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 새로운 시작
* * *
한산한 오후, 따뜻한 봄 햇살을 느끼며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
대한민국의 일산 쪽에 있는 호수공원이었다.
이곳은 정말 평화로우면서 평범한 풍경을 보여주었다.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런 곳이었다.
“크어엉!”
곰?
아니었다. 이 생명체의 이름은 오우거. 정확히 말하자면 돌가죽 오우거라 불리는 몬스터였다.
갑자기 호수공원에 나타난 오우거.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이토록 평화롭게 보이던 곳에 갑자기 오우거라니…… 정말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크게 놀라거나 당황한 사람은 없었다.
그저 모두 빠르게 뒤로 물러나며 가방이나 안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작은 기계 장치를 꺼낼 뿐이었다.
바로 그때 하늘에서 뭔가가 오우거를 향해 떨어졌다.
콰광!
오우거를 찍어 누르는 한 사람.
두터운 갑옷을 몸에 걸친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오우거를 상대하며 투덜거렸다.
“아~ 형!! 좌표가 잘못됐잖아. 괜히 다른 곳에 갔다가 여기로 급하게 오느라고 아까운 상급 텔레포트 스크롤만 날렸네.”
[치이익…… 미안하다. 퓨전홀 탐지 장치가 잠시 오작동을 일으켰다. 나중에 내가 텔레포트 스크롤 하나 사줄게. 됐지?]
“오케이~ 그럼 약속한 겁니다.”
밝게 웃는 남자.
그는 슬쩍 웃으며 쓰러진 오우거를 향해 걸어갔다.
“그럼 이제 슬슬 밥벌이를 해볼까?”
고오오!
남자의 주먹에 오러가 맺혔고, 그는 그 오러가 맺힌 주먹으로 오우거를 걸레로 만들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는 오우거가 튀어나온 퓨전홀에 재빨리 몇 가지 마법 장치를 설치해 더 이상 퓨전홀이 커지거나 작동하지 않게 만들었다.
그의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그는 통합세계정부에서 B급 헌터 자격증을 딴 일류 헌터였다.
그의 임무는 끊임없이 뚫리는 퓨전홀을 찾아 그곳에서 튀어나온 몬스터를 소탕하고 간단히 봉인까지 하는 것이었다.
아직은 B급밖에 되지 않는 헌터라 주로 D~F급의 퓨전홀만 찾아다니고 있었지만 올해가 가기 전에 기필코 A급 헌터 자격증을 따려고 마음먹고 있는 그였다.
“작업 끝. 형~ 나 30분만 쉬자. 점심도 못 먹고…… 너무 배고프다.”
[알았다. 어차피…… 아직 특별한 징후도 없으니까 밥부터 먹자.]
직접 오우거를 때려잡은 이가 헌터라면…… 그 헌터를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이들은 ‘어시스트’라고 불렸다.
보통 마갑을 소유하지 못한 이들이 이 ‘어시스트’의 역할을 하곤 했는데, 어차피 이 세상에 널린 건 마갑을 소유하지 못한 판타리스 유저들이었기에 ‘어시스트’를 할 만한 이들은 넘치고 넘쳤다.
다소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는 이 모습.
하지만 이것은 이제 모든 사람에게 너무나 익숙한 모습이 되었다.
실제로 최초 오우거가 나타났을 때 전혀 놀라지 않고 너도나도 꺼냈던 그 작은 기계 장치는 일종의 일회용 보호막 생성기였다.
이제는 생활 필수품이 되어버린 그 장치를 만든 건 대마법사 가웨인이었다.
가웨인은 그 장치와 함께 여러 마법 물품을 만들어 대량 생산함으로써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 되었다.
이 모든 변화는 10년 전 일어났던 엄청난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0년 전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 어둠으로 뒤덮이면서 하늘에 거대한 그림자가 생겨났다.
그것은 놀랍게도 하나의 땅덩어리였다.
처음엔 그저 하늘 높이 떠 있는 이상 물체일 뿐이었는데, 그것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땅으로 가까이 내려왔다.
그뿐이 아니었다.
세상의 곳곳에서 이상한 몬스터들이 마구 튀어나오고…… 전혀 보지도 못한 구조물들이 갑자기 생겨나기 시작했다.
대격변(大激變).
사람들은 그때 그 상황을 이렇게 불렀다.
세계는 엄청난 혼란에 빠져들었고…… 사람들은 세상이 멸망하려 한다고 소리쳤다.
정말 모든 사람은 그렇게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끝없이 쏟아져 나온 몬스터들과 세계 각국의 군대들은 대전쟁을 치렀다. 화력에선 현실의 군대들이 강력할지 몰라도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들의 막대한 물량은 세상을 아비규환(阿鼻叫喚)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기적과도 같이 그 모든 변화가 한순간에 멈춰 버렸다.
물론 그때까지 일어난 변화는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지만 적어도…… 새로운 변화가 추가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곧장 일어난 또 하나의 사건.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가상현실 게임, ‘The One’에 숨겨진 충격적인 진실.
놀랍게도…… 하늘 위에 떠 있던 거대한 대륙은 그 가상현실 게임에서 실제로 존재하던 두 대륙이었고, 그와 함께 나타난 두 개의 달 역시 그 세상에만 존재하던 것이었다.
한마디로 가상현실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가상현실을 즐기던 유저들은 그 힘을 그대로 현실에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지금까지도 소수의 능력자가 대전쟁에 끼어들어 여러 사람을 구했다는 영웅담은 여기저기에서 전해지고 있었다.
물론 최초에는 아무나 현실로 힘을 끌어올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선택받은 이들…… 흔히 말하는 ‘자이언트’라는 매우 특별한 아이템을 소유한 이들 중에서도 또 그것을 각성 단계(영혼 가속 단계)까지 업그레이드시킨 이들만 현실로의 개입이 가능했었다.
하지만 10년이란 세월이 흐르며 수많은 기술이 개발되었고 과학과 마법의 접목으로 인해 어지간한 수준…… 판타리스―기존의 동대륙과 서대륙을 합쳐서 이렇게 불렀다―의 개념으로 얘기하면 마스터 등급만 되어도 현실에서 판타리스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대격변, 판타리스의 등장.
이것들은 정말 세상을 완전히 뒤엎어 버렸다.
통합세계정부가 탄생하고 판타리스를 관리하는 판타리스연합이 생겨나고…… 수많은 혼란과 과도기를 겪으며 10년이 지났다.
실제로 이 세상이 제대로 안정화된 건 불과 1~2년 전이었다.
그전까지는 정말 수많은 사건 사고들로 인해 늘 불안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2년 전 통합세계정부와 판타리스연합이 극적으로 모든 체제를 하나로 합치기로 결정하면서 세상은 급속도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옛날의 423298차원은 존재하지 않았다.
뒤엉킨 상태로 멈춰 버린 새로운 하나의 차원. 재미있는 건 이 상태에서도 ‘일루젼’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고, 여전히 판타리스에서 사용되던 모든 기능은 예전 그대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제 이 세상을 무슨 세상이라 불러야 할까?
천화신도에 의해 강제로 활성화가 멈춰져 더 이상의 융합에너지 생산은 멈췄지만 융합에너지와 별개의 문제였던 퓨전홀은 여전히 끊임없이 만들어냈다. 이미 반쯤은 융합이 되어버린 두 세상이었기에 퓨전홀은 더 이상 융합을 진행시키는 역할이 아닌 두 세상을 비정규적으로 연결시키는 일종의 통로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것은 그렇게 이 세상 곳곳에 수많은 몬스터들을 등장시켰고, 그 몬스터들을 처리하는 헌터와 어시스트들은 이 세상을 계속 떠돌아다녔다.
또 어떤 이는 판타리스의 힘으로 현실 세계에서 범법자가 되었고, 그런 범법자를 잡기 위한 특수 경찰들도 존재하고 있었다.
과학과 마법은 서로 만나며 더욱 발전했고…… 이제는 마도과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인기를 끌고 있었다.
이 세상의 누구라도 판타리스에서 레벨 업을 하는 건 당연하게 생각했으며, 판타리스에서 힘을 얻으면 현실에서 힘을 얻은 것과 마찬가지로 분류되었다.
그것은 게임이 아닌 하나의 인생이 되었고…… 판타리스의 아이템들은 현실의 물건과 똑같은, 아니, 오히려 더 귀중한 취급을 받으며 거래되었다.
통합세계정부는 최초 분쟁이 생겼을 당시 판타리스(The One)을 개발한 DH 그룹을 철저히 망가뜨렸지만 아직도 판타리스에 접속할 수 있는 여러 기계들은 다양한 곳에서 꾸준히 생산되고 있었다.
아예 간단한 안경형 접속기까지 나온 상태였다.
누구나 쉽게 판타리스에 접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또 생각보다 쉽게 판타리스의 힘을 현실에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세상은 더 이상 예전의 그 세상이 아니다.
진짜 완전히 다른 세상…… 다른 차원이 되었다.
* * *
“누나, 린 누나는 어디 갔어?”
클레타는 도장에서 가볍게 몸을 풀고 안채로 들어오며 마가레타를 향해 물었다.
“오늘 그날이잖아.”
마가레타는 주방에 앉아 잔뜩 요리 재료를 펼쳐 놓고 뭔가를 만들려고 열심히 노력 중이었다.
“아…… 그날인가……. 으음, 그나저나 누나 또 뭘 만들어? 설마 또 괴상한 요리를 만들어서 강민 형 가져다주려고 하는 건 아니지?”
“무, 무슨 소리를!! 아니야! 그, 그냥 내가 먹으려고 만드는 거야.”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지며 말을 더듬는 마가레타.
클레타는 그런 마가레타를 보며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 세상을 구한 영웅들…… 프로젝트 S의 유저들은 진짜 세상을 구한 영웅들이 되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아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프로젝트 S의 유저들은 굳이 자신들의 업적을 떠벌리지 않았다.
당시 상황 자체가 워낙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그들은 그저 그 상황을 수습하는 데 전력을 다했을 뿐이었다.
그 뒤로도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판타리스연합을 만들고, 판타리스 출신 유저들을 탄압하려는 통합세계정부와 반목하고…… 하지만 결국 그들은 모든 걸 안정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사람들은 그런 그들을 가리켜 ‘로열 블러드’라고 불렀다.
특별한 존재로 추앙받는 ‘로열 블러드’. 실제로 상당수 프로젝트 S의 유저들은 이 직위와 자신이 가진 능력을 이용해 큰 성공을 이루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전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몇몇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을 숨기고 평범한 삶을 살아갔다.
마가레타와 클레타 역시 그런 부류였고, 그들과 함께 살게 된 린 역시 그랬다.
세상은 변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소박한 삶에 만족했다.
마가레타는 그 와중에 정이 들을 대로 든 투신 천위강(이강민)을 좋아하게 되었지만 그건 소소한 일상의 한 가지 에피소드일 뿐이었다.
붉어진 얼굴로 대충 요리를 정리하는 마가레타를 보며 클레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 높이 떠 있는 판타리스 대륙.
그리고 그곳에서 헤어진 한 남자…….
‘형…… 이제는 모두가 행복할 수 있을까요?’
클레타는 그렇게 말없이 한동안 하늘을 바라보며 조용히 서 있었다.
“언니, 벌써 세월이 이렇게 지났네…….”
린, 아니, 정혜정.
그녀는 서울의 외곽에 있는 한 고급스러운 납골당에 서 있었다.
그곳엔 그녀의 언니였던 정혜인의 유골이 잠들어 있었다.
“그동안…… 너무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아.”
왜일까?
그동안 수없이 많이 찾아왔던 곳인데 오늘은 왠지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언니는 너무 일찍 떠났어.”
혜인의 홀로그램 사진을 보던 린은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왜 내가 아껴주고 싶은 사람들은 다 내 곁을 일찍 떠나는 걸까?”
그녀는 언니와 함께 또 한 사람을 떠올렸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연을 쌓았던 남자.
그 역시 너무 일찍 그녀의 곁을 떠났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는데…… 훌쩍 떠났다.
“……보고 싶다.”
언니도 보고 싶었고, 그도 보고 싶었다.
그저 오늘은 모두가 그리워졌다.
바로 그때…… 묘한 발걸음 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분명 근처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데……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몬스터의 습격?
퓨전홀의 등장?
아니었다. 아무런 어둠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스으으.
린이 혼란스러워하고 있던 그 순간…… 혜인의 납골당 한쪽 구석의 그림자가 천천히 갈라졌다.
그리고……
그가!!
그가 나타났다.
“……!!!!”
두 눈이 커질 대로 커진 린.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인 건가?”
천천히 입을 여는 남자.
신.
그가 10년 전 모습 그대로……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아…… 내가 ‘안녕’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잖아. 그러니까…… 돌아온 거지.”
린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렸다.
“……마지막, 마지막이 아니었던 건가요?”
“누가 그러더군. 마지막, 끝…… 그런 건 세상에 없다고.”
신은 밝게 웃었다.
그의 웃음에는 빛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렇군요. 끝이란 건 없었군요.”
고개를 끄덕이는 린.
그녀 역시 신처럼 밝게 웃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야기. 그것이 이 모든 세상을 만든 원천이지.”
두 사람의 이야기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하나의 이야기가 끝나면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된다.
수없이 많은 이야기가 모이면 하나의 역사가 된다.
역사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세상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 네버엔딩 스토리를 이어간다.
어쩌면…… 이 세상도 그 수많은 이야기 중 하나일 뿐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세상도, 그리도 당신의 세상도…….
더 로드 1부, 전이(轉移)의 장(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