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로드(The Lord)-133화 (133/250)

133. 화룡의 정체 ― 2

* * *

“헉헉…….”

난 아예 바람의 계곡을 벗어나 버렸다.

아마 지금쯤 바람의 계곡은 난리가 났을 것이다. 신병의 말에 따르면, 그렇게 각성을 끝내지 못한 경우 결국 점점 자아가 붕괴되어 한 마리의 광포한 몬스터가 되어버린다고 했다. 당연히 신수일 때처럼 뛰어난 인공지능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즉, 화룡은 아마 지금쯤 거대한 이벤트 보스 몹처럼 되어버렸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였다.

물론 지금의 유저들 수준과는 어울리지 않는 강력한 보스 몹이겠지만…… 어쨌든 바람의 계곡은 그 화룡 덕분에 매우 시끄러워졌을 것이다.

화룡을 그렇게 만든 건 나였지만 이젠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어졌다. 난 이미 바람의 계곡을 벗어났고, 화룡을 잠시 막았던 라르엘도 오래전에 강제 소환되었다.

그렇게 바람의 계곡에서 빠르게 벗어난 난 적당한 곳에 도착한 후에서야 멈춰 설 수 있었다.

전력을 다해 도망쳤기 때문에 내 상태는 과히 좋지 않았다. 홀리 라이트로 어느 정도 회복했다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땐 별로 좋지 않은 상태에서 한 시간을 넘게 전력으로 달렸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으하하, 수고했다. 힘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용케 도망쳤구나. 거기서 ‘뒤틀림의 편린’이 튀어나오다니, 정말 재수가 좋았어. 하하하.]

난 땅바닥에 꽂힌 상태로 붉은빛을 뿌리고 있는 커다란 도를 바라보았다.

도망치는 중에도 쉴 새 없이 떠들던 녀석. 녀석은 완벽한 수다쟁이였다.

“뒤틀림의 편린? 그게 뭐야?”

[흠흠, 뭐긴 뭐야, 뒤틀림에서 튀어나온 조각이지. 대충 세상에 존재하기 힘든 돌연변이 같은 존재인데…… 그걸 간단히 얘기하자면 마구 뒤틀려져서 전혀 새로운 존재가 되어버린, 그런 대상을 지칭하는 말이지.]

주절주절 떠드는 거대한 도. 정말 시끄러웠다.

“도대체…… 네 정체는 뭐냐?”

자아를 지닌 신병이라고 생각했는데 신병치고는 너무 경박해 보였다. 이젠 살짝 신병이 맞는지 그것마저 의심이 되었다.

[나? 그러고 보니 아직도 내 소개를 안 했군. 난 신이 만든 세상을 지탱하는 네 개의 기둥 중 하나! 위대한 불의 기둥이라 불리기도 했던…… 나의 이름은 신도(神刀) 다르메 티오 그라시안 이루!!]

“무, 뭐?”

[아∼ 이름이 어려우면 그냥 간단하게 천화신도(天火神刀) 님이라 불러도 돼.]

신병, 아니, 천화신도는 마치 인심이라도 쓴다는 것처럼 얘기했다.

“이름이 뭔지는 별로 상관없고…… 난 네 정체가 뭐냐고 묻는 거라고!”

[말해줬잖아, 신이 세상을 지탱하는 네 개의 기둥 중 하나로 만든 존재라고…… 물론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기둥의 역할에 다른 소소한 것들이 추가되었지만 기본적으로 난 기둥의 역할, 그러니까 세상의 균형을 유지하는 일을 해왔지. 그냥 간단하게 위대한 존재님이시라고 알면 된다.]

“위대한 존재? 혹시 너도 초월적인 존재인 것이냐?”

[빙고∼ 잘 아는군.]

감이 온다.

이 녀석은 천마나 다른 여러 초월적인 존재들과 비슷한 인공지능(?)을 지닌 존재가 분명했다.

“그럼 너도 여덟 명의 절대자처럼 이 세상에 안배를 전하기 위해 존재하고 있던 거야?”

[여덟 명의 절대자? 아∼ 그 녀석들…… 내가 녀석들과 비슷한 존재인 건 맞는데, 놀던 곳이 전혀 다르지. 그리고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녀석들과 똑같은 일을 하고 있던 건 아니었다. 난 그저 이 빌어먹을 세상을 오로지 ‘내 힘만으로’ 원래대로 돌리기 위해 이리저리 힘을 썼을 뿐이다.]

“원래대로 돌린다는 게 무슨 말이지?”

[흠흠, 이 세상에 적용된 제약 때문에 자세히 말하는 건 힘들고…… 그냥 뒤틀려서 섞여 버린 세상을 원래대로 돌리기 위해 노력했다고만 알면 된다.]

“뒤틀려서 섞여 버렸다…….”

말 하나하나를 흘려들으면 안 됐다.

모든 걸 잘 새겨듣고 그 말속에 숨은 뜻을 찾아야 제대로 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어쨌든 그러려고 이곳에서 힘 좀 쓰고 있었는데 그 빌어먹을 녀석의 수작 때문에 완전 소멸될 뻔했다.]

두서없이 튀어나오는 천화신도의 말.

이것을 정리하면 뭔가 대단한 비밀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빌어먹을 녀석은 누구지? 그리고 소멸된다는 건 무슨 의미야?”

[그 빌어먹을 녀석은…… 그 녀석은…… 아!! 젠장! 별걸 다 제약을 걸어놓았네. 어쨌든 그런 녀석이 있다. 그리고 소멸된다는 건 말 그대로 내가 사라진다는 뜻이야. 빌어먹을 녀석이 세상 이곳저곳에 뿌려놓은 그 파충류들…… 그것들이 충실하게 일을 하고 있는 덕분에 아마 수많은 중요한 존재가 소멸되었을 것이다.]

“도대체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난 아예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았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아니지∼ 좀 더 정확하게 물어봐야지. 이 ‘세상’에 서 일어나는 일이 아닌 이 ‘세상들’에서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지…… 그걸 궁금해해야지.]

“……!!”

세상이 아니라 세상들.

두 단어는 단지 한 음절 차이였지만 그것이 가지는 의미는 너무나 큰 차이를 지니고 있었다.

[아!! 젠장!! 망할 놈의 파충류 녀석이 너무 많은 힘을 빼앗아갔다. 이걸 회복하려면 꽤 시간이 필요하겠어. 자, 잠이 들기 전에 날 구해준 대가로 특별히 질문할 시간을 줄 테니 빨리 궁금한 걸 물어봐라.]

“이 세상…… 들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답변하기 전에 할 말이 있는데…… 참고로 이 세상에 걸려 있는 제약 때문에 어쩌면 네가 원하는 정확한 답은 얻지 못할 수도 있다. 이렇게 너와 대화하는 것 자체가…… 사실 약간은 제약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천마와 대화를 하면서도 대충 이해했던 부분이다. 이들은 분명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정작 그 사실을 얘기하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천화신도가 얘기하는 제약이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어쩌면 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일에 대해 이미 알고 있다. 단지…… 그 범위를 아직 깨닫지 못할 뿐이다.]

아리송한 대답.

하지만 이렇게밖에 대답하지 못한다는 걸 이미 이해하고 있었다.

“그럼 도대체 난 뭐지? 나에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넌…… 특별한…… 흐음, 그냥 선택받았다고 생각해라.]

“선택?”

[아니, 정정하겠다. ‘서로의 이해조건이 맞아 선택되었다’라는 표현이 맞겠군.]

“그게 무슨 말이야?”

[미리 말했지만…… 더 이상의 대답은 힘들다.]

“그럼 ‘그’는 누구지? ‘그’도 너희와 비슷한 초월적인 존재인가?”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좀 다르다고 할 수도 있고…….]

천화신도의 대답은 정확한 게 없었다.

그것이 제약 때문이라지만 듣는 입장에선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젠장, 그럼 네가 말할 수 있는 최대한의 비밀이 뭐야?”

[……답답하다고 생각할 필요 없다. 지금처럼 진실을 알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언젠간 모든 진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원래 나는 본래 필멸(必滅)의 존재들을 믿지 않기에 안배를 만들지 않고 나 스스로의 힘으로 상황을 바꾸려 했다. 그런데…… 왠지 너를 보니 그 선택이 잘못된 것 같기도 하다. 으음? 쳇!! 그 빌어먹을 녀석이 벌써 눈치를 챘군.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해주마.]

웅웅웅.

그 말과 함께 천화신도가 조금씩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흘러나오던 붉은빛도 점점 약해졌다.

[……강해져라. 빌어먹을 녀석의 수작을 무시할 수 있을 만큼 강해져라! 결국 그것이 진정한 진실로 다가갈 수 있는 열쇠가 될 것이다.]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천화신도는 더 이상 나에게 자신의 뜻을 전달하지 않았다.

붉은빛도 완전히 사라졌다.

남은 건 커다란 도 하나뿐이었다.

띠링. 천화신도를 얻으셨습니다.

띠링. 천화신도는 봉인된 아이템입니다. 봉인을 풀기 전까진 신도의 능력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쿠쿵!

천화신도가 힘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이렇게 보면 볼품없는 커다란 붉은색의 강철도일 뿐이었다.

난 감정 스킬을 이용해 그 도를 살펴보았다.

천화신도(天火神刀) [??] <거대 도검류>

신도(神刀) ‘다르메 티오 그라시안 이루’라고 불렸던 존재. 신이 만든 세상의 네 기둥 중 하나로서 아주 뛰어난 에고(자아)를 지니고 있다.

능력: 봉인(封印).

특이 사항: 봉인(封印).

특별 추가 사항: 절대 부서지지 않는다.

모든 능력은 봉인되어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바로 엄청나게 무겁다는 것. 붉은빛을 잃은 천화신도는 정말 엄청나게 무거웠다.

적어도 500㎏ 정도는 나갈 것 같았다.

“이건 뭐, 수련용으로나 쓰라는 건가?”

린이 사용했던 그 옷처럼 이 커다란 붉은색 도를 이용해 수련하면 딱 좋을 것 같았다.

“뒤틀림이라…….”

난 차근차근 머릿속에서 천화신도의 말을 정리해보았다. 천화신도는 많은 사실을 나에게 알려주었다.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사실들, 그리고 이번에 천화신도가 알려준 사실들.

이 두 가지를 합쳐 보았다.

그러자 흥미로운 사실이 몇 가지 나타났다.

물론 대단한 것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진실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고 있다는 확신을 줄 만한 것은 되었다.

스윽.

난 천화신도를 들었다.

대단히 무거웠지만 내기 들지 못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언젠간…….”

고개를 끄덕이며 천화신도를 눕혀 땅과 평행을 이루게 만들었다.

붉은색 도신(刀身).

빛을 잃어 다소 어둡게 느껴지는 붉은색이었지만…… 그래도 묘하게 신비로운 느낌이 들었다.

“모든 진실을 알 수 있겠지.”

진실을 향한 거침없는 행보.

난 그 행보를 멈출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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