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또 한 번의 반복의 장(章) ― 1
* * *
[The One]
오로지 하나만을 위해…….
02. 혼란
* * *
“정말 별일 아니었습니다. 단지…… 예전의 일도 있고 해서 조금 과민하게 반응했을 뿐입니다.”
병일은 진땀을 뻘뻘 흘리며 얘기하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이라 할 수 있는 개발팀장 동혁은 이미 총회의가 시작하기 전에 병일에게 엄청난 질책을 듣고 조용히 구석에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과민한 반응이다? 정말로 그냥 과민하게 반응했을 뿐인가? 설마 또다시 ‘일루젼’에게 통제권을 빼앗기는 건 아니겠지?”
연욱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물었다.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이미 확실히! 이중 삼중으로 저희가 모든 시스템을 장악했습니다. 단지…… 이번 같은 경우는 워낙 변수가 많은 시스템이라 어딘가에서 알 수 없는 버그가 발생했고…… 이걸 ‘일루젼’이 스스로 치유한 것으로 보입니다.”
“……자가 치유 프로그램이 발동한 건가?”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흐음, 그럼 어느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한 거지?”
“그, 그게…… 사실 동대륙이란 것까진 알아냈는데…… 워낙 빨리 처리가 되어서 정확한 정보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럼 백업 서버라도 뒤져서 찾았어야지!”
“물론 백업 서버도 샅샅이 찾아봤습니다. 하지만 이미 완벽하게 삭제가 되어버린 상황이라…… 결국 찾지 못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데이터를 관리하는 건 저희가 아니라 일루젼입니다. 저흰 그저 일루젼에게 권한을 얻어 살펴보는 게 전부입니다. 사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김동혁 개발팀장이 회장님께 핫라인을 통해 직업 보고드린 것입니다.”
“……흐음.”
연욱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이번 일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병일의 말처럼 아무것도 아닐 가능성이 큰 건 맞았다.
하지만 ‘The One’에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 하나 사소하게 생각하지 않는 그였기 때문에 계속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다시 한번 이번 일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고 이번에도 아무것도 못 찾으면 그 원인을 분석해서 보고하게.”
“네, 걱정 마십시오.”
병일은 마음속으로 크게 한숨을 내쉬며 빠르게 대답을 했다.
“그리고 김 팀장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이상한 점이 생기면 앞으로도 계속 핫라인을 통해 보고하세요.”
“아, 네! 알겠습니다.”
잠시 병일의 눈치를 살핀 동혁은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김 팀장뿐만이 아닙니다. 여러분 모두 조금이라도 이상한 일이 생기면 무조건 보고를 먼저 하세요. DH 그룹의 중심은 언제나 ‘The One’입니다. 그걸 잊지 마세요.”
연욱은 마지막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이번 일은 이 정도로 처리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김동혁 개발팀장의 보고로 갑자기 소집되었던 총회의가 마무리되었다.
연욱을 포함한 모든 사람은 회의에서 결론 난 것처럼 이번 일은 그저 가끔 일어나는 가벼운 오류 정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단지 그들만의 생각일 뿐이었다.
* * *
지잉.
“어서 오세요.”
문이 열리고 익숙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특히…… 저 중앙에 있는 홀로그램 간판은…… 너무나 또렷이 기억이 난다.
[WISH]
여긴 내가 ‘그’와 계약을 맺은 장소다.
내 단골 술집.
그런데…… 장소는 무척 익숙한데……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별로 익숙하지가 않다.
내가 진짜 단골이었다면 분명 익숙한 얼굴들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사이 모두 바뀐 건가?
정말 웃긴 건…… 난 분명 이곳의 위치와 모습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건만 이곳에서 일했던 사람들의 모습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사람은 없고 장소만 존재했다.
그런데 이건 이 술집만의 일이 아니었다. 내 머릿속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기억이 똑같았다.
게임…… 이젠 그걸 게임이라고 계속 말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게임 속에서 천마의 말을 듣고 난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의문이 풀린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마지막 말은 다시 더 많은 의문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의문들을 따라…… 내 기억을 더듬어본 순간.
난…… 경악했다.
지금까지 난 자신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내 주변 사람들에 대해서도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내 기억 속에 존재하는 주변 사람은 사실상 지방에 계신 부모님이 전부였다.
그게 끝이었다.
그리곤 희미하게 남아 있는 중요하지 않은 몇 명의 사람을 제외하곤 아예 존재하질 않았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사람들과 아예 관계를 맺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할 순 없었다.
오로지 사람만 기억나지 않을 뿐.
장소들은 모두 기억이 났다.
누군지 모르는 사람과 함께 갔던 것 같은 음식점.
또 누군지 모르는 사람들과 만났을 것 같은 술집.
이래저래 상당히 많은 기억이 남아 있었다.
그 기억 중 빠져있는 건 오로지 사람뿐이었다.
심지어 내가 주식 거래를 하고 부동산 계약을 했을 때의 기억을 더듬어봐도 내가 스스로 내 이름을 적거나 언급한 기억이 없었다.
마치 교묘하게 지워진 것처럼 되어 있었다.
“후우…….”
그걸 떠올리자 또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어디부터 어긋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머리를 살짝 흔들어 혼란스러움을 잠깐 날려 버린 난 일단 메인 바에 앉은 후 맥주를 한 병 주문했다.
이렇게 익숙한 장소에 있다 보면 뭔가 기억이 떠오를지도 몰랐다.
“무슨 고민 있으세요?”
맥주를 가져온 바텐더가 나를 향해 물었다.
“흐음…… 아니요. 그냥 좀 머릿속이 복잡해서…….”
“아,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는 데 술이 도움이 되긴 하죠.”
귀엽게 생긴 그녀는 밝게 웃으며 나에게 맥주를 건넸다.
“……혹시 여기서 일하신 지 오래되셨나요?”
내가 다른 사람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은 어떨까? 이 바텐더가 나를 기억한다면…… 사람들은 오로지 내 기억 속에서만 지워진 것이 아닐까?
단순한 질문 한 가지를 하면서도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에 계속 떠올랐다.
“음, 한 육 년 정도 됐네요. 이래 봬도…… 여기 창립 멤버라고요.”
육 년이면 충분하다. 진짜 내가 여기 단골이었다면 이 여인은 나를 기억해야 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마시고…… 제가 일이 좀 있어서 그런데…… 혹시 절 아시나요?”
“네, 네?”
갑작스러운 내 질문에 바텐더는 잠시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능숙하게 웃음으로 표정을 바꾼 뒤 조용히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저희 가게엔 오늘 처음 오신 거 아닌가요? 제가 손님들 얼굴은 잘 기억하는 편인데…… 손님은 오늘 처음 뵙는 거 같아요.”
“아…… 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 맞아요…… 여긴 오늘 처음 왔습니다.”
난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술잔을 들었다.
‘WISH’라는 로고가 크게 새겨져 있는 술잔…… 이 술잔마저 너무나 익숙하다.
그런데도 난 이곳에 처음 온 사람이 되었다.
‘난 도대체 그와 어떤 계약을 한 건가?’
이제 그가 누군지 그건 궁금하지 않았다. 그가 어떤 존재이든…… 나는 그와 어떤 거래를 한 것인지 그게 궁금했다.
이걸로 모든 게 확실해졌다.
어차피 이젠 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은 부모님뿐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나도, 그리고 그들도…… 서로를 잊었다.
되찾고 싶지만 방법을 모른다.
방법은 오로지 한 곳에 존재했다.
‘The One!!’
적어도 게임을 무척 좋아하는 내 모습은 거짓이 아니었다. 기억이 이상하게 되기 전에도 난 실제로 게임을 즐겼을 것이다.
문제는 이젠 더 이상 ‘The One’이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이건 단순히 나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분명 게임 속에선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 비밀을 알아내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이상한 일에 대해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후후, 적어도 게임 속에서의 모험이라면 그 누구보다 자신이 있으니까…….”
당황할 필요없다.
뒤엉킨 실타래는 당황해서 빨리 풀려고 하면 오히려 더 엉키는 법이다.
그럴 때일수록 침착하게…… 하나하나 풀어가야 했다.
일단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그리고 가장 자신있는 일은 게임 속에 존재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에게 온갖 행운을 몰아주고 오로지 게임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준 ‘그’가 고마워진다.
“……기다려 봐. 내가 찾아줄 테니.”
그를 찾을 것이다.
그리고 물을 것이다.
‘내가 당신에게 받은 것과 당신이 네게 받은 것이 무엇인지를…….’
사흘 동안 기억 속에 존재하는 여러 장소들을 모두 찾아다녔던 난 대충 혼란스러운 기억을 모두 정리하고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어차피 아직 결론은 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게임 속 세상은 계속 시간이 흘러갈 테고 난 그 속에서 알 수 없는 이상한 변화들에 대한 정보를 찾아야 했다.
어려울 것도 별로 없다.
지금처럼 그저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얻으려 노력하고 더 많은 비밀을 알기 위해 뛰어다니면 되었다.
정보는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모일 것이다.
지금까지와 다른 점이라면…… 현실이 게임과 겹쳐졌다는 정도였다. 이젠 게임과 현실은 같은 곳이 되었다.
즉, 어쩌면 지금까지보다 더 게임에 집중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4일 만에 들어간 게임 속은 별로 바뀐 건 없었다.
4일 전 난 천마의 말을 들은 후…… 당연한 수순처럼 등장한 천마가 남긴 안배들을 빠르게 수습했다. 그리고 무신의 안배를 얻었을 때처럼 그렇게 곧장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당시 난 밖으로 나오자마자 게임을 종료했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서 있는 위치는 열대우림 지역 외곽의 외딴곳이다.
일월신교의 공간 이동진은 친절(?)하게도 다시 열대우림 지역을 빠져나오는 고충을 생략시켜 주었다.
“일단…… 받은 물건들이나 정리해야겠네.”
천마가 남긴 안배를 수습하긴 했는데…… 워낙 혼란스러웠던 상황이라 제대로 확인조차 하지 않았었다.
일단 난 열대우림 지대를 완전히 벗어나 안전한 지역으로 이동했다.
아무리 외곽이라고 해도 열대우림 지대는 한시도 방심할 수 없는 곳이었다.
적당히 이동한 후 안전한 지역에 도착한 나는 내가 얻은 것들을 확인해 보았다.
한 가지 타이틀과 세 가지 아이템, 그리고 네 가지 무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