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변화에 대처하는 방법 ― 2
* * *
원래 내 계획은 유저들의 관심을 살짝 끌어낸 후 버그 스톤과 이나에게 준비시킨 몇 가지 일을 진행시켜 [The One Part2: 우라노스의 반격]의 시작을 앞으로 훌쩍 앞당길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엇나가기 시작하면 그게 힘들어졌다.
전설의 갑옷과 소환수라니!!
이건 정말 방향이 너무 엉뚱하게 빗나가 버렸다.
“음…… 일단은 다시 마법 갑옷과 마법 거인의 전설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꾸며서 퍼뜨려 보자. 이것도 안 먹힌다면…… 그땐 좀 더 직접적인 방법을 생각해 보자.”
이대로 ‘대이동’을 맞이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변화를 주어야 했다. 그래야만 본격적인 놈의 수작을 저지할 수 있었다.
“네, 형.”
“알았어요, 오빠.”
남매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퍼뜨릴 소문에 대해 상의하기 시작했다.
‘유저들은 어쩔 수 없다. 그렇다면…… 이제 믿을 건 NPC들 뿐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유저들을 다루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나 역시 이번 일을 진행하며 모든 기대를 유저들에게만 걸지 않았다.
사실 내가 우선적으로 보호하고 싶은 건 유저들보단 NPC들이었다. 어차피 NPC들만 살릴 수 있다면 가장 중요한 각종 안배를 다 살릴 수 있었다.
비록 모든 NPC를 다 구할 수는 없겠지만 잘 노력만 한다면 최악의 사태는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실행하자.’
난 NPC를 살리기로 마음먹었다.
드래곤의 개입으로 일어난 몬스터들의 대이동.
그 결과 큰 대란이 일어날 것이고, 각 마을과 도시의 수많은 NPC가 사망할 것이다.
그걸 막기 위해서는 단 한 가지 방법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대이동은 몬스터들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One’의 NPC들은 매우 뛰어난 인공지능을 가지고 있다. 아니, 사실 그들은 인공지능을 지닌 게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유저들처럼 똑같이 영혼을 지닌 존재들일 것이다.
난 그런 그들을 움직일 생각이었다.
몬스터의 대이동?
그렇다면 난 그에 맞서 NPC들의 대변화로 맞설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단지 유저들에게 안배를 전해주기 위해서만 존재했던 그들을 보다 능동적으로 만들어볼 생각이었다.
실제로 NPC들의 힘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단지 너무 피동적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그 힘이 강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난 그런 아주 기본적인 NPC의 법칙을 바꿀 생각이었다.
물론 NPC들은 원칙적으로 ‘불멸의 인’을 지닌 유저들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래서 친밀도라는 게 존재하는 것이고, 친밀도를 일정 수준 이상 높여야만 각종 정보를 얻고 거래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난 그러한 NPC들을 변화시키려 하고 있었다.
당연히 쉽지 않은 일.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계획이 있었다.
비록 좀 어려워 보이는 계획이었지만 그래도 허무맹랑한 계획은 아니었다.
‘자, 시작해 보자고.’
어차피 방법은 별로 없었다.
이렇게라도 해보지 않는다면 결국 ‘대이동’은 유저와 NPC 모두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것이다.
그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유저도 유저지만 NPC가 변할 필요가 있었다.
* * *
타이틀 [‘개척민들의 용사’]
: 레아 대륙에는 수없이 많은 개척민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땅을 개척하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실제로 레아 대륙에 세워진 거의 모든 도시와 마을은 이 개척민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이다. 당신은 그런 개척민들의 두터운 신망을 얻었다. 아마도 개척민들은 당신의 말을 상당히 신뢰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개척민들의 용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힘이다.
스킬: 없음.
능력치: 매력 +100
특수 효과: 개척민 NPC들과의 친밀도가 80% 상승하고 개척민 출신 NPC들과의 친밀도가 50% 상승한다. 또한 개척민 NPC들은 당신의 말을 90% 신뢰하고 개척민 출신 NPC들은 60% 정도 믿는다.
등급: A+급
내가 믿는 건 바로 이 타이틀이었다.
실제로 서대륙과 동대륙에 존재하는 NPC 중 50% 이상이 개척민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50%도 대략 반 정도가 개척민 출신의 NPC들이었다.
전체적으로 따진다면 75%가량의 NPC들이 모두 개척민과 연관이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 타이틀을 잘만 이용하면 상당히 훌륭한 타이틀이 될 수도 있었다.
물론 NPC와 친하다고 해서 그들에게 큰 보상을 얻어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이 내 말을 믿어준다고 해서 내가 특별히 이득을 취하는 것도 아니었다.
NPC와 유저는 서로 공생관계를 유지했지만 그러면서도 마치 물과 기름처럼 절대 섞이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내가 이 타이틀을 사용한 적은 보헤닌에서 NPC 광부들을 설득할 때나 몇몇 NPC 상점에서 큰 거래를 할 때, 또는 소소한 몇 가지 퀘스트를 할 때가 전부였다.
하지만 지금 내가 계획하는 일에는 이 타이틀만큼 중요한 것도 없었다.
난 본격적으로 NPC를 움직일 생각이었다.
NPC는 절대 바보가 아니었다.
그들은 단순히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진 인공지능 플레이어가 아니라 수많은 초월적인 존재가 그들의 힘을 이용해 남겨놓은 안배의 조각들이었다.
당연히 살아있는 인간들과 똑같은 영혼이 있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어설프게 그들을 속이거나 사기를 치는 건 힘들었다.
그러다가 걸릴 경우 아주 큰 낭패를 겪을 수도 있었다.
난 그래서 아예 정공법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절대 그들을 속이지 않는다.
난 거짓이 아닌 진실을 말해서 그들을 움직일 생각이었다.
물론 약간의 과장은 어쩔 수 없이 들어가야 했다.
* * *
서대륙 북부에 존재하는 작은 개척민 마을.
난 벌써 열 군데의 개척민 마을을 지나왔다. 빠른 이동을 위해 골드를 아낌없이 사용하며 순간이동 포탈을 마구 사용했다.
그 결과 벌써 하루(게임 시간) 만에 열 군데의 개척민 마을을 모두 돌았다.
이곳은 오늘 마지막으로 들르는 개척민 마을이었다.
이곳에서의 작업이 끝나면 잠깐 휴식을 취한 뒤 이번에는 대륙의 동부지역을 작업할 생각이었다.
동부지역은 북부지역보다 훨씬 많은 개척민 마을이 존재하기 때문에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어서 오세요.”
이 마을의 촌장은 내가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재빨리 뛰어나와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거의 이런 식이었다.
내가 이 ‘개척민들의 용사’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이상 개척민들은 큰 친절을 베풀며 나를 반겨주었다.
“반갑습니다.”
나도 반갑게 웃으며 그들에게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 이런 간단한 친밀감 표시만으로도 80%의 친밀도가 90%를 넘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원래 친밀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무슨 행동을 해도 친근하게 받아들이는 법이다.
난 그렇게 가볍게 개척민들의 인사를 모두 받아주며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부족한 관계로 약간은 무리가 있더라도 최대한 빨리 본론을 풀어 놓는 게 좋았기 때문에 난 일단 살짝 사전 작업 멘트를 날리기 시작했다.
“큰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아마도…… 길고 긴 시련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위기를 넘기기 위해서는 단합이 필요합니다.”
“시련을 피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최소한으로 줄이는 건 가능할 겁니다.”
난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밑밥을 깔았다.
이렇게 해놓아야 나중에 본론을 꺼냈을 때 편안히 진행할 수 있었다.
이게 모두 앞선 열 개의 마을을 돌며 터득한 일종의 요령이었다.
마을의 작은 강당.
난 그곳에 모든 주민을 모아놓고 열심히 얘기하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용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우리가 대비를 해야 한다는 건가요?”
대장장이로 보이는 한 개척민 NPC가 나를 향해 물었다.
“네, 대비를 해야 합니다. 무기를 만들어 창고에 쌓아놓고…… 젊은 분들은 그 무기를 사용하는 방법을 터득해야 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마을 주변에 높은 방벽을 세우고, 그 방벽 앞에 깊은 함정도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돈을 모아 뛰어난 용병들을 고용해야 합니다.”
어차피 용병 일을 할 사람은 많았다.
이들이 돈을 모아 용병을 구하면 수많은 유저가 퀘스트라고 생각하고 신이 나서 몰려들 것이다.
난 잠시 주민들을 조용히 살펴보곤 다시 얘기를 이어나갔다.
“지금은 중대한 위기 상황입니다. 그렇기에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합니다. 여기…… 제가 미약하지만 여러분을 위해 준비한 것이 있습니다.”
쿵.
난 약 50골드 정도가 들어있는 주머니를 내려놓았다.
사실 내가 무리를 한다면 더 많은 골드를 준비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골드의 양이 아니었다.
계기.
그것이 필요했다.
어차피 이들이 진정으로 시련을 이겨내려면 스스로의 의지가 가장 중요했다.
난 단지 그 의지를 타오르게 하려고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이고 있을 뿐이었다.
“이건 정말 약간의 골드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조금씩 힘을 모으면 분명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길 것입니다. 저를 믿으십시오. 그리고 준비하십시오. 그렇다면 기필코 이번 위기를 넘길 수 있을 겁니다.”
난 마지막 말에는 사기의 외침 스킬까지 사용해 가며 개척민들을 자극했다.
앞선 열 개의 마을을 거치며 거의 완벽해진 나의 화술은 확실히 위력을 발휘했다.
강당에 모인 개척민 NPC들의 눈동자가 불타고 있었다.
활활!!
불타오르는 그들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이 마을도 내 계획에 동참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띠링, 개척민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띠링, 개척민들의 인심을 얻었습니다. 친밀도가 상승합니다.
띠링, 패시브 스킬 화술(NPC 설득)의 숙련도가 대폭 상승했습니다.
띠링, 명성이 올랐습니다.
띠링, 매력이 +1 되었습니다.
이번엔 매력도 올랐다.
이들을 설득시키는 게 익숙해질수록 내 능력도 여러모로 발전했다.
“제가 여러분을 돕겠습니다!!”
난 마지막 결정타를 한 방 먹이곤 결의에 찬 표정으로 개척민들을 바라보았다.
개척민들의 얼굴에 이미 강한 믿음이 나타나 있었다.
“준비한다면 분명 위기를 넘길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결코 소란스럽게 준비를 해서는 안 됩니다.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 소문이 난다면 위기는 더욱 큰 위기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비밀스럽게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이 말이 가장 중요한 말일지 몰랐다.
내가 대놓고 ‘대이동’에 대한 소문을 내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혹시 모르는 또 다른 변수.
난 그것을 막기 위해 최대한 기존의 흐름을 깨지 않는 범위에서 변화를 추구하고 있었다.
개척민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그들을 설득했으니 남은 건 대략적인 준비 과정을 조언해 주고 떠나는 것만 남았다.
시간이 별로 없었다.
최대한 빨리 대륙에 존재하는 개척민들을 모두 변화시켜야 했기 때문에 난 모든 일을 초스피드로 진행시켰다.
한 달 안에 서대륙의 모든 지역을 돌고 빠르게 동대륙까지 넘어가야 했다.
살인적인 일정.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부탁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움직이고 또 움직이고.
이럴 땐 정말 분신술이라도 익히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