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 거울의 군주 ― 3
* * *
‘그냥 평소처럼 싸워선 내가 불리하다.’
녀석은 나를 복제했다.
그래서 내가 사용하는 모든 스킬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전투 방식도 모두 꿰뚫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놈은 나보다 훨씬 손쉽게 스킬을 사용한다.
난 기본적으로 조합 스킬을 사용하려면 머릿속으로 마력 분배나 조합 타이밍을 계산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스킬에 알맞은 마력을 직접 만들어 낸다.
물론 이제는 워낙 익숙해져서 모든 작업이 빠르게 끝나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저놈은…… 아예 이러한 작업을 하지 않는다.
그저 흉내를 내듯 사용할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 위력은 내가 사용하는 것과 완전히 똑같아 오히려 발동 시간이 짧아 더 위력적으로 보이는 스킬도 있을 정도였다.
평소의 난 스스로도 사기 캐릭터라고 생각할 만큼 강했다.
그런데 그런 나를 복제한 도플갱어 로드는 원본인 나보다 더 사기 캐릭터처럼 느껴졌다.
‘놈은 나다. 생각하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완벽하게 나와 같다. 그렇다면 난…….’
난 생각을 바꿨다.
단순히 최선을 다해 전투를 치르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렇게 해서는 도저히 도플갱어 로드를 꺾을 수 없었다.
‘……나를 버린다.’
모든 걸 버려야 했다.
기본적인 전투 마인드부터 작은 습관까지 모드 걸 버려야 내 자신을 꺾을 수 있었다.
말은 쉬웠다.
하지만 그걸 행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웠다.
어떻게 내가 내 자신을 버릴 수 있겠는가?
설사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해도 그건 오랜 시간이 필요한 지루한 작업이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난 그걸 지금 바로 해내려는 중이다.
당연히…… 쉽지 않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마갑이라도 꺼내 보지 그래? 아니면 자이언트라도?”
놈은 마치 내가 꺼내면 자신도 꺼내주겠다는 듯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이걸로…… 놈이 내 모든 걸 얻었다는 것은 확실해졌다.
이것은 곧…… 힘으로 놈을 이기려고 했다간 오히려 내가 다친다는 뜻이었다.
작용과 반작용.
놈에게 강한 힘을 사용하면 할수록 놈은 그 힘을 더 강한 힘으로 나에게 돌려보냈다.
힘으로 꺾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스으윽.
난 손에 들고 있던 엘레멘탈 블레이드를 아공간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조용히 가만히 서서 놈을 바라보았다.
“후후, 포기한 건가? 뭐, 그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겠군.”
놈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고통 없이 보내주마.”
츠츳!
두 자루의 검에 맺히는 흑백의 오라.
난 그런 그를 보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는 또 다른 나다.’
머릿속에 천천히 그려지는 나의 모습.
나라면 어떻게 생각할까?
나라면 어떻게 행동할까?
나라면 어떻게 판단할까?
나라면 어떻게 느낄까?
지피지기(知彼知己)라고 했던가?
적을 알고 나를 알라고 했던가?
지금 나에겐 지피지기가 아닌 오로지 지기(知己)만 남아 있었다.
적은 적이면서 동시에 나였다.
나는 지금의 나를 버림으로써 내 앞에 적으로 서 있는 나를 알려고 했다.
나를 버리고 또 다른 나를 느낀다.
그것이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모든 것을 없애 버렸다.
내 몸의 모든 감각, 모든 생각, 모든 기억을 지운다. 그렇게 천천히 내 몸이 사라져 간다.
그렇게 내가 사라져 가자 점점 내 앞에 있는 또 다른 내가 확연하게 느껴진다.
바로 그 순간…… 나에게서 나로 이어지는 하나의 기운이 느껴졌다.
사아아아!
확실히 느껴진다.
이것은 나의 기운…… 나의 공격이다.
스윽. 파파팟!
눈을 감은 상태에서 조용히 왼쪽으로 한 걸음 움직였다. 그 순간 내 오른쪽 어깨를 살짝 스치고 지나가는 강력한 오러의 기운.
이것은 100% 정확한 나의 기운이었다.
‘오로지 나뿐이다. 이곳에 존재하는 건…… 나 혼자뿐이다.’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이곳은 놈의 공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이곳은 나의 공간이었다.
애초에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힘은 나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단지 놈은 그런 힘을 이용해 나를 공격할 뿐이었다.
즉…… 지금 이 순간 내 가슴을 향해 쏟아져 오는 저 기운도 결국 나의 기운이라는 소리였다.
‘모든 것은 결국 나에게서 나와 나에게로 통한다.’
번쩍.
난 눈을 떴다.
그리고 눈앞의 기운을 부정했다. 아니, 그 기운에게 명령을 내렸다.
‘멈춰!!’
이것은 나의 기운.
나의 힘.
이것을 내가 통제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꽈르릉!
도플갱어 로드와 나 사이에 강력한 오러의 덩어리가 멈춰 섰다.
“……어, 어떻게?”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표정을 짓는 도플갱어 로드, 아니, 디아콘 제르미냐.
“깨달았거든…… 너의 정체를…….”
난 이제야 웃을 수 있었다.
확실히 디아콘 제르미냐는 보통의 존재가 아니었다. 어쩌면 그 어떤 존재보다 강력할 수 있는 이였다.
하지만 그건 깨닫지 못한 이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었다.
나는 디아콘 제르미냐의 본질을 깨달을 수 있었다.
녀석은…… 일종의 심마(心魔)였다.
누구의 마음속에도 존재할 수 있는 심마. 심지어 초월자들도 완벽한 존재인 신이 아니었기에 마음속 깊은 곳에 심마를 지닌 경우가 종종 있었다.
디아콘 제르미냐는 그러한 심마들의 최종 진화체였다.
모든 심마가 모여져 만들어진 초월적인 존재.
즉, 놈은 실제로 존재하는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애초에 놈이 만들었다는 도플갱어들 역시 똑같았다.
지금까지 물질계 몬스터라고 생각했던 도플갱어들. 하지만 사실 그들은 정신계 몬스터였다.
실체가 없는 정신계 몬스터.
결국 디아콘 제르미냐 역시 내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존재일 뿐이라는 소리였다.
“……대단하군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디아콘 제르미냐. 그는 내가 깨달음을 얻는 동시에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놈은 나의 심마로 인해 만들어진 존재였기에 누구보다 빨리 내 안에서 일어난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모든 게 환상인 거야?”
어떤 원리로 도플갱어가 만들어지는지는 깨달았지만 이게 진짜 환상인지, 아니면 환상을 기초로 만들어진 현실인지 그것은 아직 알지 못했다.
“환상? 현실? 후후후……. 그걸 나누는 기준이 뭐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지금 당신이 살고있는 현실조차도 환상이 될 수 있고…… 당신이 환상이라고 생각했던 세상도 현실이 될 수 있는 겁니다. 그걸 굳이 기준을 세워 나누는 건 어리석은 짓이죠. 거울 속의 세상이…… 단지 이 세상을 비추는 그림자 같은 세상이라는 생각은 버리세요. 거울의 안과 밖 둘 중 어느 곳이 진짜 세상인지는 그 누구도 모르는 법이랍니다. 아니…… 어쩌면 두 곳 모두 진짜일지도 모르죠.”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하는 제르미냐.
난 그의 말을 들으면 뭔가 요상한 느낌이 들었다.
“……어쨌든 이걸로 끝이군요.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습니다. 이 세상을 부정하는 방법으로 빠져나가는 이들은 몇 번 경험했지만 아예 이 세상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이를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이미 각성한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각성? 그게 무슨 말이지?”
아까부터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그를 향해 물었다.
“글쎄요. 그건 당신 스스로 알아내는 게 좋겠군요. 쉽게 답을 알게 되면 그만큼 허무해지는 법. 답을 알고 싶다면 좀 더 노력해 보세요.”
그는 더 이상 나를 공격하지 않았다.
아니, 공격을 할 수 없었다.
이미 그가 가진 모든 힘은 내 지배권에 들어왔다. 그가 공격을 원한다고 해도 내 허락 없이 그 힘들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그가 지배하던 세상을 내가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노력하라…….”
지금까지도 꾸준히 노력해 왔다.
한 번도 나태하게 지낸 적이 없었다. 마치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미친 듯이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왜 그런 것일까?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마땅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게임이 좋아서? 재미있어서? 강해지고 싶어서?
근데 이것들은 모두 근본적인 원인이 되지 않았다.
“……고민은 그만하시죠. 어차피 당신이 거슬러 가고 있는 그 길을 계속 걷다 보면 모든 의문이 다 풀릴 겁니다. 그게 당신의 운명이죠.”
스스스스.
천천히 옅어지는 흑백 세상.
온통 흑백으로 되어있던 세상이 점점 원래의 색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자아(自我)를 이겨낸 당신이라면 충분히 그 길의 끝에 설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잊지 마세요. 그건 단지 또 다른 새로운 도전의 시작이자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인 것을…….”
사아아아아아~
그 말을 끝으로 디아콘 제르미냐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동시에 프로젝트 S를 습격했던 도플갱어들도 모두 사라졌다.
다시 원래의 색을 되찾은 세상.
그와 함께 멈춰 버렸던 유저들도 모두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어?”
“으음?!”
“크으……?”
어리둥절한 표정들.
그도 그럴 것이 피 터지게 싸우던 상대가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졌으니 당황할 만도 했다.
물론 일련의 과정들을 전부 본 나는 전혀 이상하지 않게 느껴졌지만 다른 이들은 모두 잠깐 시간의 흐름에서 제외되었다가 다시 원래대로 복구된 것이라 충분히 이상하게 생각할 만했다.
“자, 도플갱어는 모두 제거되었습니다.”
난 일단 사람들을 진정시키며 주변을 정리했다.
그들에게 모든 것을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 단지 내가 그들이 나타난 원인인 천장의 검은색 구체를 제거했다고 둘러대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적이 사라진 것만으로도 크게 기뻐할 일이었음으로 왜 사라졌는지를 따질 사람은 없었다.
이렇게 우리는 큰 위기를 빠져나와 드디어 거울의 미궁을 탈출할 수 있었다.
우리는 거울의 미궁을 벗어나 드래곤의 둥지이자 세상의 중심인 테르코나로 들어섰다.
거울의 미궁을 통해 들어왔기 때문에 이곳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단지 느낌과 감만으로 판단해 보면 꽤 깊은 지하일 것이라 생각되었다.
우리의 목적지는 이 테르코나의 산꼭대기 부근이었다.
죽음의 산맥부터 암흑지대, 암흑계곡, 그리고 거울의 미궁까지…… 꽤 긴 거리를 전력으로 돌파했지만 사실상 진짜는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테르코나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테르코나는 어떤 구조로 되어있는지,
아무것도 모른다.
하지만 먼저 겁을 먹지는 않았다.
삶은 어차피 도전의 연속. 도전이야말로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가장 큰 힘의 원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