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 밝혀지는 진실(下) ― 1
* * *
태초의 고신.
그 위대한 존재가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했다.
자신의 헛된 욕심으로 인해 벌어진 이 모든 일을 스스로의 책임으로 돌렸다.
그는 닉스를 책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닉스에게 고맙다고 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아드리안’을 잊지도 않았다.
사실상 그 누구도 그를 심판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심판했다.
태초의 고신으로서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고…… 빛의 신 진을 소멸시켰다.
너무 갑작스러운 진의 결정.
그는 자신의 신성을 모두 흩어버린 후 평범한 영혼이 되어 스스로 차원과 차원의 교차점에 뛰어들었다.
설마 진이 그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심판할 줄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태초의 고신으로서 억겁의 세월을 살아온 그가…… 이렇게 사소한―다른 고신들의 관점에서 봤을 때―일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빛의 신의 소멸.
위대한 존재의 소멸치고는 너무 빠르고 간결했다.
그렇기에 그 충격도 너무나 컸다.
특히 갑작스러운 빛의 부재로 인해…… 순간적으로 어둠의 영역이 넓어지며 어둠의 여신 닉스의 힘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졌다.
차원의 위대한 법칙은 곧 빛의 부재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신성을 탄생시킬 것이 분명했지만 그래 봤자 태초의 고신인 진만큼 강력한 신성을 지닌 이가 다시 탄생할 리는 없었다.
그 얘긴 곧…… 어둠의 여신 닉스의 힘은 계속 더 강해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빛이 어둠을 물리치던 시대는 끝났다.
이젠 어둠이 빛을 집어삼키는 시대가 왔다.
특히 갑작스러운 진의 소멸로 인해 엄청난 충격을 받은 닉스는…… 한동안 세상의 빛을 모두 어둠으로 뒤덮으며 진의 흔적을 찾고 또 찾았다.
진이 이렇게 사라질 줄 몰랐던 그녀.
그렇기에 그녀는 필사적으로 진의 흔적을 찾았다.
하지만 진은 없었다.
이미 모든 신성을 흩어버리고 나약한 하나의 영혼이 되어 아드리안을 쫓아 차원과 차원의 교차점으로 뛰어든 진은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닉스는 절망했다.
자신이 그토록 동경하던…… 그리고 연모하던 진의 부재는 그녀에게 대단히 큰 충격이었다.
그녀는 스스로 어둠의 원천 속으로 들어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진이 스스로를 소멸시켰다면…… 닉스는 스스로를 봉인시켰다.
그녀의 봉인과 함께 어둠의 시대는 그렇게 조용히 끝났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세상의 어둠과 빛은 거의 동등하게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사실상 어둠과 빛을 대표하던 두 신이 활동을 멈췄기 때문에 원래 가진 그대로의 성격대로 서로를 견제하며 빛과 어둠의 시대를 열었다.
또 그렇게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났다.
가이아와 우라노스는 스스로를 봉인시킨 닉스를 걱정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지켜보는 게 전부였다.
진의 소멸, 그리고 닉스의 봉인.
그때까지만 해도 가이아와 우라노스는 그 두 사건이 어떤 일을 만들어낼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아무리 그들이 위대한 태초의 고신이라고 해도…… 이것만큼은 예상할 수 없었다.
봉인된 닉스의 변화.
어둠의 원천 속에 숨은 그녀의 변화를 알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스스로를 봉인한 그녀조차도 자신이 이런 변화를 일으킬 줄은 몰랐을 것이다.
문제는 진을 그리워한 그녀의 감정 때문이었다.
신으로서 가져서는 안 되는…… 그 감정은 진의 소멸로 극한까지 치솟았다.
절정에 다다른 그리움.
그녀는 그 그리움을 마음속에 품고 스스로를 봉인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것은 단순히 그녀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매우 추상적인 감정일 뿐이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과 봉인이라는 특수한 환경은 그것을 더 이상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추상적인 감정이지 않게 만들었다.
은연중 흘러나온 그녀의 그리움은 어둠의 원천을 장악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어둠의 모든 힘을 한 점으로 응축시켰다.
정말 오랜 세월에 걸쳐 차근차근 힘을 모은 그 그리움…… 그것은 놀랍게도 그 힘을 이용해 닉스의 모든 권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내…… 아주 오랫동안 준비해 왔던 그 엄청난 일을 감행했다.
닉스의 봉인 해제.
정확히 말하자면 그리움이란 감정에 지배당한 닉스의 재림.
그녀의 재림과 함께 시작된…… 전이(轉移).
쌓이고 쌓인 어둠의 힘은 너무나 강력했다.
순식간에 가이아가 말려들었고 이내 우라노스도 말려들었다.
태초의 고신이라던 그들도 막을 수 없는 엄청난 힘.
전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강력해졌고 그 결과 가이아와 우라노스마저 그 전이에 많은 힘을 빼앗기게 되었다.
수많은 차원을 집어삼키는 전이.
그 전이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모든 차원의 합일(合一).
모든 차원을 하나로 합치면 놓쳐 버린 진의 흔적도 모두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처구니없지만 그 단순한 이유로 전이가 만들어진 것이었다.
닉스와 진.
결국 두 신의 서로 다르면서 비슷한 ‘사랑’은 엄청난 비극을 만들었다.
이 이야기는 이제는 그 어떤 차원에도 전해지지 않는…… 아니, 전해지지 않게 만든 태초의 고신들에 관한 비화였다.
그렇다면 왜 내가 너에게 이 비밀스런 얘기를 한 것일까?
간단하다.
넌 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그리고 깨달아야 하다.
너의 위치를, 너의 운명을…….
깨어나라…….
깨어나라……
깨어나라.
깨어나라!
번쩍!!
“크억!”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무엇이었을까?
내 머릿속에 그려지던 수많은 영상과 목소리…… 마치 길고 긴 꿈을 꾼 것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된 거지?”
난 주변을 둘러보았다.
석판 위에서 영혼 가속이 시작된다는 메시지까지 받은 기억이 났다.
그 뒤엔…… 마치 꿈을 꾸듯 신들의 이야기를 직접 보고 듣고 느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난 환상의 경계를 넘어서 현실로 들어선다는 메시지를 보는 순간 저번처럼 부분 융합이 일어날 것이라 예상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았다.
때문에 머릿속이 굉장히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그 예상은 맞았지만…… 당신에게만큼은 다른 힘이 작용한 것뿐입니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
이 목소리는…… 매우 익숙했다.
난 재빨리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그가 서 있었다.
나와 계약을 맺었던 그…… 그리고 얼마 전에 한 번 더 만났던 그, 바로 가이아였다.
“……당신…….”
“제가 곧 다시 만날 것이라고 말씀드렸죠.”
천천히 미소 짓는 가이아.
그런데 그가…… 변하고 있었다.
그는, 아니, 이젠 그녀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가이아.
남자에서 여자의 모습으로 천천히 변해가는 가이아…… 나는 그런 가이아를 보며 그저 조용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젠 본모습으로 당신을 만날 수 있겠군요.”
밝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가이아.
그…… 아니, 그녀는 내가 꿈속에서 봤던 태초의 고신 가이아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죠?”
난 쓸데없는 질문을 하기보단 포괄적인 질문으로 했다.
“간단합니다. 때가 되었습니다. 모든 운명의 교차점이 겹쳐졌습니다. 이제 남은 건 교차된 운명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는 것뿐입니다.”
“운명? 교차점? 그게 무슨 말이죠?”
“……천천히 이제 당신은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제는 알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신, 아니, 진…… 태초의 고신 중 한 명이자 빛의 대표였던 당신은 이 모든 일의 중심에 서 있는 존재입니다.”
띠링, 제한 코드 해제. 모든 비밀 코드가 해제됩니다.
쿠쿠쿵!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천둥소리.
그와 함께 미친 듯이 떠오르는 이상한 기억들.
“……으으…… 아아아아아!!”
단지 한마디의 말을 들었을 뿐인데…… 진이라고 불렸을 뿐인데……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이상한 기억들이 마구 생겨났다.
“각성(覺醒)입니다. 진은 스스로의 신성을 흩어버리고 평범한 영혼이 되었지만…… 사실 그는 절대 평범한 영혼을 소유할 수 없었습니다. 흩어진 신성 역시 소멸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영혼은…… 진의 영혼. 보통의 영혼이라면 한 번의 윤회로 소멸되겠지만 당신은 억겁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한 번도 윤회를 거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당신이 살아온 모든 삶의 기억들은 영혼 속에 저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기억들이 모두 되살아나고 있는 것입니다.”
가이아의 설명이 들렸지만…… 그보다 지금은 머릿속으로 미친 듯이 밀려드는 기억의 홍수 때문에 귀를 기울일 수가 없었다.
“제가 임시로 막아놨던 기억들도 전부 회복될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당신이 빛의 신으로서 가졌던 기억들도 대부분 회복될 것입니다. 물론 기억이 회복된다고 해서 신성(神性)도 같이 회복되지는 않을 겁니다. 그것은 당신이 직접 흩어버린 것이었기에…… 다시 모으는 방법도 당신만이 알고 있겠죠.”
가이아의 말처럼 모든 게 하나씩 전부 회복된다.
그런데…….
그런데……
기억이 회복될 때마다 난 절망을 느낀다.
절로 눈물이 흐른다.
아…….
아드리안!
그녀가…… 그녀가…… 계속 나를 떠나간다.
“……아드리안에 대한 기억이 살아났군요. 어쩔 수 없습니다. 그녀에게 걸린 저주는 우리들도 풀지 못하는…… 심지어 저주를 건 어둠의 여신 닉스마저 풀지 못하는 절대적인 저주. 그녀는 당신과 마찬가지로 영혼이 정화되는 윤회의 법칙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절망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당신이 그녀의 영혼을 찾아간다고 해도…… 그 절망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가이아의 말은 사실이었다.
난 영혼의 끌림을 이용해 늘 아드리안을 찾아갔다.
하지만 아드리안은 그 빌어먹을 저주 때문에 언제나 절망적인 삶을 살았다.
난 그것을 막지 못했고…… 늘 똑같이 좌절했다.
그런 삶이 무수히도 많이 반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