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로드(The Lord)-129화 (129/250)

129. 쟁탈전 ― 2

* * *

삼 일이 지났다.

바람의 계곡, 그중에서도 흑풍곡이 존재하는 지역 근처에서는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현재 이 근처에는 내가 대충 파악한 것만 4천여 명의 유저들이 몰려들어 있었다.

그것도 전부 절정(익스퍼트) 이상의 유저들이었다.

얼마나 많은 세력이 이곳에 온 지는 모르겠지만 50개 정도는 확실히 넘어 보였다.

물론 중간중간에 천룡맹이 고의로 심어놓은 동맹 세력이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은 같이 공격하는 것처럼 조용히 있겠지만, 어느 순간에 다른 유저들의 뒤통수를 칠 것이다.

계속 말하지만 이곳은 완벽한 PvP 지역이다. 즉, 같은 길드원이 동맹 세력원이 아니라면 그 누구라도 공격할 수 있는 곳이라는 뜻이었다.

이런 점 때문에 던전 쟁탈전이 벌어지는 도중에 같이 공격을 하던 서로 다른 세력들끼리 또 하나의 전쟁을 벌이는 경우도 종종 일어났다.

피아를 구분하기 힘든 난전.

보호석이 있는 위치까지 방어가 뚫릴 경우 난전의 양상이 더욱 심해졌다.

서로 눈치를 보며 보호석의 방어막을 깨지 않고 다른 세력을 없애는 상황이 당연하게 연출되었다.

그뿐인가.

이러한 혼전을 틈타 개인적인 원한을 이곳에서 푸는 유저들까지 존재했다. 죽이고 죽이는 치열한 전쟁의 현장.

그것이 바로 쟁탈전의 실체였다.

그나마 쟁탈전을 하는 지역에서는 죽어도 아이템을 떨어뜨리지 않았기 때문에 다행이었다.

만약 아이템까지 떨어뜨렸다면 쟁탈전은 더 이상 쟁탈전이라 불리지 않고 살육전이라 불렸을 것이다.

어쨌든 쟁탈전은 그만큼 치열했다.

큰 세력을 지니고 있어도 이 치열한 전쟁터에서 살아남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전쟁터에 난 혼자 참전을 했다.

누군가 이런 나를 봤다면 당장에 미쳤냐고 말하며 거기서 당장 빠져나오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난 빠져나갈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더 깊숙이 들어갈 생각이다.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 분별할 수 없는 상황. 난 그 상황을 이용하고 있었다.

“버텨!! 뚫리면 안 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남자. 그는 천룡맹의 중간 간부 중 한 명이자 흑풍곡의 세 번째 입구를 막고 있는 천룡맹의 유저들을 통솔하는 지휘관으로 보였다.

총 다섯 개의 출입구가 존재하는 흑풍곡.

나중엔 이 출입구에서 이어진 통로들이 만나 두 개의 길만이 남겠지만 일단 이 출입구 부분을 뚫어야만 그 길로 갈 수 있었다.

꽝! 꽈광!

여러 스킬들이 난무하고 있었지만 천룡맹의 유저들은 밀집대형으로 잘 뭉쳐 서서 그럭저럭 잘 막아내고 있었다.

입구가 좁아 이들을 우회할 방법이 없었다.

그저 힘으로 이들 모두를 쓰러뜨리고 넘어가야 했다.

난 현재 폴리모프 망토를 이용해 모습을 바꾼 상태였다. 내 모습은 지금 내 옆에 있는 다른 이들과 상당히 유사했다.

이곳 세 번째 통로를 열심히 공격하는 이들. 이들은 바로 동대륙의 상위권 길드 중 하나인 혈랑대(血狼隊)였다.

동대륙에선 그래도 나름 알아주는 길드 중 하나인 혈랑대. 그들은 무려 정예 유저 100여 명을 이곳으로 보내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흑풍곡을 자신들의 거점으로 만들려고 노력 중이었다.

난 지금 교묘하게 모습을 변형시킨 후 이들 혈랑대와 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물론 이곳엔 혈랑대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대형 길드도 둘이 있었고 중소형 길드만 해도 열이나 있었다.

이들은 쟁탈전의 기본적인 법칙에 따라 서로 암묵적 동의를 맺고 공격에만 집중했다.

일단 보호석이 있는 곳까지 갈 때까지는 이 암묵적 동의가 유지될 것이다.

내가 볼 때 이번 쟁탈전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은 지금 내가 은근슬쩍 끼어든 혈랑대였다.

그나마 다크 소드라는 길드가 어느 정도 혈랑대와 비슷한 전력을 지니고는 있었지만 그들은 흑풍곡뿐만 아니라 확실히 그들이 접수할 수 있는 바람의 계곡의 작은 던전 한 개를 동시에 공략하는 중이었다.

덕분에 전력이 조금 나뉘게 되었고, 그 결과 이곳에서는 혈랑대보다는 살짝 떨어지는 전력이 되었다.

그래서 난 혈랑대를 선택했다.

폴리모프 망토를 이용해 혈랑대와 거의 유사한 모습을 만들었고, 그들이 입구를 뚫기 위해 정신없이 공격할 때 아주 은밀히 그들 사이로 스며들었다.

이런 치열한 전투 속에서 길드원들 한 명, 한 명을 신경 쓸 수는 없다.

당연히 난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들의 일원으로 인식되었다. 비록 그들과 파티가 되어 있는 건 아니라 여러 가지 버프나 힐은 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건 별로 상관없었다.

어차피 힐이든 버프든 스스로 하면 됐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천마신궁 대신 독각맥궁을 들었다.

그리곤 그 단궁을 이용해 천룡맹의 유저들을 하나하나 저격하는 중이었다.

지이익!

펑!

천마신궁의 궁법 중 패왕시(覇王矢)라는 스킬을 기존의 일격필살 스킬에 합쳐 만든 융합 스킬, 패왕의 일격은 상당히 강력한 위력으로 천룡맹 유저들을 하나씩 쓰러뜨렸다.

한 발에 한 명.

타이밍만 잘 맞추면 원샷 원킬이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관찰 스킬을 통해 가장 약해진 유저를 골라내고 그 유저에게 패왕의 일격을 선물했다.

당연히 그 유저는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

혈랑대 사이사이를 이동하며 절대 내 위치를 노출시키지 않았다.

덕분에 킬 포인트는 차곡차곡 아주 훌륭하게 쌓여갔다.

물론 중간중간 현재 상황을 보고 공격 속도를 조절했다.

내가 원하는 건 공격하는 쪽도 적당히 피해를 입으며 이 방어선을 뚫는 것이다.

지금 내가 하는 작업은 바로 그 적당한 타이밍을 조절하기 위한 것이다.

공격과 방어의 적당한 피해.

그것은 아주 중요했다.

* * *

천룡맹의 방어는 견고했다.

특히 첫 번째 방어선이 뚫리고 두 번째 방어선 즈음에 도착했을 때 천룡맹이 미리 심어놓은 몇 개의 길드가 다른 길드의 뒤를 치며 공격하는 쪽을 많이 곤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천룡맹의 회심의 한 수도 공격 세력을 완전히 무력화시키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일단 6개월 동안의 천룡맹 독점을 고깝게 여긴 다른 세력들이 대거 연합해서 달려든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리고 거기에 은밀히 활동하는 내 존재도 한몫을 톡톡히 하는 중이었다.

특히 난 뒤통수를 친 몇몇 세력들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며 큰 혼란이 일어나는 걸 막았다.

그 결과 쟁탈전은 엄청난 혼전으로 흘러갔다.

피아(彼我)가 서로 뒤엉켜 미친 듯이 싸우는 현장, 난 그 현장 한가운데에서 쟁탈전의 현황을 계속 파악하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나에게 완벽한 적은 아니었다.

또한 반대로 완벽한 아군도 아니었다.

때론 난 공격하는 세력의 편이었다가 때론 다시 방어하는 편이 되기도 했다.

공격과 방어의 조절.

그것이 내가 이곳에서 하고 있는 일이었다.

쟁탈전이 종료되기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2시간.

공격 측은 어떻게 해서라도 1시간 이내에 보호석이 있는 광장까지 전진할 생각이었다.

보호석 자체가 지닌 방어막이 워낙 강력했기 때문에 무조건 쟁탈전이 끝나기 1시간 전에는 보호석이 있는 곳에 도착할 필요가 있었다.

가뜩이나 지금처럼 서로 죽고 죽이는 엄청난 혼전 상황이라면 보호막을 깨뜨릴 화력이 부족해질 게 뻔했다.

보호막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최소한 200여 명의 유저들이 이십 분 이상은 두들겨야 했다.

그렇기에 더욱 빨리 보호석이 있는 곳까지 뚫어야 했다.

사실 전황이 이렇게 치열하게 변한 건 천룡맹의 정확한 지휘 때문이었다.

그들은 공격 세력이 생각보다 더 강력하고 자신들이 준비한 여러 작전이 실패하자 아예 너 죽고 나 죽는 식의 전투를 벌여 보호막을 깨뜨릴 화력을 대폭 줄일 생각이었다.

그런 천룡맹의 의도는 정확한 판단이었다.

내가 볼 때도 이대로 혼전이 계속되면 제시간 안에 보호석 앞에 도착한다고 해도 화력이 크게 부족할 판국이었다.

물론 공격하는 입장에서도 이런 의도를 모르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혼전에 말려든 건 어쩔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공격하는 입장에선 방어선을 무조건 뚫어야 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결국 악수인 것을 뻔히 알면서도 두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공격 측에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은 보다 강력한 화력으로 빠르게 밀어붙이는 것뿐이었다.

방어하는 쪽은 혼전을 유도하기 위해.

공격하는 쪽은 더 빨리 방어선을 무너뜨리기 위해.

양쪽 모두 치열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금 이들이 이렇게 미친 듯이 치고받고 싸우고 있는 것이었다.

스킬 발동, 천마술법, 유령의 술(術), 혼마수(魂魔手)!

스킬 조합, 천마궁법, 암왕시(暗王矢)+상급 술법, 은월(隱月).

칠흑의 일격.

스킬 발동, 천마술법, 저주의 술(術), 암영(暗影)!!

난 아주 은밀하면서 또 상당히 강력한 기술들만 골라서 사용하며 계속해서 두 세력 간의 균형을 맞춰 나갔다.

궁극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은 상잔(相殘).

즉, 공격과 방어가 동시에 무너지는 것이었다.

승패의 향방은 전혀 관심이 없다.

중요한 건 누가 승리하느냐가 아니라 마지막에 서로 얼마나 살아남을지였다.

공격과 방어 세력이 모두 일정 수준 아래로 떨어지면 그때부턴 균형을 맞추는 조율자의 역할을 버린다.

그때부터 나는 파멸자가 된다.

나를 제외한 다른 모든 이를 정리하는 그런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일인 길드, 용문.

이제 아마도 흑풍곡은 용문의 차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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