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 믿기 힘든 진실 ― 1
* * *
“역시 어리석어…….”
칼슈타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사방을 둘러보며 웃었다.
대륙 전체에 뿌려진 그의 패밀리어들은 대략 100만 마리. 그 패밀리어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그에게 정보를 전해주고 있었다.
패밀리어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은 모두 칼슈타인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에 단지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머릿속엔 방대한 양의 정보가 쌓였다.
물론 그것을 정리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지만 일단 중요한 건 그가 대륙 전체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에 매우 만족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똑같아. 어딜 가나 기득권을 지닌 종족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대단한 걸 가졌는지 모르고 어리석게 행동하지.”
그는 아주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수많은 종족을 봐왔었다. 그런 그였기에 인간이란 종족도 결국은 차원의 일그러짐으로 흡수되어 사라질 그런 어리석은 필멸의 종족일 뿐이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지나면 되겠군.”
모든 준비는 착실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변수를 완전히 차단하기 위해 일족이 가진 모든 능력을 개방했다.
이렇게까지 전력을 다하기는 처음인 것 같았지만 혹시라도 타이탄 일족처럼 버림받지 않기 위해선 최대한 노력할 필요가 있었다.
“인간들이여…… 마지막 유희를 마음껏 즐겨라. 후후후후.”
칼슈타인은 천천히 미소 지으며 뒤로 돌아섰다.
우드득!
붉은색 머리카락을 지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던 그의 등에서 거대한 날개가 튀어나왔다.
변하는 그의 몸.
그는 한 마리의 거대한 레드 드래곤이 되었다.
[어둠의 군단이여!! 파멸의 날이 머지않았다.]
우우웅!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그의 외침.
그 속에선 당장에라도 세상을 없애버릴 수 있을 것 같은 강대한 힘이 느껴졌다.
* * *
14시간.
내가 회색 바위 지역을 돌파하는데 걸린 시간이다.
원래는 더 빨리 돌파할 수도 있었는데 중간에 중간 보스급 몬스터인 검은바위거인을 만나는 바람에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어쨌든 대략 20일(게임시간)이 조금 안 되는 시간이 소모되었지만 성공적으로 죽음의 산맥을 통과했다.
지금 기분은 어지간한 레이드를 한 10개 정도는 뛴 거 같은 느낌이었다.
누적된 정신적 피로 덕분에 난 죽음의 산맥을 빠져나오자마자 안전지대를 설정하고 게임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무려 10시간을 내리 잤다.
‘One’을 시작하고 평균적으로 하루에 5시간만 잔 것이 비교하면 굉장히 긴 수면시간이었다.
그렇게 숙면을 취하고 일어난 후 간단히 식사를 해결한 뒤 난 다시 게임에 접속했다.
이 모습만 놓고 보면 완벽한 가상현실 게임 폐인 일명, 가현폐인이었지만 사실 이미 나에겐 현실과 가상현실과의 구분이 없어진 지 오래였다.
특히 가상현실에서 현실을 경험하고 난 뒤부터는 절대 두 세상을 따로 구분하지 않았다.
하나의 세상.
아니 하나가 될 수도 있는 세상.
얼마 전 있었던 ‘광화문 미스터리’ 때문에 정부 차원에서, 아니 세계 연합인 UN 차원에서 광범위한 조사를 벌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물론 그들이 알아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어떤 증거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남은 건 오로지 그걸 목격한 증인들의 기억이기 때문에 그들이 얻을 수 있는 건 허무맹랑한 증언과, 몬스터들, 내가 남긴 흔적이 전부일 것이다.
어쨌든 현실과 가상현실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지금 난 일단 내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나름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다시 게임에 접속한 난 곧장 무림맹으로 향했다.
동대륙에서 얻어야 하는 동료의 숫자는 31명.
난 그중 25명가량을 무림맹 소속으로 채울 생각이었다.
꼰정과 그 일행들이 총 5명.
그리고 꼰정이 직접 추천한 20명의 고수들.
서대륙과 다르게 동대륙은 워낙 결속력이 좋아 꼰정의 추천만으로도 충분했다.
‘무황’ 길드의 꼰정 외 4명.
‘무당검문’의 장삼 외 3명.
‘소림천하’의 피어스 외 3명.
‘천외천’ 문파의 천음마후 외 3명.
‘생사곡’의 혈혈검마 외 2명.
‘세가연합’의 남궁무적 외 2명.
‘독문연합’의 당당외 2명.
‘태극문’의 소룡외 2명.
…….
…….
25명의 유저와 피의 맹약을 맺었다.
꼰정이 워낙 준비를 잘해놓아 그들과 맹약을 맺는 건 일사천리로 빠르게 처리되었다.
그들 모두가 동대륙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고수들이었다.
재미있는 건 대충 나와 혈주작의 관계를 대충 알고 있는 꼰정이 혈주작 쪽 랭커들은 아예 제외시킨 것이었다.
물론 혈주작이 현재 무림맹에서 반대하고 있는 백호성 투기장 사업을 시작한 장본인이라는 사실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어쨌든 덕분에 약간 껄끄러울 수도 있었던 상황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어쨌든 이로써 94명의 유저가 나와 피의 맹약을 맺게 되었다.
남은 건 이제 6명.
꼰정은 그 6명 중 3명도 이미 나에게 추천을 해주었다.
물론 그들은 꼰정이 어떻게 손을 쓰기 힘든 유저들이었기에 내가 직접 얘기를 해봐야 했다.
꼰정이 추천해준 3명의 유저는…….
투신(鬪神) 천위강.
불사마군(不死魔君) 한림.
신궁(神弓) 킬링타임.
이렇게 세 명이었다.
투신 천위강과 불사마군 한림은 천무칠성의 일원으로서 워낙 유명한 유저들이라 나 역시 잘 알고 있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언급된 신궁 킬링타임은 비록 천무칠성이나 사은자 같은 특정한 분류에는 소속되지 않았지만 서대륙과 동대륙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헌터(사냥꾼) 계열 유저라고 소문난 통합 레벨 랭킹 44위의 랭커였다.
이 세 명은 특별히 세력은 없었지만 동대륙을 대표하는 최고의 강자들이었다.
일단 난 이 셋 중 현재 무림맹의 맹주로서 백호성에 자리를 지키고 있는 천위강을 만나보기로 했다.
거의 명예직이나 다름없는 무림맹의 맹주였지만 그의 이름 석 자가 가지는 무게는 어지간한 문파의 그것을 능가했다.
그래서일까?
무림맹의 실세라는 꼰정도 그만은 함부로 하지 못했다.
그 역시 꼰정을 꽤 존중해 주었기 때문에 아직까지 무림맹에서 큰 문제가 생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동대륙에서 가장 강한 유저로 알려진 천위강.
나는 그를 만나기 위해 무림맹의 깊숙한 곳에 위치한 그의 거처를 찾아갔다.
조르르륵.
벌써 5잔째.
천위강은 조용히 내 말을 경청하며 계속 차를 따라 마셨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표정에서 지금의 기분이나 생각 같은 것이 드러났건만 천위강은 얼굴은 처음 만났을 때나 지금이나 전혀 변화가 없었다.
완벽한 포커페이스.
예전에 투기장 대회 결승에서 만났을 때 모습 그대로였다.
“……다 끝나셨습니까?”
천천히 나를 바라보며 묻는 천위강.
담담한 표정의 그에게선 왠지 모를 기품이 느껴졌다.
“네, 일단은 여기까지…… 더 자세한 얘기는 천위강 님의 확답을 듣고 하는 게 좋겠네요.”
“흐음…… 그렇군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천위강.
탁.
그는 탁자 위에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확실히 대단한 얘기였습니다. 하긴 무적자 님이 하실 얘기가 평범하지 않을 것이라고는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신입니다.”
“예, 신 님…… 그런데 제가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대답해주시겠습니까?”
“뭐죠?”
“이 세상…… 혹시 진짜로 존재하는 세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 있나요?”
너무나 갑작스러운 천위강의 질문.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하시는 거죠?”
지금까지 그 어떤 유저에게도 이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세상의 숨겨진 진실을 알고 있는 나였지만 그 누구에게도 얘기해본 적이 없었고, 그 누구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죠. 얼마 전 광화문에서 일어났던 그 미스터리한 사건…… 알고 계신가요?”
“네, 알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 제가 있었다면 믿어주시겠습니까?”
천위강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계속 얘기를 이어갔다.
“정확히 4마리의 몬스터와 한 명의 유저가 광화문 한복판에 나타난 그때…… 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곳에 있는 그 누구도 그 다섯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적어도 저는 한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괴물들은 ‘One’의 세상에 존재하는 몬스터였고 그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한 남자는…… 제가 언젠가 본 적이 있던 유저가 분명했습니다.”
“…….”
난 조용히 천위강의 말을 계속 들었다.
“남자가 사용한 스킬, 그리고 몬스터들의 움직임. 확실했습니다. 난 미친 듯이 그 남자를 따라 뛰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괴물들을 피해 도망가기 바빴지만 전…… 반대로 괴물들과 그 남자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천위강의 말이 계속될수록 난 왜 천위강이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주 힘겹게 몬스터들과 그를 따라잡았을 땐 이미 전투가 시작된 후였습니다. 경복궁에서의 혈투…… 난 그 혈투를 좀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 접근했지만 한 마리의 거대한 붉은 새가 나를 막았습니다. 그런데 전 그 붉은 새마저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
확신에 찬 천위강의 눈빛.
그는 이미 모든 사실을 머릿속에서 정리한 후인 것 같았다.
“자…… 그럼 이제 다시 묻겠습니다. 그때 경복궁에서 제가 본 그 남자…… 그가 무적자 님 본인이 맞습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오는 천위강.
그의 성격이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