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 거울의 군주 ― 2
* * *
“후우…… 이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요.”
길게 한숨을 내쉬던 놈은 천천히 나를 바라보았다.
“……설마 나를 깨울 수 있는 존재가 이곳에 찾아올 줄은 몰랐어요. 그 정도의 신성(神性)을 지닌 존재가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재미있군요.”
그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곤 천천히 나를 아래위로 살펴보았다.
“허…… 설마 아직 각성(覺性)조차 하지 못했나요? 이런…… 이거야말로 엄청난 우연의 일치군요. 뭐…… 어쨌든 덕분에 몇만 년 만에 세상을 구경하게 되었으니 감사하다고 해야 할까요?”
“각성? 몇만 년? 도대체 무슨 소리지? 넌 누구냐?”
난 놈이 하는 소리를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도플갱어인 것은 확실한데…… 도대체 어떤 놈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하, 조급해할 것 없습니다. 어차피 당신은 곧 모든 걸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제가 누구냐고요? 제 이름은 디아콘 제르미냐. 고대어로 위대한 지배자란 뜻이죠. 뭐, 외부적으로 거울의 군주라는 호칭으로 더 잘 알려졌지만…… 어쨌든 저는 여기에 멈춰 있는 이 녀석들을 만들어 낸 존재입니다.”
그는 도플갱어들을 가리키며 천천히 얘기했다.
도플갱어를 만들어 낸 존재라면…… 즉, 놈은 도플갱어 로드쯤 된다는 뜻이었다.
한마디로, 우리가 예상했던 거울의 미궁 끝에 존재하는 보스 몬스터가 바로 이 녀석이란 얘기였다.
“과연…… 순순히는 넘어갈 수 없다는 건가? 이 도마뱀 녀석들, 철저히 준비해 놓았군.”
나는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새삼 드래곤의 준비성에 치가 떨릴 정도였다.
“흐음…… 설마 그 도마뱀이…… 드래곤이라 불리는 그 녀석들을 지칭하는 건가요?”
“후후, 잘 아는군.”
난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이런, 이런…… 이거 정말 웃기는군요. 감히 저를 그 녀석들의 떨거지 정도로 보시다니요. 아!! 그렇군요. 시간…… 그 긴 시간 동안 정말 그 녀석들이 제 왕국 위에 자신들의 왕국을 세웠군요. 이거 정말 치욕스러운 순간이네요.”
그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마치 드래곤들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것 같은 그의 언행에 난 살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기껏해야 무식하게 오래 사는 능력밖에 없던 놈들이 신의 힘을 조금 나누어 받았다고 설레발을 칠 때부터 짜증이 났었는데…… 이거 진짜 웃기게 되었군요.”
“지금 너는 네가 드래곤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건가?”
“관계가 없지는 않지요. 제가 이렇게 이곳에 봉인되었던 건 놈들 때문이니까요.”
“봉인? 그렇다면 설마…… 너도 초월적인 존재인 건가?”
나는 봉인이란 얘기를 듣자마자 지금까지 내가 수없이 만나왔던 초월적인 존재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어쩌면 난 또 한 번의 행운을 만났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드래곤과 반목하는 초월적인 존재를 만났을 땐 늘 나에게 이득이 되는 일만 일어났던 것이다.
“호오~ 잘 아는군요. 맞습니다. 전 초월적인 존재로서 한때는 세상의 뒷면을 지배했죠.”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하는 도플갱어 로드.
“그렇다면…… 왜 우리를 공격하는 거지? 오히려 우리를 도와 드래곤 놈들을 해치워야 하는 거 아닌가?”
“흐음…… 제가 드래곤들을 해치우고 싶은 건 사실인데, 그렇다고 해서 당신들을 공격하지 않아야 되는 이유는 모르겠군요.”
“적의 적은 친구란 말도 있잖아. 결국 공통의 적을 가진 건데 서로 도울 수도 있고, 보다 쉽게 적을 상대할 수 있잖아.”
“하하하하. 뭘 모르시는군요. 제가 살아가는 세상은 오로지 한 명만이 모든 걸 소유하는 곳입니다. 심지어 그것이 적이라고 해도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은 생각 따윈 없습니다. 친구? 적어도 제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말이죠.”
“……도대체 그건 무슨 논리지?”
난 황당하단 표정을 지으며 나와 똑같은 모습을 한 도플갱어 로드를 바라보았다.
“당신의 이해 같은 걸 바라지는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그림자들을 지배할 때부터 난 늘 혼자였고, 오로지 저만이 모든 걸 소유했습니다. 비록 그러한 저만의 세상을 신의 힘을 얻은 도마뱀들에게 빼앗기고 이렇게 봉인되어 지하에 처박혔지만…… 그래도 전 여전히 거울의 군주입니다. 세상의 모든 이면(裡面)을 지배하던 한 차원의 주인이었단 뜻이죠.”
“…….”
“말이 길어졌군요.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적어도 제가 당신들이 그토록 원하는 그 일을 대신해 줄 순 있으니까요. 물론 당신들의 도움 없이…… 오로지 내 힘만으로 그렇게 만들 생각이지만요.”
미소 짓는 도플갱어 로드.
그는 여기서 우리를 모두 해치우고 자신이 직접 드래곤을 만나러 가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군……. 천마도…… 천화신도도…… 그리고 너도 모두 같은 초월자지만 서로 전혀 다른 가치관을 지닌 것이었어. 초월자는 완벽한 신(神)이 아니라 단지 신성(神性)을 지닌 반신(半神)이었던 거야.”
난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이제야 모든 게 정리되었다.
초월자라고 해서 모두 같은 가치관을 지닌 건 아니었다.
그들은 완벽한 존재인 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행동했다.
그렇기에 어떤 초월자는 우리를 돕고, 어떤 초월자는 우리를 무시하고, 또 어떤 초월자는 우리를 집어삼키려고 하는 것이었다.
“이제야 제대로 이해한 것 같군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도플갱어 로드, 아니, 정확하게 디아콘 제르미냐 또는 거울의 군주라고 불러줘야 하나?
어쨌든 놈은 마치 모든 일이 결정이라도 난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디아콘 제르미냐…….”
난 그런 그를 불렀다.
“네? 마지막으로 할 말이라도 남았습니까?”
끝까지 철저하게 나를 무시하는 그.
나는 그런 그를 보며 슬쩍 웃었다.
“……옛날 말에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안다는 말이 있거든? 근데 넌 네가 무조건 나보다 길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말이야…… 과연…….”
천천히 고개를 들어 놈을 바라보았다.
“……그럴까?”
초월적인 존재?
거울의 군주?
차원의 주인?
모두 필요 없다.
내 앞을 막겠다면, 나를 공격하겠다면 그냥 적일 뿐이다.
적(敵)을 구분하는 데 등급 따위를 매기지 않는다.
적은 적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촤륵! 스르릉!
엘레멘탈 블레이드를 뽑았다.
상대가 적이라는 걸 확인했으니 이제 남은 건 단 하나.
바로 싸우는 것뿐이었다.
07. 나를 이기는 법
* * *
디아콘 제르미냐.
도플갱어의 로드인 그는 나를 복제했다.
로드의 특별함인가?
놀랍게도 그는 나와 완벽하게 똑같은 능력을 지녔다. 마치 두 명의 내가 존재하는 것처럼…… 그는 내가 가진 모든 능력을 사용했다.
심지어 내가 자주 사용하는 조합 스킬부터…… 전투의 전반적인 취향까지 나와 같았다.
마치 거울을 앞에 두고 그 거울 속의 나와 싸우는 느낌이었다. 왜 그가 거울의 군주라 불리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지배했다는 이면의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도 알 수 있었다.
“상대에 따라…… 힘이 결정되는 건가?”
잠시 뒤로 물러난 난 그를 향해 물었다.
“뭐, 대충은……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게 하나 있어.”
고개를 끄덕이며 어느 정도 인정한다는 표정을 짓던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지금 너와 내가 서 있는 이곳은 내가 지배하는 나만의 세상……. 이곳에 적용되는 몇 가지 법칙은 네가 살던 세상과는 전혀 다르지. 그렇기에 난……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다.”
미소 짓는 디아콘 제르미냐.
그의 미소 속에는 엄청난 자신감이 숨겨져 있었다.
“개소리!”
살짝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난 그저 허세를 부리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그를 꺾을 가능성은 제로(0)라는 뜻이었다.
한마디로 전혀 승산이 없는 전투를 하고 있다는 뜻이었는데…… 난 그걸 용납할 수 없었다.
파파팟!
노도(怒濤)와 같은 기세로 내뿜어지는 오러.
상대가 나라면.
그에 걸맞게 상대하겠다.
지상 최고의 적.
그 어떤 존재보다 더 강한 적을 상대한다고 생각하고 모든 힘을 개방하겠다.
꽈과광!
어디까지 복제한 것일까?
내 특수한 타이틀과 스킬들을 모두 복제한 것일까?
아수라는? 레드 크로우는?
과연 거기까지 복제했을까?
정확히 놈이 어느 정도까지 내 능력을 복제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다.
바로 놈이 자신감에 가득 차 있다는 사실.
그것은 즉…… 놈은 내 예상보다 훨씬 많은 힘을 복제했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파팟!
퀵 블링크를 이용해 내 공격을 너무나 쉽게 피해 버리는 놈.
그놈의 손엔 어느새 내가 들고 있는 엘레멘탈 블레이드와 완전히 똑같은 모습을 한 흑백의 양손 대검이 들려 있었다.
“이렇게…… 하는 거였나?”
휘잉!
고오오오오오오!
놈이 가볍게 검을 휘두르자 무시무시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내가 주력으로 사용하는 조합 스킬 중 하나인 엘레멘탈 버스터 데몰리션이었다.
“큭!”
놈은 너무나도 쉽게 내가 만들어낸 조합 스킬을 사용했다.
콰과과광!
나 역시 놈과 마찬가지로 퀵 블링크를 이용해 재빨리 폭발 범위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놈은 그런 나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스스슥!
유수행.
내가 사용하는 보법 중 가장 완성도가 높고 가장 신묘한 보법.
놈은 그러한 유수행 보법을 완벽하게 재현하며 나에게 따라붙었다.
그리곤 곧장 나를 향해 두 자루의 총을 겨누었다.
레드와 이글의 완벽한 복사판.
정말 징그러워지려고 했다. 어떻게 이렇게 완벽하게 나를 복제할 수 있을까?
심지어 이러한 전투 스타일마저도 복제하다니…… 너무 완벽해 닭살이 돋을 지경이었다.
꽝! 꽝!
쩌저정!
난 황급히 방패를 꺼내 들어 가까이에서 터진 두 발의 총격을 막아냈다.
찌릿찌릿!
방어는 완벽했지만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막은 탓에 어느 정도 타격이 있었다.
그렇게 내가 방어를 하며 살짝 뒤로 밀려나자 놈은 재빠르게 레드 이글을 역소환시키고 곧장 아쿠아와 소울 블레이드를 꺼내 들었다.
가까운 거리의 근접전에서 쌍검을 즐겨 사용하는 것 역시 내 특징 중 하나였다.
이 녀석은 정말…… 완벽한 나의 그림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