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 침몰하는 거선(巨船) ― 2
* * *
저격을 끝낸 난 천천히 라이플을 아공간으로 돌려보내고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스킬은 사용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이동이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벌써 한 시간 동안 일곱 놈을 이 지역에서 잡았으니 이제 슬슬 이 지역을 뜰 때가 되었다.
물론 그래 봤자 환영의 숲을 벗어나지는 않겠지만 아마도 엠페러는 또 신나게 이 지역으로 몰려들 것이다.
난 그런 놈들의 뒤를 잡고 또 사냥을 할 생각이었다.
“날 잡겠다고? 후후, 어림없는 소리지.”
몇만, 아니, 몇십만이 몰려와도 어림없었다.
이곳은 한때 절망의 땅이라 불렸던 죽음의 숲.
그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지역이라 불리는 환영의 숲이었다.
이곳에서는 마스터 등급의 유저들도 파티를 이루고 조심스럽게 다녀야 했다.
자칫 잘못했다간 내가 아닌 몬스터한테 당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엠페러 연합 측의 유저들은 최소 열 명에서 많을 경우는 서른 명까지도 뭉쳐 다니는 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를 잡겠다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적어도 난 이 지역에서 움직임에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특히 타이틀 ‘드래곤 슬레이어’의 효과로 몬스터들은 별로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피해 다녔다.
그렇기에 내 움직임은 한없이 자유로웠고 반대로 엠페러 연합 측 유저들의 움직임은 한없이 경직되어 있었다.
그 차이는 대단히 큰 것이었다.
난 그 큰 차이를 이용해 최대한 치고 빠지는 형식으로 엠페러 연합을 괴롭히고 있었다.
내가 작정하고 숨으면 그 유명한 추적 스킬의 달인 스미레도 날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난 은신 계열 스킬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거기에 환영의 숲은 은신 계열 스킬에 보너스 효과를 제공하는 지역이었다.
내가 괜히 이 지역을 전장으로 선택한 게 아니었다.
어쨌든 여러 가지 이유 때문이라도 엠페러 연합은 절대 나한테 안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라트마는 그걸 모르는 것 같았다.
오히려 더욱 많은 병력을 투입해 날 당장 끝장내 버리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물론 그런다고 잡혀줄 내가 아니지만.”
웃음이 나왔다.
라트마의 어리석음은 나에게 큰 웃음을 선물했다.
죽음의 산맥, 환영의 숲에서 일어나고 있는 조용하지만 매우 치열한 길드전.
애초에 길드전이 성립조차 되지 않을 것 같은 전혀 다른 규모의 두 길드가 맞붙은 이 길드전은 모두의 예상을 보기 좋게 깨고 매우 일방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끝내는 데 얼마나 걸릴 것인가?’에서 ‘어느 쪽이 이길 것인가?’로 변하고 또다시 ‘어떤 방법으로 무너뜨릴 것인가?’가로 변한 후 마지막으로 ‘무너지는 데 얼마나 걸릴 것인가?’로 변해 버린 상황.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엄청난 크기의 거선(巨船) 엠페러가 초소형 제트 보트인 용문(龍門)을 만나 점점 침몰해 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 * *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아주 오래된 속담이 있었다. 그 거대한 규모의 엠페러가 단 한 사람을 막지 못했다.
그 한 사람의 공격에 조금씩, 아주 조금씩 무너져 내렸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 것을 잘 모르는 것처럼 그 누구도 엠페러의 몰락을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일은 분명히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고 있었다.
한 달(게임 시간), 라트마가 아주 큰소리로 외쳤던 그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한 달이 지났지만 여전히 죽음의 산맥, 환영의 숲에선 길드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 달이라는 시간은 엠페러 연합 측에겐 지옥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사망 경험자 15,211명.
중복 사망 경험자 6,207명.
세 번 이상 사망 경험자 1,315명.
물론 이 모든 사람이 신에게 사망한 것은 아니었다. 이중 약 20%는 몬스터한테 사망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몬스터한테 당한 것도 전부 대부분 신과의 전투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라 사실상 신에게 당했다고 보는 게 옳았다.
한 달 동안 비교적 큰 규모라고 할 수 있는 전투는 총 열 번이 일어났고, 그 전투에 참여했던 유저들은 80% 이상이 모두 사망했다.
나머지 20%는 도주한 유저들이었다.
열 번의 큰 전투 중 가장 큰 규모로 맞붙은 것이 삼천의 엠페러 연합 측 유저들과 신이 환영의 숲 서쪽 지역인 블러디 하피 출몰 지역에서 격돌한 것이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사망 2,811명, 도주 199명.
당연히 신은 살았다.
뒤늦게 후발 부대가 주변을 포위했지만 앞선 전투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진 블러디 하피들 때문에 오히려 사망자만 늘어난 상태로 포위망이 허물어졌다.
그 밖에도 몇백 명의 규모로 신과 충돌한 전투도 꽤 많았지만 전부 박살 나 버렸다.
신은 강했다.
그냥 강한 게 아니라 엄청나게 강했다.
한 달이 지난 지금 엠페러 연합은 엄청난 위기에 빠져 있었다.
아무리 엠페러 연합이 큰 규모의 길드이고 그 길드의 중심에 엄청난 자금력으로 무장한 대명 그룹의 후계자 주익(라트마)이 버티고 있다고 해도 단 한 명의 유저에게 속수무책으로 한 달 동안 당하고 있는 상황이 되자 수많은 연합 측 유저가 이탈을 하기 시작했다.
특히 환영의 숲에서 사망을 경험한 유저들 중 상당수는 신의 강함에 혀를 내두르며 서둘러 연합을 탈퇴했다.
이탈의 속도와 규모는 시간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라트마는 또다시 엄청난 규모의 골드를 뿌리며 이탈을 억지로 막아보았지만 그건 미봉책일 뿐이었다.
최전선에 나와서 싸우고 있는 연합의 핵심 유저들이 이미 등을 돌리기 시작한 상태에서 골드의 힘을 빌려 억지로 엠페러 연합을 유지하는 건 무리가 있었다.
그나마 그동안 군소리 없이 힘을 빌려주던 용병들도 더 이상의 계약 연장은 힘들 것 같다며 위약금까지 물며 전투에서 벗어났다.
황금은 귀신도 부린다고 했건만 지금은 귀신도 두려워 도망가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만큼 신이 강하다는 뜻이었다.
많은 사람이 ‘무적자’는 진정 무적이었다고 말하며 절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수많은 대형 길드도 감히 대적하지 못했던 초대형 길드 연합 엠페러.
그 엠페러를 혼자 힘으로 쓰러뜨렸다.
절대 침몰하지 않을 것 같은 거대한 함선 엠페러가 반쯤은 물에 잠겨 침몰하기 직전의 상황까지 몰려 버렸다.
누가 이런 엠페러의 모습을 예상했겠는가?
무적자가 엠페러를 무너뜨릴 것이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아무리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안다는 말이 있다지만, 대보기도 전에 이미 그 차이가 너무나 명확하게 보였던 두 길드였건만 짧다고 생각했던 쪽이 오히려 훨씬 더 길었고 길다고 생각했던 쪽은 아주 심각하게 짧았다.
어쨌든 이 길드전 때문에 신난 건 각종 게임 방송사와 여러 하이퍼 넷 사이트들이었다.
엠페러에서 탈퇴한 유저들이 마구 공급하기 시작한 위대한 ‘무적자’의 전투 동영상.
그 동영상을 본 사람들은 너도나도 그의 팬이 되었다.
심지어 ‘무적자’를 추종하는 이들이 생겨나고 그의 팬클럽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중이었다.
말 그대로 ‘무적자’ 신드롬.
정작 무적자가 정확히 누구라고 밝혀지지도 않았지만 많은 유저는 열광하고 또 열광했다.
인간은 천성적으로 원래 의외의 결과를 좋아하고 기적을 좋아하는 법이었다.
그렇기에 수많은 사람이 ‘무적자’에 열광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 몰랐다.
물론 이러한 현 상황을 저주하는 이들도 있었다.
특히 한 사람.
그는 사회적 체면도, 그리고 기본적인 이성마저 잃고 미친 듯이 발광하는 중이었다.
“죽여! 찾아서…… 죽여!! 죽이란 말이야!!”
라트마.
그는 반쯤은 미쳐 있었다.
“…….”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지켜만 보며 서 있는 카즈와 엘렌.
그들의 눈빛에선 안타까움마저 느껴졌다.
“오빠…… 진정하세요.”
그나마 라트마를 가장 잘 알고 그를 진정시킬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엘렌이 나섰다.
하지만 아무리 엘렌이라고 해도 지금의 라트마를 진정시키기엔 무리가 있었다.
“닥쳐!! 다 필요 없으니까…… 놈을 찾아! 게임에서건 아니면 현실에서건 상관없으니까 찾아서 죽이란 말이야!!”
게임 속에서 신을 찾는 건 둘째 치고 현실에서 신을 찾는 건 불가능했다.
‘One’의 유저 데이터베이스를 뚫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기에 현실에서 신을 찾는 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심지어 게임 속에서 사용하는 캐릭터 이름까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친분이 있는 유저들을 조사해 찾는 것도 불가능했다.
한마디로 현실에서 신을 찾을 가능성은 제로(0)였다.
“……죄송합니다.”
카즈는 그저 죄송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사실 카즈가 보기에도 라트마가 저렇게 광분하는 건 당연한 것 같았다.
이번에 현실에서 게임에 투자한 돈만 해도 거의 1억 위안(현재 환율 197로 계산해 대략 200억 원)이 넘었다.
물론 대명 그룹의 후계자인 라트마에게 1억 위안이 무리가 가는 금액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습게 사용할 수 있는 금액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건 돈보다 자존심이었다.
아예 대놓고 대명 그룹의 후계자 주익의 이름을 걸고 임했던 이번 길드전이었기 때문에 현재의 상황이 라트마에겐 너무나 치욕스러웠다.
정말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엄청난 치욕.
라트마는 그 치욕스러움 때문에 더욱 크게 분노하고 있는 것이었다.
특히 얼마 전 대명 그룹의 총수이자 주익의 아버지인 주태는 게임에 빠져 상당한 금액을 마구 쓰고 있는 주익에게 크게 화를 냈었다.
그리곤 더 이상 마음대로 큰돈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조치까지 해버렸다.
이미 주익이 게임 속에서 엄청난 굴욕을 당했다는 소문이 주태의 귀까지 들어간 상태였기 때문에 주익은 더욱 크게 질책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주태는 1억 위안의 돈을 썼다는 것보다 대명의 후계자가 굴욕을 당하고 다닌 것에 대해 더 크게 화가 난 상태였고, 주익은 꼼짝없이 주태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주태에 의해 자금줄이 거의 막혀 버린 주익.
덕분에 주익은 그동안 간신히 골드를 통해 유지해 오던 엠페러 연합도 더 이상 유지하기가 힘든 상황에 빠져버렸다.
이렇게 되면 복수는 완전히 물 건너가는 건 물론이고 그동안 열심히 키워온 엠페러마저 무너지게 생겼다.
이러니 주익, 아니, 라트마가 반쯤 미쳐서 날뛰는 것도 당연했다.
마구 날뛰던 라트마는 주변에 있던 집기들을 모두 망가뜨린 후에야 조금 진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잠시 서서 생각을 정리하는 것 같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라트마가 입을 열었다.
“……총공격을 한다.”
“네?”
“못 들었어? 총공격한다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엠페러 연합의 유저들을 동원해서 마지막 결전을 펼친다. 어차피…… 엠페러는 끝났다. 나도 당분간은 아버지 때문이라도 조용히 지내야 하기 때문에 더 이상 엠페러를 유지할 골드를 조달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마무리하는 건 내 자존심이 용납할 수 없다. 기필코 놈을 죽인다. 아주…… 갈기갈기 찢어 죽인다.”
우드득.
이를 가는 라트마.
그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분노를 삭이고 있었다.
“남은 골드를 모두 뿌려서라도 놈을 찾아라. 분명히…… 놈은 아직 이곳에 있다. 그놈이라면…… 절대 도망가지 않을 것이다. 이건 장담할 수 있다.”
워낙 많이 당해봐서일까?
라트마는 대략 신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신이라면 도망가지 않는다.
오히려 엠페러 연합을 기다린다.
라트마는 이러한 자신의 예상을 굳게 믿었다.
“……최후의 결전을 통해 엠페러의 진정한 힘을 놈에게 보여주겠다.”
라트마의 처절한 외침.
엘렌과 카즈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라트마와 함께해 온 그들이었지만 이렇게 망가진 모습은 결코 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더욱 안타까운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