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 5차 전직 퀘스트 ― 1
* * *
맹약의 신전.
‘One’은 기본적으로 다신(多神)의 존재를 허락하는 곳이었다.
실제로 ‘One’에는 수많은 신이 존재했는데 그중 가장 강력한 세력을 자랑하는 신은 일곱이었다.
빛의 신, 슈카르.
어둠의, 신 데론.
불의 신, 토슈,
물의 신, 뮤셀.
바람의 신, 디미오스.
땅의 신, 노튬.
맹약의 신, 쿤타.
이 일곱 신을 제외한 나머지 신들은 하급 신으로서 그다지 큰 신성을 발휘하지 못했는데 사실상 이 신들도 가이아의 하위 신이었다.
맹약의 신전은 이 신 중 가장 중립적이고 공정하다고 소문난 맹약의 신 쿤타를 믿는 신전이었다.
보통 모든 맹약과 계약은 이 쿤타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는데, 만약 그것이 지켜지지 않으면 쿤타가 오른손에 들고 있는 거대한 망치로 신벌을 내린다고 알려져 있었다.
쿤타가 왼손에 들고 있는 커다란 책은 일명 맹약의 서라 불리는 종이로써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약속이 적혀 있는 신서(神書)였다.
한 손엔 책을, 또 한 손엔 망치를 들고 서 있는 쿤타.
맹약의 신전에 들어가면 그 쿤타의 동상이 가장 먼저 유저들을 반겨주었다.
‘그래 봤자…… 전이(轉移)에 휘말린 불쌍한 초월자일 뿐.’
난 쿤타의 동상을 보며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차피 이들 신은 현재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을 믿는 신도(유저나 NPC)들 덕분에 미약하게나마 신성력을 이 땅에 유지시키고 있었지만 결국 그들도 ‘전이’에 휘말려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것이다.
물론 게임 설정에서는 주신(主神) 가이아가 완전히 봉인되며 덩달아 신력(神力)에 제한이 생겨 반 봉인 상태가 되어 있는 그들이었지만 적어도 난 그 설정이 거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애초에 그들이 힘을 못 쓰는 것은 모두 전이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들 역시 이 세상에 수많은 안배를 남긴 다른 초월적인 존재들처럼 이미 전이에 휩쓸렸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들은 이 세상에 절대 나타날 수 없었고, 기껏해야 신도들이 그들 스스로 만들어낸 신성력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뭐,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니까.’
잠시 쿤타의 동상을 보고 생각에 잠겼던 난 다시 생각을 정리하고 곧장 용기의 신전 안쪽으로 들어갔다.
길드 포인트.
사실 이 명칭은 정식 명칭이 아니었다. 그저 유저들이 편의상 부르는 것일 뿐이었다.
길드 포인트의 정식 명칭은 업의 정화(精華)였다.
그리고 이 업의 정화는 맹약의 업이라고 불리는 것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길드가 만들어지고 그 길드가 활약할 때마다 길드에는 맹약의 업이 쌓여간다.
특히 신규 유저들이 길드에 가입해 활동을 시작하면 이 맹약의 업은 더욱 많이 쌓인다. 사냥하고 몬스터를 잡을 때마다 일정 비율로 조금씩 쌓이는 게 이 업이었다.
기본적으로 맹약의 업이 1,000이 모이면 업의 정화(길드 포인트)가 1이 되었다.
즉, 1,000이 되는 업을 모으기 전까지는 사용하기도 힘든 것이 이 맹약의 업이라는 것이었다.
길드전은 이 맹약의 업을 빼앗을 수 있는 공식적인 전투였다. 맹약의 신 쿤타는 언제나 공평하게 길드전에 관여해 서로에게 맹약의 업을 빼앗거나 더해준다.
그래서 어떤 길드들은 아예 길드전을 통해 자신의 맹약의 업을 쌓기도 했다. 설사 맹약의 업을 업의 정화로 바꾸어놨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업의 정화도 1,000:1의 비율로 계산을 해 똑같이 빼앗겼다.
맹약의 업은 일종의 명성 같은 것이었지만 쓰임새가 매우 다양했다. 골드보다 더 소중한, 경험치보다 더 소중한, 업이라는 말은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맹약의 업을 업의 정화, 즉 길드 포인트로 바꾼 뒤 그것을 이용해 장악한 던전을 개발할 수도 있었고 길드 하우스에 각종 시설을 추가할 수도 있었다.
그뿐인가?
맹약의 신전에 그 업의 정화를 기부하면 길드 스킬(진법)까지 얻을 수 있었고, 신전을 통해 고급 아이템을 구입할 수도 있었다.
물론 당연히 길드의 랭크를 올려주는 역할도 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길드의 랭크가 올라가면 가입할 수 있는 길드원의 숫자도 늘어나고 동시에 구할 수 있는 길드 하우스의 크기와 길드의 권리까지 늘어났기 때문에 수많은 길드가 자신들의 길드 랭크를 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길드 랭크는 최하 F부터 최고 SS급까지 존재했다.
하지만 현재 SS급 길드 랭크를 지닌 길드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심지어 그 대단한 규모를 자랑하는 엠페러 연합도 S랭크 길드의 연합일 뿐이었다.
SS등급의 길드가 되기 위해선 A랭크 이상의 길드가 최소 40개는 연합을 해야 했다. 그렇게 연합을 한 후 길드 포인트를 아주 많이 소비해야 비로소 될 수 있는 것이 SS랭크였기 때문에 소규모 길드는 꿈도 꿀 수 없는 경지였다.
들리는 소문에 일단 길드를 SS랭크로 만들면 SS랭크 길드마스터 전용 스킬(대략 유니크 급, 또는 엘리트급 스킬이라고 함)까지 생기고 전용 아이템까지 구할 수 있다고 했기 때문에 길드 마스터들에겐 SS랭크의 길드가 꿈의 경지였다.
물론 내 전직 퀘스트의 내용은 SS등급보다 한 단계 아래 등급인 S등급의 길드 마스터가 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SS등급만큼이나 S등급의 길드도 만들기 어려운 것이었다.
유저들이 대략 분석해 놓은 정보를 보면 최소 1,000여 명의 길드원을 지닌 길드가 4∼5년간 열심히 노력해야 올라갈 수 있는 경지가 S랭크의 길드였다.
용문은 만들어진 지는 한 4년(게임 시간) 정도 되었지만 지금까지 세 명 이상의 길드원이 존재한 적이 없는 길드였다.
아무리 내가 길드전을 통해 맹약의 업을 빼앗았다고 해도 S랭크는 요원해 보이기만 했다.
“일단…… 조금이라도 올려놔야겠지.”
어쩔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랭크를 올리고 본격적으로 길드전을 펼쳐 마구 맹약의 업을 빼앗은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맹약의 신전 안쪽에 있는 맹약의 방 안에 존재하는 업의 거울.
이 거울에 두 손을 넣고 맹약의 부름을 실행하면 용문의 업이 증명될 것이다.
친절하게도 이 업의 거울 옆에는 맹약의 업에 대해 설명하는 NPC가 서 있었다.
맹약의 신전에서 활동하는 신관 정도 되는 NPC였는데 거울을 이용하려면 이 NPC에게 먼저 허락을 맡아야 했다.
“업의 거울을 사용하고 싶습니다.”
“……맹약의 업과 맹약의 정화에 대한 설명을 들으시겠습니까?”
“아니요.”
굳이 설명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대략적인 건 나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빨리 그동안 쌓인 업을 확인하고 그것으로 조금이라도 길드 랭크를 올린 후 다음 일을 하러 가는 게 좋아 보였다.
“그럼 10골드를 헌금하십시오.”
‘쳇, 비싸네.’
10골드면 결코 싼 금액은 아니었다. 하지만 첫 확인인 만큼 이 돈은 어쩔 수 없이 내야 했다.
난 NPC에게 10골드를 건넨 후 조용히 거울 앞에 섰다.
NPC는 두 손을 뻗어 천천히 거울에 올려놓으라고 했다. 그러면 거울이 알아서 맹약의 업을 측정해 줄 것이라고 말했다.
지이이잉.
내 손바닥이 거울에 닿자 거울이 묘한 파장을 일으키며 조용히 떨렸다.
그리곤…….
곧장 밝은 빛을 내며 맹약의 방을 온통 빛으로 환하게 비추었다.
그 순간 거울에 크게 새겨지는 몇 줄의 글귀.
F랭크 길드 ‘용문(龍門)’의 업을 확인했습니다.
길드마스터 신(753,463점).
부마스터 린(23,144점).
S랭크까지 랭크를 상승시킬 수 있습니다.
랭크 상승에 필요한 업의 정화(700).
“으음?”
난 잠시 눈을 비비고 다시 한번 거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거울에 나타난 글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분명 S랭크까지 랭크 업이 가능하다고 나와 있었다.
“허어∼ 대단하시군요.”
과묵해 보이던 NPC 신관까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거울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 정도 업을 지금까지 쌓아놓고만 계셨다니…… 인내심이 대단합니다.”
보통의 길드들은 업이 1,000포인트만 쌓여도 재빨리 그걸 길드 포인트로 바꿔서 여기저기에 활용하기에 바쁘다.
그렇기에 지금 그가 신기해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정작 내가 이해가 안 가는 건 어떻게 내가 쌓은 업이 70만을 넘고 있는 것인지였다.
70만의 업은 개인이 쌓을 만한 업이 아니었다.
옆에 있던 NPC 신관도 그것을 눈치챘는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된 거지…….”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이네요. 어떻게 된 거죠?”
오히려 내가 궁금하다는 듯이 얘기하자 NPC 신관은 재빨리 거울의 여기저기를 두들겼다.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좀 더 자세한 목록을 출력해 보겠습니다.”
그가 몇 가지를 조작하자 거울에 띄워진 글자는 좀 더 작아지면서 많은 양의 정보를 출력하기 시작했다.
촤아아.
그러한 정보를 꼼꼼히 살피는 NPC 신관.
그의 표정은 매우 진지해 보였다.
“……길드가 생성된 지는 3년 9개월(게임 시간) 정도이고…… 헉!! 메인 퀘스트? 그것도 다섯 개나! 커헉! 거기에 드…… 드래곤을 잡았어? 으악! 쟁탈한 맹약의 업이…… 40만??”
계속해서 놀라는 NPC 신관.
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문제가 있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