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로드(The Lord)-203화 (203/250)

203. 찰나의 만남 ― 1

* * *

띠링, 마갑 아수라의 사용 가능 시간은 30초입니다.

한 줄의 시스템 메시지가 내 귓가에 울려 퍼졌다. 현실에서도 시스템 메시지가 들릴 것이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난 지금 그런 것들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현재 난 일루젼 팬덤을 연거푸 사용하며 생명력이 거의 바닥난 어보미네이션 킹의 턱 밑까지 파고든 상태였다.

당연히 이러한 상황에선 다른 것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이미 네 개의 팔들이 모두 잘린 체 심장을 꿰뚫린 포핸드 트윈헤드 오우거와 머리가 통째로 몸에서 분리되어 버린 자이언트 키메라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남은 건 오로지 이 한 마리.

어보미네이션 킹뿐이었다.

사실 상황은 매우 급박했다.

라르엘은 더 이상 막기가 힘들 것 같다고 외치고 있었고, 실제로 몇몇 사람들이 ‘환상의 대지’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난 그들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들이 피해를 입기 전에 마지막 남은 보스 몬스터를 잡는 것뿐이었다.

실제로 놈의 생명력을 거의 다 빼놨기 때문에 이제 마지막 결정타 한 방만 넣으면 끝이었다.

그리고 그 결정타를 넣을 기회는 바로…… 지금이었다!

스킬 융합, 상급 강기 검술 반월참(半月斬) + 상급 오러 스킬 오러 익스플러젼(Aura Explosion) + 기본 검술 회전 베기 + 최상급 검술 오의 블레이드 스톰(Blade Storm).

블레이드 허리케인(Blade Hurricane).

고오오오오!

난 엘레멘탈 블레이드를 들고 그대로 몸을 살짝 눕히며 회전 시켰다.

블레이드 허리케인의 힘은 오로지 한 점만을 향해 휘몰아쳤다.

그 점은 바로 어보미네이션 킹의 목.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진 어보미네이션 킹이 이 공격을 막을 가능성은 제로(0)였다.

콰드득!

오러의 힘이 집중되어 있던 엘레멘탈 블레이드가 강력한 회전력을 이용해 놈의 목을 파고들었다.

[크아아아아앙!]

어보미네이션은 때 늦은 괴성을 지르며 나를 자신에게서 떼어내려 했지만 이미 상황은 끝났다.

츠릿! 파아아앗!

놈의 두 손이 나를 잡아서 던지는 것보다 내가 놈의 목을 베어버리는 것이 더 빨랐다.

촤아아아!

쏟아지는 녹색 피.

게임 속이었다면 당연히 하얀빛 가루가 뿜어져 나왔겠지만 여긴 현실이었다.

이미 리치 위자드, 포핸드 트윈 오우거 그리고 자이언트 키메라를 잡으며 겪은 것이었기에 난 별로 놀라지 않았다.

쿠쿠쿵!

어보미네이션 킹의 커다란 머리가 몸에서 분리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허공에서 몸을 회전시켰던 나도 중심을 살짝 잃고 바닥을 뒹굴었다.

만약 상대해야 할 적이 더 남아 있었다면 바닥을 뒹구는 동시에 다음 전투 준비를 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후우~”

난 바닥에 누운 상태로 길게 숨을 내쉬었다.

현실에서의 레이드.

생각지도 못한 일을 겪은 난 정신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도 큰 피로를 느꼈다.

이 피로감이야말로 이곳이 게임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을 극명하게 증명해주는 것이었다.

게임 속에서 가능한 것들이 대부분 가능한 나였지만 이 피로감만큼은 어떻게 해결할 수가 없었다.

게임 속에서는 별로 느껴보지 못했던 것, 덕분에 난 가상현실이 아무리 대단해도 결코 현실이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어쩌면 전이가 일어나는 것도 궁극적인 가상현실은 진짜 현실이기 때문인 걸까?’

문득 든 생각.

정확한 건 아니었지만 왠지 전이의 한 부분을 이해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대장! 뭐해? 이상한 애들이 마구 몰려 들어와!! 더 이상 막는 불가능해!! 어떻게 좀 해봐!]

바로 그때 라르엘의 다급한 음성이 나에게 전해졌다.

환상의 대지 바깥쪽에서 사람들을 위협하며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있던 라르엘…… 녀석의 몰골은 상당히 좋지 않았다.

경찰이 발포라도 한 것일까?

라르엘의 몸 이곳저곳엔 살짝 혈흔이 묻어 있었다.

확실히 총이란 도구는 무섭다. 물론 그 이상으로 몬스터들도 무섭긴 하지만 현실의 화력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어쨌든 다친 라르엘을 무시하고 철저히 무장한 사람들이 환상의 대지 안으로 침투하고 있었다.

“으음…….”

뭔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상당히 곤란해질 것 같은 상황.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라르엘…… 일단 들어가 있어라.”

난 무척 지쳐 보이는 라르엘을 역소환 시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세 구의 거대한 몬스터 시체.

그리고 그것들을 놀랜 표정으로 쳐다보며 나의 눈치를 보는 경찰 특수부대의 요원들.

이대로 있다간 군대까지 동원될 것 같았다.

일단 혹시라도 오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모든 무기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이제 사용 가능 시간이 10초도 남지 않은 아수라는 조용히 아공간으로 돌려보냈다.

츠리릿!

아수라가 사라졌지만 난 여전히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두꺼운 회색의 후드망토를 눌러쓰고 있는, 게임 속에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던 나는 당연히 평범하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젠 아예 경찰병력이 나를 넓게 포위한 상황까지 이르렀다.

경찰병력이 들고 있는 총은 모두 나를 향하고 있다.

여차하면 발포도 주저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돌아가는 방법을 모르겠네.’

처음엔 그저 눈앞에 보이는 몬스터들을 처리해야 한다는 생각만 했었다.

그런데 막상 놈들을 처리하고 보니, 이젠 내가 어떻게 게임 속으로 돌아가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참 난감한 상황.

이대로 경찰 특공대에게 잡혀 줘야 하나?

아니면 포위를 뚫고 도망가야 하나?

결정을 빨리 내리지 않으면 최악의 경우 군인들까지 상대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바로 그때, 묘한 울림이 눈에 들어왔다.

지잉!

몬스터들의 시체에서 시작된 아주 작은 울림. 그 울림은 빠르게 커져만 갔다.

지이이잉!!

띠링, ‘더 로드’ 5차 전직 퀘스트의 마지막 관문인 ‘진정한 시련’을 클리어 하셨습니다.

띠링, 모든 것은 본래 존재해야 하는 곳으로 돌아갑니다.

기이이이이잉!

울림이 사방을 삼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내가 보고 있던 모든 것이 마구 섞이며 변해 버렸다.

번쩍!

‘돌아가는 건가?’

현실로 내동댕이쳐질 때와 비슷한 과정이 반복되었다. 당연히 난 게임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이 정확하게 맞지는 않았다.

하얀 세상.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그런 세상이었다.

난 본능적으로 이곳이 내가 가본 어떤 곳과 매우 유사하다는 걸 깨달았다.

정확히 두 번, 난 천마와 두 번을 만나며 이곳과 놀랍도록 비슷한 분위기를 가진 곳에 가봤었다.

물론 그곳은 세상의 모든 어둠이 모여 있는 것 같은 세상이었고 이곳은 반대로 세상의 모든 빛이 모여 있는 것 같은 세상이었지만 그 분위기는 거의 똑같았다.

“……또 초월적인 존재인 건가?”

난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이건 정말 뜻밖이군.]

“음!!”

갑자기 사방에 울려 퍼지듯 들려오는 목소리!

난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며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았다.

하지만 내 시야에 들어오는 존재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찾을 필요 없습니다. 이곳은 제 존재 그 자체…… 이 공간이 결국 접니다.]

공간 전체가 자신이라 말하는 목소리. 확실히 초월적인 존재가 맞는 것 같았다.

“당신은 누구죠?”

초월적인 존재라는 건 알았지만 정확히 누구인지 그게 궁금해졌다.

[가이아, 태초의 고신(古神) 가이아입니다.]

“……!”

분명 가이아라고 했다.

내가 그토록 찾던…… 나와 거래를 했다는…… 내가 궁금한 것들을 대답해줄 수 있는 가이아!! 난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이렇게 그를 만났다.

[압니다. 당신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그리고 당신이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내가 알고 있는 그 가이아가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당신과 저는 예전에 만난 적이 있었죠.]

“허…….”

막상 가이아를 만나고 나니 왠지 모를 허탈감이 생겨났다.

나에게 괴상한 기억을 선물한 존재.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거래를 한 존재.

가이아에 묻고 싶은 건 너무나도 많았다.

[그 궁금증을 모두 풀어주고 싶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어떻게 당신이 이 공간에 들어설 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죠?”

[억겁의 세월을 보내며 기다린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수많은 초월의 의지가 스스로를 희생시켰습니다. 아직 좀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 저는 미래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당신과 제가 한 거래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대답을 듣고 싶었다.

어떻게 만난 시스템 메시지…… 얼마나 기다려왔는데…….

[진정 모든 것을 다 알고 싶으신 겁니까? 모든 걸 알고 나면 후회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당신은 또다시 똑같은 거래를 원할지도 모릅니다.]

“…….”

가이아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 속 깊은 곳, 너무나 깊어 나 자신도 그 깊이를 모를 것 같은 곳에서 한 줄기 찌릿한 느낌이 내 몸을 관통하듯 훑고 지나갔다.

그 느낌은 마치 나에게 더 이상 알려고 하지 말라고 경고라도 하는 것 같았다.

너무나 무거우면서도…… 너무나 간절한……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느낌.

그 느낌은 내가 앞으로 나아가려는 것을 꽉 잡고 있었다.

[당신은 결국 모든 걸 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은…… 그저 이 모든 게 당신이 원했던 것이란 것만 알고 계시면 됩니다.]

“내가…… 내가 원했다…… 이 모든 걸 내…… 스스로 원했다…….”

멍하니 중얼거렸다.

도대체 난 무엇을 원했던 것일까?

간절히 알고 싶었지만 동시에 그것을 알게 되는 게 너무 두려워졌다.

[그리고 제가 원하기도 한 것입니다.]

단지 말뿐이었지만 그 안에는 가이아의 의지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의지를 몸 전체로 느낄 수 있었다.

“이 세상…… 어떻게 되는 겁니까?”

[지금과는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희생된 다른 차원들과는 분명 다를 것입니다.]

“희생된 다른 차원? 희생되었다는 게 무슨 뜻이죠? 그 차원들은 어떻게 된 건가요?”

[……없어졌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흡수되었습니다.]

가이아의 말에서 느껴지는 씁쓸함은 나마저도 씁쓸한 감정을 가지게 할 정도였다.

“혹시 당신은 게임 속 신화에 나오는 그 ‘가이아’가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알고 있는 신화는 모두 사실입니다.]

이번에도 역시 가이아의 말 속에서 큰 슬픔이 느껴졌다. 아마도…… 이러한 일들의 시작이 자신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정말로 내가 그토록 원했었다면 더 이상 부정하거나 궁금해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말대로……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그때를 기다리겠습니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모든 준비는 끝났습니다. 그리고 곧 때가 올 것입니다. 비록 이제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지만…… 당신은 스스로 현명하게 그때를 맞이할 것이라 믿습니다.]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받았죠.”

[아닙니다. 당신은 그 모든 것에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이미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겠지만…… 당신은 결코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단지…… 앞으로 일어날 수많은 일을 미리 알게 되었을 뿐이죠. 아주 큰 대가를 지불하고…….]

역시 예상대로였다.

난 과거로 돌아오지 않았다.

모든 건 내 착각…… 아니 이 태초의 고신이라는 가이아가 나를 착각하게 만든 것뿐이었다.

“후후, 그런가요? 그럼 떳떳하게 즐겨도 되는 거였군요.”

난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가가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가이아의 말처럼 아직 그것을 알 때는 아닌 것 같았다.

[……네, 마음껏 즐기세요. 당신이 원했던 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