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화룡의 정체 ― 1
* * *
어리석었다.
난 신수가 신병에 이끌려 나타났다는 기록을 보고 신병이 출현한 후 신수가 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애초에 신수는 신병과 함께 있었다.
화룡이 온몸으로 감고 있는 붉은색 도(刀).
저것이 바로 신병이었다.
잘못된 예측이 불러온 위기 상황. 저 정도의 존재감을 뿌리는 화룡이라면 적어도 지금의 내가 상대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그렇다고 대화가 통할 것 같지도 않은 상황.
이대로라면 난 정말 게임 속에서 첫 사망을 기록할 수밖에 없었다.
[뭘 그렇게 멍하니 서 있는 거야? 시간이 없어! 이 녀석이 완전히 힘을 각성(覺醒)하기 전에 나를 빼내! 그래야 너도 살 수 있다고.]
또 한 번 머릿속에 이상한 말이 울려 퍼졌다.
“으음?”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딜 보는 거야? 앞을 봐! 네가 잡으려고 했던 존재가 바로 나라고!]
“설마…….”
[설마는 무슨! 빨리 움직여야 해. 이 녀석이 이대로 각성을 끝내면 너나 나나 끝이야.]
놀랍게도 나에게 말을 건 대상은 화룡이 휘감고 있는 그 한 자루의 도였다.
신병에게 자아가 있다는 소문은 사실이었다.
[멍때리고 있을 시간이 없어! 각성을 막을 방법은 놈이 내 신력을 흡수하지 못하게 때어놓는 수밖에 없다. 빨리 공격해. 지금의 놈이라면 약간의 가능성은 있어!!]
각성이 끝나지 않았다?
그건 곧 지금 내 눈앞에 나타난 이 화룡은 아직 완벽한 화룡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어쩌면 그 폭발도 각성을 끝내지 않은 상황에서 놈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어였을지 몰랐다.
“장비 4번.”
스릉! 철컥!
엘레멘탈 블레이드가 손에 잡혔다.
신병의 말처럼 정말 가능성이 있다면 포기할 수 없었다. 아니, 가능성이 없다고 해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 좀 큰 뱀이라고 생각하자.”
좀 많이 큰 뱀이겠지만…… 어쨌든 싸우기 전부터 겁먹을 필요는 없었다.
스으으.
번쩍!
아직 각성이 끝나지 않았지만 분명 화룡은 자아를 지니고 있었다.
나를 노려보는 화룡.
마치 눈빛으로 나를 제압하려는 것 같았다.
“어딜!!”
꽝!!
난 강하게 진각을 밟으며 화룡을 향해 뛰어올랐다.
스킬 조합, 양손 검술 고급 기술, 참격(斬擊)+상급 검공, 뇌전검(雷電劍).
전광석화(電光石火)!!
엘레멘탈 블레이드에서 뿜어져 나온 한 줄기의 강기가 화룡을 향해 날아갔다.
[크어어엉!]
꽈광!
하지만 화룡은 단지 크게 울부짖는 것만으로 간단히 그 강기를 흩어버렸다.
[어리…… 석…… 은.]
약간은 어눌하게 느껴지는 화룡의 말.
확실히 신병의 말대로 화룡은 아직 완벽하게 각성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래, 큰 뱀일 뿐이야.”
내 자신에게 최면을 걸며 다시 엘레멘탈 블레이드를 고쳐 잡았다.
더 이상 내 눈앞에 있는 이 녀석은 화룡이 아니다.
그저 덩치가 조금(?) 큰 붉은색 뱀일 뿐이다.
* * *
놈은 강했다.
각성이 끝나지 않았다곤 하지만 그래도 놈은 굉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불을 자유자재로 다루었다.
처음 경험했던 그 폭발은 역시 놈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하지만 놈이 예상하지 못한 게 하나 있었다.
바로 내가 불에 관련된 공격에는 무척 강하다는 것이었다.
속성 친화력.
이것의 도움으로 난 놈의 다양한 공격을 간신히 막아낼 수 있었다.
놈과 싸우는 와중에도 신병은 쉴 새 없이 놈의 정보를 전해주며 나를 독려했다.
나중엔 좀 짜증 날 정도로 시끄러웠지만 어쨌든 신병이 전해주는 정보는 상당한 도움이 많이 되었다.
특히 방금 나에게 전한 한 가지 정보는 아주 큰 동기를 부여해 주었다.
별로 대단한 정보도 아니었다.
단지 간단한 몇 마디의 말일 뿐이었다.
[야…… 이 녀석 각성을 끝내려고 한다. 빨리 나를 뽑아내지 않으면 정말 끝이다.]
이걸로 나에겐 충분한 동기가 부여되었다.
그래서 난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각종 버프를 모두 활성화시키고 온몸이 타버리는 듯한 고통을 참으며 현재 화룡의 긴 몸통 위를 달리고 있다.
목표는 하나.
화룡이 꽁꽁 감싸고 있는 저 커다란 도를 뽑는 것이었다.
[크아아아앙!]
화룡은 나를 떨쳐버리기 위해 크게 몸부림치며 세상을 녹여 버릴 것 같은 강한 열기를 뿜어냈지만 난 놈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악착같이 붙어서 도를 향해 뛰었다.
치이이익!
살과 뼈가 함께 타는 것 같다.
고통이 대부분 배제되는 게임 속이건만 마치 현실에서 화상을 입을 때만큼의 고통이 느껴졌다.
그냥 화상도 아닌 전신 화상.
이대로라면 정말 이대로 녹아내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뽑아!! 놈이 각성하게 놔두면 안 돼!]
재촉하는 신병.
그리고 더욱 강하게 나를 떨쳐내려는 화룡.
남은 거리는 대략 5∼6m. 정말 이제는 더 이상 화룡의 몸에 붙어있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어차피 끝이라면?’
이대로 죽는 게 내 운명이라면 적어도 저승길 동무 한 명 정도는 필요했다.
꽝! 파팟!
난 뛰어올랐다.
그리고 곧장 말 많은 붉은색 도를 낚아챘다.
“으아아아!”
파앗!!
화룡의 품 안에서 뽑혀 나오는 붉은색 도.
그 순간 화룡은 다시 도를 잡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스킬 융합, 백 스텝(Back Step)+윈드 워크(Wind Walk)+패스트 워크(Fast Walk).
고속이탈(高速離脫)!!
하지만 난 그걸 보고만 있지 않았다.
남은 힘을 모두 짜내서 놈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꽈광!
빠져나오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워낙 불안정한 상태에서 펼친 신법이라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중심을 잃은 난 한쪽 벽에 강하게 처박혔다.
빠져나오긴 했지만 상황은 최악. 이대로는 다시 화룡에게 도를 빼앗길 게 분명했다.
“젠…… 장.”
온몸에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생명력은 거의 바닥까지 내려가 있었고 몸 여기저기에 부상 효과가 적용되어 움직임도 제한되었다.
[빨리 도망쳐야 해!]
신병은 계속 도망쳐야 한다는 뜻을 내 머릿속으로 전해줬지만 정작 난 도망칠 기운이 없었다.
[이…… 노오오옴!!]
쿠쿠쿠쿵.
화룡은 완벽한 각성이 끝나기 바로 직전에 각성을 위한 도구라 할 수 있는 신병을 빼앗기자 크게 분노하며 나를 향해 몸을 움직였다.
“젠장…….”
절망적인 상황.
가까스로 신병은 탈취했으나……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재…… 로 만들어주마!]
쩌어어억!
화룡은 입을 크게 벌리며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
강력한 화염의 숨결을 뿜어내려는 모습. 이번 공격은 도저히 막을 방법이 없었다.
[크허허허헝!]
화르르륵!
놈의 입에서 지옥의 불길보다 더 강력한 화염이 쏟아져 나왔다.
방어는 불가능.
결국 난 놈의 말대로 재가 되어 사라질 것이고, 신병은 다시 놈이 회수할 것이다.
쾅!
화염이 몸을 뒤덮었다.
강력한 열기가 느껴진다. 몸이…… 전부 타버릴 것 같은…… 그런 열기였다.
‘……끝이군.’
끝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더 이상 버틸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역천의 대법이나 지존수호공 같은 최상급 기술로도 막을 수 없는 절대적인 열기.
이건 도저히 지금의 내 수준에서 막을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다.
결국 모든 방어 행동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처음으로 맞이하는 죽음.
한 번의 판단 착오로 이렇게까지 상황이 악화될 줄은 몰랐기에 조금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생각지도 못한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왔다.
띠링. 불사의 반지 효과가 활성화되어 죽음에 이르는 강력한 충격을 소울 더미(Soul Dummy)가 흡수합니다.
띠링. 불사의 반지에 저장되어 있던 홀리 라이트 효과가 발휘됩니다.
띠링. 엄청난 양의 불의 기운을 견뎌냈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업적 중 하나입니다. 그런 당신의 업적은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띠링. ‘겁화를 이겨낸 존재’ 타이틀을 얻었습니다.
띠링. 소환수 라르엘이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며 첫 번째 진화를 성공시켰습니다. 자동으로 라르엘이 소환되며 진화된 모습을 드러냅니다.
화륵!
난 죽지 않았다.
오히려 바닥까지 떨어졌던 생명력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고 온몸에 적용되어 있던 대부분의 부상 효과들이 사라졌다.
홀리 라이트의 힘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갑자기 내 앞에 라르엘이 강제로 소환되었다.
그것도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끼이이이이이!!]
길게 울부짖는 라르엘.
녀석은 마치 전설 속에 등장하는 피닉스(Phoenix)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오오! 이건 정말 기적이군. 네 녀석이 ‘뒤틀림의 편린(片鱗)’을 지니고 있을 줄이야. 어쨌든 지금이야말로 도망칠 기회다!]
신병의 말처럼 지금이야말로 유일하게 도망칠 기회였다. 몸도 어느 정도 회복되었고 거기에 멋지게 변한 라르엘이 조금만이라도 시간을 끌어준다면 난 충분히 도망칠 수 있었다.
“라르엘, 부탁한다!”
어차피 라르엘은 소환수였기에 나중에 강제 소환되더라도 소멸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상관없었다.
난 라르엘에게 간단한 명령을 내린 후 곧장 몸을 일으켜 달리기 시작했다.
상대하기가 불가능하다면 도주하는 게 맞았다.
창피해할 필요가 없었다.
이것도 결국 전술의 하나. 아직 난 화룡의 상대가 아니었기에 도망치는 게 정확한 대처 방법이었다.
[끼이이이이!]
새롭게 변한 라르엘은 의외로 말이 없었다. 그저 길게 울며 화룡을 향해 날아갈 뿐이었다.
구사일생(九死一生)이라는 말이 어울릴 만한 상황.
애초에 이런 상황을 만들어내기 위해 구해놓았던 불사의 반지였지만 이렇게 기가 막힌 효과를 발휘할지는 미처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어쨌든 중요한 건…….
또 내가 살아남았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