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드래곤의 역린(逆鱗)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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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의 레어는 역시 예상대로 상당한 난이도를 지닌 던전이었다.
대충 예를 들자면, 예전 대미궁의 70∼80층 정도와 비슷한 거 같았다.
물론 몬스터들의 레벨은 더욱 올라가고 함정은 더 위협적이지만, 상대적으로 느낌이 그 정도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건 전적으로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기준에 입각해서 얘기한 것이다.
다른 사람은 대미궁 이벤트 이후에 어느 정도 상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능력이 성장했겠지만 난 조금 다르게 성장했다.
난 시작은 미약하고 느렸지만 점점 빨라져 이제는 그 누구보다 빠른 성장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즉, 이 드래곤 레어는 나에게 크게 어려움을 줄 정도의 던전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난 빠른 속도로 드래곤 레어를 뚫고 지나갔다.
함정은 최대한 피하고 몬스터도 최소한의 숫자와만 싸웠다. 어차피 내가 다 망가뜨리고 죽인다고 해도 한 시간(게임 시간) 후에는 원상복구 되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것이니 그렇게 처리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내가 빨리 앞서 나가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난 다른 유저들보다 빨리 그린 드래곤이 있는 곳에 도착해 할 일이 있었다.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단지 약간의 작업만으로 끝낼 수 있는 일이었다.
보다 정확히 말해주자면, 일종의 간이 위장 시설을 만들 생각이었다.
내가 이렇게 수많은 소문을 흘리고, 정보를 조작하고, 드래곤 레어 주변에 대규모 기관진식 공사를 하고, 누구보다 먼저 드래곤 레어의 함정과 몬스터들을 뚫고 드래곤에게 접근하는 건 모두 ‘관찰’을 하기 위해서였다.
내 관찰 스킬은 거의 그랜드 마스터에 가까운 숙련도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관찰 스킬의 효율성은 대단히 높았다.
난 이 관찰 스킬을 통해 그린 드래곤의 전투를 살펴볼 생각이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잠들어 있는 그린 드래곤과 싸워줄 대상이 필요했다.
그래서 고른 것이 다른 유저들이었다.
최상위권의 레이드 팀과 길드의 유저들. 그들이 나를 대신해 그린 드래곤과 싸워줄 것이다.
난 그런 그들의 전투를 지켜보며 그린 드래곤 베나인에 대해 연구할 생각이었다.
완벽한 승리를 위한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적에 대해 100% 아는 것이다.
내 관찰 스킬이라면 100%가 아니라 120%도 알아낼 자신이 있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아주 오래된 격언이 있다.
내 자신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그렇다면 이제 알아야 할 건…… 바로 적이었다.
적당한 위치에 관찰을 위한 위장 시설을 만들었다. 몇 가지 진법과 기관을 이용해 시설을 완벽하게 숨긴 나는 이런저런 준비를 해놓고 첫 번째 실험 대상(?)이 오길 기다렸다.
위장 시설의 위치는 아주 절묘해 드래곤과 유저들의 전투에 휘말리지 않으면서 전투 상황을 생생하게 관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보통 사람에겐 다소 멀어 보일 수도 있는 거리였지만 워낙 기본 능력치가 좋은 나였기에 약간의 버프 스킬만 이용해 준다면 충분히 전투를 모두 관찰할 수 있었다.
어쨌든 이제 남은 건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예상대로라면 홍문이 가장 먼저 도착할 것 같았지만 혹시라도 홍문이 드래곤 레어에서 좀 헤맸다면 홍문을 뒤쫓아 바로 환계회회로 입장한 바이킹 길드가 먼저 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누가 오든지 그건 별로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그들이 얼마나 드래곤의 힘을 끌어내 줄지 그것이 문제였다.
그들이 제대로 해줄수록 내가 드래곤을 잡을 가능성도 덩달아 올라간다.
어차피 그들이 드래곤을 잡을 수 있는 확률은 무한히 제로(0)에 가까웠다.
그들은 자신들이 대단히 유리한 위치에서 드래곤을 잡는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의 그런 자신감은 내가 조작한 정보들에 의한 것일 뿐이었다.
아쉽게도 그들은 드래곤을 이길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떨까?
나도 드래곤을 잡을 확률이 무한히 제로(0)에 가까울까? 솔직하게 말하면, 지금의 나는 무한히 제로(0)에 가깝지는 않을지 몰라도 거의 5% 정도의 확률밖에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정말 객관적으로 본 확률이었다.
난 이미 확실한 몇 가지 준비를 해놨기 때문에 그나마 이정도 확률이 나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 계획이 모두 성공해 내가 그린 드래곤 베나인의 모든 것을 알게 되고 예상대로 베나인이 ‘그것’을 모두 사용해 주기만 한다면 어쩌면 확률은 거의 30∼40%까지 상승할 수도 있었다.
그만큼 이번 계획이 중요했다.
일단 확률을 30∼40%까지만 끌어올릴 수 있다면 그다음부터는 내 실력을 믿어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나의 믿음직스러운(?) 소환수 묵과 라르엘은 분명 조금이나마 내 승리 확률을 올려줄 것이다.
계획만 성공한다면 이래저래 해볼 만한 승부가 된다.
‘그깟 위업…… 내가 달성해 준다.’
비록 내 위업을 위해 수많은 유저가 희생되겠지만…… 결국 세상은 먹고 먹히는 그런 곳이었다.
그들이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면 이런 희생도 없었다.
물론 내가 좀 심하게 유도를 한 경향도 있었지만 그래도 결국 최종 결정은 그들 마음속의 욕심이 영향을 끼친 것이었다.
위업의 시작.
그것은 바로 ‘지켜보기’부터였다.
* * *
예상대로 첫 번째 희생팀은 홍문이었다.
그들은 용감(?)하게 드래곤에게 돌진했다.
보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드래곤 레어를 통과하며 84명의 길드원들이 68명으로 줄어 있었고, 그들은 잠깐의 재정비 시간을 가진 후 그 인원 그대로 드래곤과 싸우기로 결정했다.
그리곤 곧장 진형을 꾸리고 드래곤을 향해 강력한 공격 마법 몇 방을 쏘아 보냈다.
다소 무식하지만 나름 효과적으로 보이는 공격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홍문의 마법사들이 사용한 강력한 마법은 모두 그린 드래곤 베나인이 잠에 빠지기 전에 설치해 둔 안티 매직 실드에 가로막혀 허공에서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베나인은 잠에서 깨어났고…… 그는 별로 망설이지도 않고 꼬리를 휘둘러 홍문의 진형을 깨버린 후 간단하게 에시드 브레스(산성 숨결) 한 방을 뿜어내는 것으로 홍문 유저의 절반 이상을 게임 아웃시켜 버렸다.
그다음부터는 그냥 홍문의 일방적인 방어가 이어졌지만 그린 드래곤은 너무나도 손쉽게 그들의 방어를 뚫어버렸다.
한 10분?
어쩌면 그 정도도 안 걸렸을지 모르겠다.
어쨌든 홍문은 베나인에게 처참하게 당했다. 그들은 나름대로 에시드 브레스에 대비해 산성 보호 물약 같은 것도 챙겨왔지만 모두 무용지물이었다.
에시드 브레스는 절대산성을 자랑하며 각종 보호 물약과 보호 마법을 모두 무시했다.
정말…… 저 에시드 브레스를 사용할 수 있는 베나인을 유저들이 잡기 위해서는 하이 마스터 급 유저들이 대거 필요할 것 같았다.
첫 번째 대결은 그렇게 싱겁게 끝이 났다.
난 관찰 스킬을 극대화시킨 후 이 대결을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정밀하게 살펴보았다.
당연히 얻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만족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홍문이 너무 허무하게 무너졌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홍문을 가볍게 무너뜨린 베나인은 조용히 다시 안티 매직 실드를 시전하고 잠에 빠져들었다.
당연히 그의 생명력과 마력은 일루젼의 축복으로 모두 회복되었다.
난 다시 기다렸다.
시간은 아직 많았다. 그리고 베나인과 싸울 유저들도 많았다.
아직…… 나의 지켜보기가 끝나려면 많은 시간이 지나야 할 것 같았다.
보름(게임 시간)이 흘렀다.
이나가 정보를 알려준 건 불과 40개 레이드 팀과 길드였는데…… 벌써 98번째 희생팀이 베나인과의 전투를 끝냈다.
생각보다 정보가 많이 퍼진 느낌이었다.
그래도 별로 상관은 없었다. 오히려 좋았다. 난 드래곤 레어를 뚫을 수 있는 유저들이 한정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잘못된 예상이었다.
유저들의 수준은 내 예상보다 높았다.
물론 그래 봤자 베나인에게 무참히 짓밟히는 대상인 것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그래도 높은 건 사실이었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는 거의 모든 상위권의 레이드 팀과 길드들이 이곳에 찾아왔었다.
난 위장 시설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그들이 치른 모든 전투를 꼼꼼히 관찰했다.
개인적으로 그들의 순위를 뽑아보자면, 가드 마스터 다크 오크가 이끄는 팀, 에볼루션이 1위였다.
과연 헬 레이드 팀과 경쟁하는 팀답게 그들은 무려 1시간이 넘게 베나인과 싸웠다.
물론 그들 역시 결국 에시드 브레스라는 큰 벽을 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베나인에게 브레스를 무려 3번이나 사용하게 만든 건 그들이 유일했다.
팀 에볼루션을 제외하고 나면 북미의 올스타(All―Star) 길드나 유럽의 엔디아가 좀 활약했지만 결국 그들도 베나인에겐 하찮은 존재일 뿐이었다.
그렇게 대략 일주일 동안 최상위권의 레이드 팀과 길드들의 러시가 대부분 끝나고 나머지 일주일은 실력이 좀 떨어지는 팀들의 자살 러시가 이어졌다.
대부분의 팀이 10분을 넘기지 못하고 전멸했다.
보고 있는 내가 다 안쓰러울 정도로 무참히 쓰러지는 그들. 무려 일주일 동안 90개가 넘는 팀이 그렇게 줄줄이 박살 났다.
이미 수많은 정보가 머릿속에 쌓였지만 난 움직이지 않았다. 모든 유저가 포기했을 때, 그때 움직일 생각이었다.
한 번 베나인에게 도전했던 이들은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현실적으로 자신들이 얼마나 무모한 짓을 했는지 깨달았기 때문에 어리석은 도전을 두 번씩이나 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2주가 흐르고 거기에 하루가 더 흘렀다.
어제부터 하루 동안 이곳으로 찾아오는 유저는 한 명도 없었다. 이미 베나인에 대한 무시무시한 소문이 퍼질 대로 퍼져 지금 수준에서 드래곤 레이드는 절대 불가능이란 결론까지 나와 있는 상태였다.
당연히 그런 상황에서 무모한 도전할 용자는 없었다.
이제 드디어 내가 움직일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