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반(去者必返)
* * *
이대로 미궁이 닫히면 모든 것은 끝이다.
강제 융합이 일어날 것이고, 그럼 이 차원 역시 다른 수많은 차원들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칼슈타인은 스스로를 폭주시키며 쓰러졌지만 전이는 아마 다음 차원에서 다시 칼슈타인을 대신할 존재를 만들어낼 것이고, 그 뒤는 또 똑같은 일들이 계속해서 반복될 것이다.
“어떻게 된 거야? 왜 저놈이 쓰러진 거지?”
“어…… 저 분화구가 이상해요…….”
“어?! 저거 막아야 하는 거 아냐?”
힘겹게 칼슈타인의 공격을 막아내던 프로젝트 S의 유저들은 당황한 모습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런 그들 눈에도 이상하게 보이는 어둠의 화로.
그들 말처럼 분명 저건 막아야 하는 것이었다.
“……막아야 하지, 분명 막아야 하는 거야.”
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형, 어떻게 해야 해요? 빨리…… 우리가 할 일을 알려주세요.”
“공격해야 하나? 아니면 마법을 사용해서 멈추게 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오빠!! 느낌이 좋지 않아요. 이거 어떻게 막는 거예요?”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가는 융합 에너지.
이 어둠의 화로가 닫히면 융합 에너지는 차원과 차원을 모두 하나로 만들 것이다.
“……여러분이 할 일은…… 없습니다. 아니,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난 고개를 가로저으며 얘기했다.
현실적으로 이들이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전무했다. 이미 닫히기 시작한 어둠의 화로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었다.
즉, 이미 모든 게 끝났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단 하나, 단 하나의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이 가능할지는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것을 시도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뿐이라는 것이었다.
즉, 프로젝트 S의 역할은 여기까지가 끝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여러분의 도움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온 것이고…… 그리고 마지막 도전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웃었다.
어차피 내 스스로 모든 걸 마무리 짓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미련 따위는 없었다.
“……신 님, 무엇을 하시려는 거죠? 그것이 무엇이든 저는 같이하겠습니다.”
린은 가장 먼저 뭔가를 눈치챘다.
린…… 아니, 정혜정.
내가 그녀에게 끌렸던 이유는 확실히 있었다.
그녀는 아드리안…… 현실 세계에서 정혜인이라 불렸던 여인의 동생이었다.
정혜인의 급작스러운 사망으로 현실 세계에서의 온갖 부귀영화를 모두 포기하고 잠적했던 정혜정.
그녀의 영혼에선 아드리안의 향기가 피어오른다.
그래서 난 그녀에게 계속 마음이 갔던 것이었다.
“……린, 때론 혼자 해야 하는, 혼자 할 수밖에 없는 일도 있는 거다.”
“하지만…….”
“하지만이 아니야. 이건 오로지 나만 할 수 있는 일이야.”
“……그렇지만…….”
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나를 안타깝게 바라볼 뿐이었다.
“시간이 없군요. 이제 정말 마지막입니다. 혹시라도…… 세상이 원래대로 변하지 않는다고 해서 놀라지 마세요. 완벽하게 예전의 모습으로 돌리는 건 이미 불가능해졌기에…… 아마 조금은 다른 세상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어둠의 화로가 100% 완벽하게 작동한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 융합 에너지가 만들어진 건 사실이었고 아마도 지금쯤 현실 세계에는 온갖 괴현상이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퓨전홀이 곳곳에 뚫리고…… 이 가상현실에 존재하던 것들이 속속 현실에 나타나기 시작했을 것이다.
얘기할 시간도 별로 없었다.
이 순간에도 현실 세계에서는 엄청난 대란(大亂)이 일어나고 있었을 게 분명했다. 그렇게 모든 것이 하나가 되면 융합이 마무리되고 세상은 멸망한다.
그렇기에 조금이라도 빨리 이것을 멈추게 해야 했다.
“자~ 그럼 이만…… 아! 레타야, 전에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했었지. 미안해 그건 거짓말이었어. 모두가 행복해지길 원하지만…… 때론 행복을 포기해야 하는 사람도 있는 거야. 그게…… 현실이야.”
“형!!”
“오빠!!”
“신 님!!”
“신!!”
…….
나를 부르는 그들의 목소리…… 하지만 나는 애써 그 목소리를 무시했다.
마지막 말을 남기고 뒤돌아선 난 조용히 눈을 감아보았다.
나도 오래전엔 행복을 꿈꿨다.
아드리안과의 영원한 사랑.
그 욕심이 지금의 이런 일을 만들었다.
난 신으로서 개인의 행복을 포기해야 했건만…… 그걸 포기하지 않았었다.
그게 문제였다.
내가 만든 운명의 매듭이었기에 내 손으로 풀어야 한다.
“천화신도!”
고오오!
허공에서 나타나는 천화신도.
이것은 아주 오래전 3425차원에 균열이 생겼을 때 내가 직접 만들어 그 균열을 막는 기둥으로 썼던 초월의 의지를 지닌 검이었다.
이것이 내 손에 들어온 것을 보면 어쩌면 모든 운명의 흐름이 나에게 이러한 결말을 강요한 것일지 몰랐다.
“타이틀 교체. ‘불가능을 넘어선 존재.’”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일은 성공 확률이 매우 적은 그런 일이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바로…….
특수 스킬, 행운 증폭!!
운이었다.
“자!! 끝을 보자!!”
파팟!
난 천화신도를 들고 직접 어둠의 화로로 뛰어들었다.
천화신도라면…… 차원과 차원의 균열을 막았던 천화신도라면 어둠의 화로가 닫히는 것도 막을 수 있을지 몰랐다.
물론 어둠의 화로를 막는다고 모든 게 끝나는 건 아니었다.
궁극적으로 내가 막아야 할 것은 전이(轉移).
하지만 왠지 그건 걱정이 되지 않았다.
아련하게 느껴지는 닉스의 기운…… 그녀는 마치 이 순간을 위해 오랫동안 잠자고 있었던 것 같았다.
쿠쿠쿠쿠쿠쿠쿠쿵!
“이걸로 끝이다!”
쩌저저정!
거대한 분화구의 중심에 천화신도를 꽂았다.
그러자 천화신도는 커다란 기둥이 되며 분화구의 입구가 닫히는 걸 막았다.
고오오오오오!
어둠의 마력이 소용돌이치는 분화구의 한가운데…… 난 그곳에서 그렇게 천천히 어둠의 마력에 잠식되어 갔다.
‘아……. 마지막으로 한 번만 그녀가 보고 싶군.’
아드리안, 그녀가 보고 싶었다.
물론 그녀를 만나는 건 불가능했다.
설사 모든 일이 내 뜻대로 되어 전이의 힘이 사라지고 아드리안에게 걸린 저주가 풀린다고 해도 그녀는 아마 영원히 내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질 것이다.
윤회의 힘은 무조건 그녀를 우선적으로 정화시킬 것이 분명했기에…… 당연한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녀가 아니라면 린이라도 한 번만 보고 싶었다.
그녀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그녀가 아꼈던 동생.
하지만 이 모든 건 그저 이루어질 수 없는 내 작은 바람일 뿐이었다.
* * *
……진.
……진.
……진.
……진.
……진.
진!!
번쩍!!
긴 잠을 잔 것일까?
아니면 그저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것일까?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나는 어둠의 화로의 한가운데에서 천천히 소멸되었다.
“여긴…….”
그런데 멀쩡히 살아있는 나.
내가 있는 곳은 칠흑과도 같은 어둠이 사방에 내려앉은 한 공간이었다.
“깨어났군요. 진.”
그 칠흑의 어둠 속에 유난히 더 어두워 보이는 어둠의 옥좌에 앉아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한 여인.
난 그런 그녀를 보며 조용히 물었다.
“내 부름을…… 내 목소리를 들었나요?”
어둠의 여신 닉스.
드디어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네, 똑똑히 들었습니다.”
“그렇군요. 다행이네요.”
난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이제…… 정말 마지막 마무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신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요.”
“제가요? 그럴 리가요. 전 이제 더 이상 빛의 신 진이 아닙니다.”
“아니요, 당신은 여전히 빛의 신 진입니다. 신성을 잃었다고 해서 당신의 영혼이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그렇기에 전 당신을 찾아 지금까지 그토록 헤맸던 것입니다.”
“저를 찾았다고요? 당신은 전이(轉移)의 힘에 휘둘려 봉인되었던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 어떤 어둠도 저를 가둘 수는 없습니다. 저는 단지…… 모든 걸 방관했을 뿐입니다.”
“그런…….”
이건 미처 몰랐던 사실이다.
가이아도, 우라노스도 모두 착각하고 있었다. 전이는 그녀의 심마(心魔) 따위가 아니었다.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그럼 왜 그토록 저를 찾은 것이죠? 이렇게 크게 일을 벌이면서까지 왜 저를 찾은 거죠?”
나는 오래전부터 이게 묻고 싶었다.
나를 사랑해서? 그래서 찾았다?
그건 절대 사랑이 아니었다. 그런 건…… 집착이라 부르는 게 옳았다.
“……당신에게……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그게 뭐죠?”
“당신은 그녀를…… 아드리안을 정말 사랑했습니까?”
난 그녀의 질문을 듣고 잠시 생각했다.
내가 정말 아드리안을 사랑한 것일까?
나 역시 집착은 아니었을까?
사랑과 집착…… 어쩌면 그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붙어 있는 것일지 몰랐다.
“……사랑했죠. 하지만 그 사랑이 진짜 사랑인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는 신(神)이었건만…… 그 사랑이란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네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드리안을 향한 이 감정이 사랑일까? 아니면 집착일까?
그건 나도 모른다.
단지 사랑했다고 믿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가요?”
닉스도 쓸쓸하게 웃었다.
“저는 오랫동안 이 어둠 속에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닉스.
그녀는 나를 향해 다가왔다.
“어쩌면 우리는 진정한 신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 애초에 세상에 신이란 존재는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누구나 신이 될 수 있고, 누구나 창조할 수 있는 게 이 세상의 진실일지 모른다.”
나를 향해 다가오던 닉스는 잠시 중간에 멈춰 서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당신도, 그리고 나도…… 사랑이란 것을 알게 되었죠. 그런데 세상에 모든 진리를 꿰뚫고 있다는 신이면서도 그 사랑이란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이런데도…… 우리가 진짜 신일까요? 어쩌면 우리조차도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창조물은 아닐까요?”
멈춰 서 있던 그녀는 다시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는 앞에 서서 내 얼굴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이 느껴졌다.
“……내가 사랑했던 당신, 아니, 사랑이 아닐지도 모르죠. 당신 말대로 집착일지도 모르죠. 하지만 전 꼭 당신을 한 번 다시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당신은 진짜 사랑을 알고 있는지…….”
“……확인했습니까?”
“네, 확인했습니다. 당신은 이 모든 게 제 사소한 욕심으로 생겨난 어이없는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죠. 하지만…… 저에겐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제 존재에 대한 의문, 신의 의무에 대한 의문, 모든 것을 해결하기 위해선 이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그럼 이제 모든 걸 확인했으니…… 그만 끝내는 건 어떻습니까?”
“끝이라…… 과연 이 세상에 끝이란 게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하지만 적어도…… 전이(轉移)와 그녀에게 내려졌던 저주는 끝날 겁니다. 아니, 이미 끝났습니다.”
차갑게 웃는 닉스.
그녀는 어느새 어둠의 여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더 정확히 원래 끝날 것이었다고 하는 게 맞을까요?”
그녀는 다시 자신이 앉아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당신의 운명, 나의 운명…… 그리고 그 운명들에 얽힌 수많은 운명…… 그 운명들을 결정짓는 건 무엇일까요?”
스르륵.
그녀는 천천히 어둠의 옥좌에 다시 앉았다.
“……당신도, 나도 결국 하나의 창조물. 어쩌면 신(神)은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지극히 추상적인 존재일지도…….”
점점 사라져 가는 그녀의 모습.
난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가 한 말들을 되새겨 보았다.
“……당신의 운명을 바꿀 수는 없을지 몰라도, 당신의 작은 소망은 제 손으로 들어줄 수 있을 것 같네요. 빛의 신 진…… 아마도 이젠 영원히 당신과 나의 운명이 교차할 일은 없겠죠. 하지만…… 아마도 전 영원히 당신을 기억할 겁니다. 영원히…….”
스으으으으~
그녀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닉스…….’
오랜 인연, 오랜 악연, 오랜 기다림.
이로써 닉스와 나 사이에 얽혀 있던 모든 운명의 매듭은 풀렸다.
그녀가 사라지자 내가 서 있던 공간도 조금씩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내 소망을 들어준다는 그녀의 말은 무슨 뜻일까?
몇 가지 생각을 하던 그 순간…… 난 다시 몽롱한 잠에 빠져들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꿈을 꾼 것인가?
아니면 꿈속의 내가 다시 꿈을 꾸는 걸까?
뭐가 현실인지 난 모른다.
디아콘 제르미냐가 그랬던가? 거울 속의 세상이 진짜인지 밖의 세상이 진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아니, 둘 다 진짜일 수도 있다고……. 닉스의 말처럼 어쩌면 이 세상의 누구도 신이 될 수 있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할 수 있을지 몰랐다.
차원의 의미.
그 의미를 거창하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큰 오류일지 몰랐다.
꿈에서의 나.
꿈을 꾼 나.
둘 중 누가 진짜 나인지 알려고 할 필요가 없었다.
둘 다 나였다.
서로 다른 곳에 존재하는 나였다.
차원은 그렇게 어느 곳에도 존재하고, 어느 곳에서도 만들어진다.
무한한 차원의 영역.
그곳에 선을 긋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