.
“나 미친놈 아니니까 도련님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보고할 필요 없다. 아니, 그냥 보고하든가.”
“……아닙니다.”
“됐고. 책이나 좀 가져와 줄래?”
“예?”
아멜리아는 믿어지지 않는지 다시 말했다.
“……도련님이 독서를 하시겠다고요?”
“그래, 역사랑 행정개론서. 정부 구조도도 알면 좋겠는데. 내가 지금 움직일 기운이 없으니까 네가 가서 역사서 아무거나 적당한 거 골라 와.”
“…….”
“설마 여기 책 한 권도 없냐? 시릭 카라카스가 인쇄 기술에 각별히 신경 쓰고 도서관을 마구 지었는데?”
아멜리아는 나를 의심스럽게 보다가 방을 나갔다.
“으음, 뭐, 갑자기 이런다고 날 의심하진 않겠지?”
아멜리아는 겉으로는 10대 중반이지만 수인 역시 500년 이상을 산다.
외모만으로 판단해선 안 된다.
“그나저나…… 그 새끼들, 진짜로 나한테 200년 더 시킬 생각이었어.”
설마 내가 죽어도 황제도 안 뽑고 뭉갤 줄이야!
몸서리가 쳐진다.
죽길 잘했어.
“아, 그나저나 이 몸은 너무 허약한데? 뭐 이래?”
침대에서 일어날 기운조차도 없다.
나는 정신을 집중하고는 몸 안의 마력을 탐색했다.
없다.
넘쳐흐르던 마력이 단 한 방울도 없었다.
기가 막혀서 몇 번이나 시도해도 반응 제로.
“아니, 집사 있고 메이드 있잖아? 그럼 귀족인데, 귀족은 기본 마력은 갖추고 있지 않나?”
단 한 방울도 마력이 없는 건 이례적인데?
나는 몸을 점검해 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마력은 일단 뒤로 미루고 초능력부터 되찾자.”
전생의 나, 시릭 카라카스는 초능력을 익혔다.
염동력, 투시력을 비롯한 각종 초자연적인 능력.
사람의 영혼, 위대한 정신을 다루는 비밀스러운 힘
덕분에 힘의 정점, 황제까지 올랐고.
“초능력도 바닥부터 시작해야지. 그럼 역시 남의 정신력, 감정을 흡수해야 하나?”
달칵.
문을 열고 돌아오는 아멜리아.
내가 주시하자 그녀의 몸에서 은은히 뿜어져 나오는 주황색 기운이 보인다.
불쾌감, 당황스러움.
나에 대해 품은 감정이었다.
초능력의 출발 지점, 타인의 아우라를 색으로 읽는 것이다.
나한테 초능력을 가르친 스승에게 배운 것인데…… 환생해도 바로 쓸 수 있었다.
“…….”
지금 흡수할까?
아니다. 어차피 흡수할 거라면 좀 더 키워 놨다가 먹는 게 좋다.
감정은 무한정 솟아 나오는 게 아니니까.
때로는 잘 묵혀 놔야 한다.
아멜리아는 침대 옆에 서서는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읽어 드리겠습니다.”
“뭐? 내가 읽을 테니까 페이지만 넘겨.”
아멜리아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글을 읽을 줄 모르시잖아요?”
“…….”
문맹이었다고?
아니, 내가 교육기관 세우고 문맹률 낮추려고 노력했는데?
애당초 도련님이라고 불릴 정도면 당연히 읽을 줄 알아야지.
나는 혀를 차고 말했다.
“몰래 공부했다. 얼른 내려놔.”
“…….”
아멜리아의 몸에 두르고 있던 주황색 기운이 더 진하게 물들었다.
그러고는 내 앞에 책을 내려놓는다.
“그럼 알아서 읽으시든가요.”
“그래.”
대충 내가 죽은 이후에 제국이 어떻게 돌아갔는지를 살펴보았다.
초대 황제인 시릭 카라카스, 나에 대한 온갖 미사여구는 넘기고.
내가 죽은 날, 통칭 통곡의 날 이후로 제국에 엄청난 혼란이 일어났다.
내 자식, 황자와 황녀는 이제 걸음마를 떼는 아이들이었고.
뚜렷한 2인자도 없었지.
제국의 권좌를 두고 팽팽한 대립, 전운이 감도는데…….
“……어.”
내 아내들, 즉, 각 종족을 대표하는 황후들이 최종적인 합의를 도출했다.
제국을 임시적으로 분할통치.
서로 의견을 교환하되 각자에게 간섭하지 않는다.
“……그리고 제국을 통치할 2대 황제를 인간 중에서 뽑는다? 대체 왜?”
“…….”
내 뺨에 닿는 시선.
아멜리아의 눈길은 이젠 얼음처럼 차가워져 있었다.
뿜어내는 주황색 아우라는 더 진하게 물들어 있었고.
난 그녀를 돌아보고는 빙긋 웃었다.
“아, 문맹인 도련님이 세상 모두가 아는 사실을 말하면서 책 읽는 척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예.”
즉답하네?
“솔직해서 좋다. 하지만 내가 귀한 집 자식새끼 같은데 그렇게 까불어도 되냐? 빡치면 그냥 네 대가리를 딸 것 같은데?”
“도련님을 갓난아이 시절부터 업어 키운 게 바로 저인데요?”
“……어, 음. 그래? 그, 그랬나?”
위협하려던 나는 합죽이가 되었다.
수인은 겉보기로 나이를 판별할 수 없다.
아멜리아는 10대 중반의 귀여운 소녀로 보이지만 이 도련님을 기른 유모였다.
열흘 동안 혼수상태였다가 깨어나니 바로 패륜 협박이라니, 기가 막힐 만도 하지.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도련님을 키웠는데 철이 들면서부터 삐뚤어지시더니. 백작님이 시찰 나간 동안만이라도 제발 얌전히 있어 달라고 그리 부탁했는데…… 또 나가셔서 험한 짓을 하다가 이런 봉변까지 겪으셨죠. 이제 제가 뭘 더 어떻게 해야 하나요?”
“…….”
아멜리아가 쏘아붙이자 나는 목을 움츠렸다.
천하를 호령했던 황제였던 난데…… 왠지 기를 못 펴겠다.
아멜리아는 주황색 아우라를 더 뿜어내면서 따졌다.
“매번 몹쓸 짓을 하는 것도 모자라서 이젠 저한테까지 새빨간 거짓말을 하시다니! 전 도련님을 이렇게 키우지 않았습니다! 대체 어쩌려고 이러세요?”
“……거야 이러려고 이러지?”
나는 아멜리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슈우우욱.
그러자 그녀가 뿜어내고 있던 주황색 아우라가 내 손으로 빨려 들어왔다.
“아…….”
그리고 아멜리아가 휘청거리는가 싶더니만 침대에 쓰러져 버렸다.
팽팽하던 정신의 실이 끊어져서는 기절해 버린 것이다.
내가 정신력을 흡수하면 이런 경우가 종종 있었다.
“으음……. 그래도 믿어 주네?”
이 정신 흡수는 나에게 마음을 열어 준 상대에게 해야 탈이 없다.
아멜리아가 꾸중하면서도 이 도련님에게 마음을 허락했단 증거였다.
아무튼 정신력을 흡수해서 좀 괜찮아졌나 싶은데…….
“간에 딱 기별만 갔네. 이거 몸이 진짜 고물인데?”
원래 나는 검술, 마력과 초능력을 병행하면서 싸웠다.
그래서 다른 종족, 칠죄신의 종복들을 압도했던 건데…….
“몸은 허약해, 마력은 하나도 없어, 초능력을 떠다 줘도 못 먹네? 갈 길이 멀다, 멀어.”
그래도 좀 숨이 트였다.
열흘 쓰러졌다는데 책을 넘겨도 피로감이 없다.
나는 책을 계속 살피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인간에게 2대 황제가 될 기회를 준다. 단, 다른 일곱 종족이 모두 그를 인정한다는 전제로?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합의를 봤지?”
내전이라면 이해가 된다.
건국 이후에 후계 다툼이 벌어지는 일이야 흔하잖은가?
고려도, 조선도 그랬지.
하지만 서적은 과정을 건너뛰고 결과만 적혀 있었다.
“아무튼 인간들은 그놈의 2대 황제 자리를 두고 레이스를 벌인다 이거네. 인간은 다른 종족에 비하면 약하니까. 그렇게 황제의 자리에 도전할 자격을 갖춘 12가문이…… 아리에드, 타루스, 미니아, 케드릭, 레오가……. 리브라타?”
12가문을 살펴보던 나는 불안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아까 집사가, 아멜리아가 나를 리브라타의 도련님이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야, 잠깐. 아니지?”
황제를 관두려고 했던 나, 초대 황제 시릭 카라카스.
2대 황제에 도전하는 가문의 도련님으로 환생했다.
미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