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 밝혀지는 진실(下)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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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단 한 번만이라도 아드리안이 행복하기를 빌었습니다. 이것은 당신의 간절한 갈망…… 전 이 갈망 때문에 당신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 가이아가 나를 찾은 건 또 한 번 아드리안을 잃고 술에 잔뜩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드리안.
좀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423298차원의 지구, 그중에서도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간신히 또 만난 정혜인.
그런데 그녀를 만나 행복을 느끼기도 전…… 그녀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빌어먹을 저주.
물론 그때의 나는 이 모든 사실을 몰랐기에…… 그저 미친 듯이 슬퍼하고 좌절하며 그녀를 그리워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때 가이아가 나타났다.
그리곤 나한테 모든 기억을 잊게 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전혀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해주겠다고 말했다.
너무나 괴로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던 나에겐 축복과도 같은 제안이었다.
그래서 난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뒤의 기억은…… 모두 그가 조작한 것이었다.
과거로 돌아갔다고 믿게 된 것부터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
“끊임없이 반복된 저주는 당신도…… 그리고 아드리안도 지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는 그 반복된 절망을 그만 끊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당신이 필요합니다. 빛의 신 진…… 당신이 말입니다.”
떠오른다.
빛의 신이었을 때의 기억들…….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자유로웠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만났던 아드리안.
그녀도 떠올랐다.
무작정 밀려들어 왔던 기억들이 조금씩 정리되기 시작했다.
이제야 난…… 내 자신의 모든 것을 되찾았다.
“……가이아, 오랜만이군요.”
난 천천히 가이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숫자로 세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오랜 시간이 지났다.
“드디어 돌아왔군요. 빛의 신 진!!”
반갑게 웃으며 나를 부르는 그녀.
그녀의 모습은 예전 그대로였다.
단지…… 안타까운 것은 신성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약해졌다는 것뿐이었다.
“……닉스…… 그녀 때문인가요?”
“아…… 우라노스 님과 그녀를 막아보려 했지만…… 저희가 손을 쓰기엔 너무 늦었어요. 오히려 그녀에게 대부분의 신성을 흡수당하는 걸로 끝나고 말았죠.”
“그렇군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기억을 되찾았지만 닉스가 전이된 사실은 가이아가 미리 해준 얘기를 듣고 알게 되었다.
세상이…… 닉스가 그렇게 변했을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를 막을 수 있는 것은 당신뿐입니다. 빛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어둠뿐인 것처럼…… 어둠을 제어할 수 있는 건 빛뿐입니다. 신성을…… 예전의 신성을 회복해 주세요.”
가이아는 아주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려 온 것 같았다.
하지만…… 난 그런 가이아에게 절망적인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
“……불가능합니다. 예전의 신성을 회복하는 건 아무리 저라고 해도 불가능합니다. 애초에 신성을 흩어버릴 때…… 내 자신도 절대 다시 모을 수 없게 모든 신성들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했습니다. 그렇기에 이젠 저의 부름에도 절대 응답하지 않을 겁니다.”
미련을 두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확실하게 조치했다.
그 결과…… 난 결코 예전의 빛의 신이 될 수 없었다.
“……그런…….”
가이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마도 그녀는 그동안 수많은 차원 속에서 내 영혼을 찾고…… 그 영혼을 완벽하게 각성시킬 준비까지 하느라고 상당히 고생했을 것이다.
그런데 결과가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나부터 미안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건 생각하지 못했네요. 진 님이라면…… 닉스의 폭주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힘이 모두 빠져 버린 것 같은 가이아의 목소리.
그녀는 정말 크게 절망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난 절망하고 있는 가이아에게 희망을 줄 생각이었다.
아니, 이건 가이아에게 주는 희망이 아닌…… 나 스스로 아드리안을 위해 생각해 낸 하나의 소망이었다.
“신성을 회복할 방법이 떠오르신 건가요?”
갑자기 화색이 도는 가이아.
하지만 내가 생각해 낸 방법은 그게 아니었다.
“아닙니다. 신성을 완전히 회복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주 미약하게는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그래 봤자 신성이라 부르기도 힘든 수준이겠지만 그 정도의 신성이라도 분명…… 닉스를 끌어들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나를 찾고 있는 닉스.
그녀라면 분명 아무리 미약하다 할지라도 나의 신성에 반응할 것이다.
“하지만 닉스를 불러낸다고 해도 그녀를 제어할 힘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겁니다. 실제로 저와 우라노스가 힘을 합쳤지만 그녀를 제어하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어둠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빛의 힘이 필요하다.
땅과 하늘의 힘으로는 어둠을 제어할 수 없었다. 이것이 가이아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둠을 제어하는 게 빛이라는 사실은 맞지만…… 사실 어둠을 제어할 수 있는 수단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뭐죠?”
“어둠을 제어할 수 있는 건 바로 더 강력한 어둠입니다. 어둠이 강력하다고 해도 그보다 강력한 어둠이 존재한다면 충분히 제어할 수 있다는 뜻이죠. 즉, 오랜 잠에 빠져 있는 닉스의 진짜 신성을 깨우면 그녀 스스로 모든 어둠을 제어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지금의 닉스는 그리움이란 감정에게 지배당한 가짜였다.
그녀의 진짜 신성은 어둠 깊숙이 잠들어 있다.
그런 그녀를 깨울 수만 있다면…… 분명 그녀 스스로 어둠을 제어할 것이다.
어둠의 여신 닉스라면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아…….”
가이아도 뭔가를 깨달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그녀를 불러내기 위해서는 그녀를 대신해 모든 전이의 과정을 총괄하고 있는 칼슈타인을 제거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만…… 그녀를 불러낼 수 있을 것이고 그녀가 등장한 그 순간…… 제가 그녀의 진짜 신성을 깨워볼 수 있을 겁니다.”
“가능할까요? 전이의 힘은 상상 이상입니다. 어쩌면 그녀의 진짜 신성을 깨우기 전에 모든 게 융합되고 말지도 모릅니다.”
가이아는 전이를 직접 경험해 본 이였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전이의 힘을 잘 알고 있었다.
“확신은 못 하겠습니다. 하지만 방법은 이것 하나뿐입니다. 다른 방법이 없는 이상…… 도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도전하지 않으면 결과도 낼 수 없다.
단 1%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일단 도전해 보는 것이 옳았다.
“그렇군요. 어차피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할 수밖에 없겠군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서둘러야 합니다. 눈치 빠른 칼슈타인은 이미 강제로 융합을 시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대로 강제 융합이 성공한다면 전이의 힘은 이 차원을 집어삼키고 곧장 다른 차원으로 떠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닉스를 불러낼 기회가 사라집니다.”
“……강제 융합…….”
가이아의 말대로라면 정말 시간이 별로 없었다.
“진 님의 동료분들은 모두 현실 세계로 부분 융합되었습니다. 제가 임의로 칼슈타인이 뚫어놓은 퓨전홀 근처로 이동시켜 드리겠지만 융합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것입니다.”
영혼 가속은 나의 각성을 끌어내는 도구이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칼슈타인의 강제 융합을 막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늦었겠지만 저도 합류할 수 있을까요?”
“걱정 마세요. 늦지 않았습니다. 이곳은 시간의 흐름이 정지된 곳…… 이곳에서의 대화가 끝나는 순간 진 님은 동료분들과 함께 현실 세계로 부분 융합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난 가이아를 바라보았다.
이 모든 것을 준비한 것은 그녀와 우라노스였을 것이다.
이 세상에 준비된 안배들을 만들고 423298차원의 신인 레아에게 위기를 알렸다. 우라노스에게 큰 위기가 다가온다는 소식을 들은 레아는 스스로 칼슈타인이 미리 준비한 ‘일루젼’이라는 초월령을 찾아내 그 초월령과 한 몸이 되었다. 비록 칼슈타인의 신성이 생각보다 강력해 완벽하게 초월령을 지배하지는 못했지만 그 초월령을 최대한 조종해 이곳에 큰 버팀목을 만들었다. 그것은 결국 칼슈타인을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었고, 여기저기에서 큰 활약을 할 수 있었다. 우라노스는 거기에 이미 소멸된 타이탄 일족을 부활시켜 유저들에게 새로운 육체(자이언트)를 부여하기도 했다. 모든 것이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차근차근 준비된 것들이었다.
“……당신의 절망이 이곳에서 끝나길 빌겠습니다.”
가이아, 그녀는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에겐 사랑이란 감정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해 주었다.
나와 닉스.
그리고 아드리안.
이 셋의 악연은 그만 끝날 때가 되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이 악연…… 난 기필코 이 악연을 여기서 그만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