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재정비 ― 1
* * *
검산을 떠난 난 곧장 호남성으로 돌아왔다.
두 달이나 지났건만 여전히 무명객에 대한 얘기를 간간이 들을 수 있었다.
물론 폴리모프 망토를 통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는 날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호남성으로 돌아온 난 일단 그동안 미뤄두었던 일들을 정리했다.
특히 가장 먼저 내 돈을 찾아야 했다.
비록 시스템에 의해 자동으로 묶여 오로지 내가 가지고 있는 거래 증명 문서에 의해서만 꺼낼 수 있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매우 안전하게 보관되고 있겠지만 그래도 남의 손에 내 돈이 있는 건 괜히 찜찜한 마음이 들었다.
난 은밀히 호남성 뒷골목을 향했다.
전과 마찬가지로 몇 가지 간단한 과정을 통해 들어간 사설 도박장에 들어갔다.
그런데 좀 이상한 점이 느껴졌다.
사설 도박장의 분위기가 많이 바뀌어있었다.
난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 유저가 앉아 있는 창구 앞에 가서 섰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창구 안의 유저는 두 달 전의 사람과 다른 이였다. 특별히 그때와 같은 유저가 있어야 할 이유는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묘하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배당금을 찾으러 왔습니다.”
“흐음…… 이번 리그입니까?”
유저는 슬쩍 장부를 뒤적이며 물었다.
“아니요, 두 달 전 열렸던 갑 조 리그입니다.”
“두 달 전…… 갑 조 리그…… 헉!”
장부를 뒤적이던 유저는 순간 화들짝 놀라며 나를 바라보았다.
“서, 설마…… 주작 투기장이 S급 투기장으로 바뀌기 전 마지막으로 열렸던 경기입니까?”
“네, 아마도 맞을 겁니다.”
“흠흠…… 그렇다면 혹시 그때…… 무명객 님에게 돈을 걸었던 분입니까?”
창구 안의 유저는 매우 조심스럽게 나를 향해 물었다.
“맞습니다.”
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해주었다.
“허억! 아이구…… 드디어 오셨군요.”
“으음?”
창구 안의 유저는 벌떡 일어나며 나에게 공손히 인사를 했다. 순간 난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명객 님 본인이 오신 건…… 아닌 것 같고…… 대리인이신가요?”
그는 나를 빠르게 위아래로 살펴보고는 난 무명객의 대리인쯤으로 예상했다.
아마도…… 그때 현장에서 나를 봤던 유저인 것 같았다.
“네, 맞습니다.”
굳이 무명객이라 밝혀서 귀찮은 일이 생기게 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대리인 정도나 되는 것처럼 행동하면 그만이었다.
“역시 그렇군요. 잘 오셨습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그는 아예 창구에서 나올 것처럼 고개를 내밀고 몇 번이고 인사를 했다.
“……음…… 돈을 받으러 온 절 왜 이렇게 반가워하시죠?”
상식적으로 좀 이해가 안 됐다.
난 말도 안 되는 배당률을 뚫고 엄청난 금액을 받아내러 온 도박장의 원수와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이렇게 반갑게 맞이하다니…… 뭔가 이상해도 너무 많이 이상했다.
“당연히 반가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르시는 것 같은데…… 사실 호남성 뒷골목의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한동안 쪽발…… 일본 쪽 애들이 모여서 만든 길드가 이곳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창구 안의 남자는 열심히 침까지 튀겨가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두 달 전! 그때 그 사건 때문에 놈들의 길드가 한 번에 무너졌습니다.”
남자는 통쾌한 표정을 지으며 기분 좋게 얘기했다.
“사건? 무슨 사건이 있었나요?”
“네! 있었죠. 모르시겠어요? 제가 말하는 사건은 바로 무명객 님의 우승입니다.”
“아!”
이제야 대충 이해가 되려 했다.
“당시 무명객 님의 배당률은 무려 32배. 덕분에 사설 도박장에서는 무려 32만 골드라는 엄청난 금액을 물어주게 되었죠. 사실…… 욕심만 부리지 않았다면 그들이 그렇게 한 번에 무너질 일은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들은 욕심을 부렸습니다. 혈주작의 우승을 확신하고 길드가 가지고 있는 여유 자금을 모두 혈주작에게 걸어버린 것이죠. 그뿐 아니라…… 그들은 길드원 개인의 자격으로도 혈주작을 밀어주었습니다. 뭔가 확신이 있었던 것이죠. 아마도…… 주작 투기장에서 경기 정보를 제공해주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한 번에 모든 자금을 잃은 그들은 더 이상 사설 도박장을 유지할 힘이 사라졌습니다. 바로 그때! 저희가 기회를 놓치지 않았죠. 오래전부터 호남성의 뒷골목을 먹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하던 저희 길드는…….”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말들.
난 조용히 기억할 건 기억하고 흘릴 건 흘리며 그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었다.
“……그래서 이렇게! 저희 길드가 호남성의 뒷골목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긴 이야기가 끝났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전에 있던 일본 유저들 길드가 무너지고 한국 유저들이 만든 길드가 뒷골목을 장악했다는 얘기뿐이었다.
아! 내 배당금이 32만 골드라는 사실도 중요했다.
“그럼 이제 전 배당금을 받을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거래 증명 문서를 이곳에 넣어주시면 곧바로 골드가 지급될 겁니다.”
난 그가 시키는 대로 거대 증명 문서를 금고같이 생긴 곳에 넣었다.
그러자 곧장 내 가상 가방 속으로 정확히 32만 골드가 쏟아져 들어왔다.
“32만 1천 344골드 모두 지급해드렸습니다.”
그는 정확한 액수를 말로 직접 얘기해주었다.
난 순식간에 32만 골드를 얻었다. 단 한 번의 투자로 얻은 돈 치고는 상당히 많았다.
어차피 내가 서대륙에 벌여놓은 사업만으로도 골드는 계속해서 불어나고 있었지만…… 골드가 많아서 나쁜 점 같은 건 절대 없었다.
다다익선(多多益善).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게 바로 골드였다.
난 묘한 부러움의 시선을 느끼며 호남성의 뒷골목을 빠져나왔다.
받을 돈을 받았으니 이젠 한동안 하지 못한 정비를 할 때였다.
두 달 동안 산골짜기 깊숙한 곳에서 수련만 계속했더니 이래저래 정비가 많이 필요했다.
특히 3차 전직까지 끝낸 지금 상황에서 이리저리 비어 있는 장비창은 내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32만 골드라는 생각지도 못한 큰 이득이 생긴 이상 제대로 경매장을 한 번 이용해줄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일단 난 아무 객잔에 들러 방을 잡고 본격적으로 경매질을 해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묘한 위화감이 나를 감쌌다.
난 슬쩍 관찰 스킬을 활성화시키며 주변을 대충 둘러보았다. 대충이었지만 분명 내 시야에 몇 명의 유저가 잡혔다.
등 뒤쪽으로 3명.
앞쪽에 4명.
양옆으로 각각 3명.
총 13명.
‘뭐 하는 놈들이지?’
분명 이들은 나를 노리고 있었다.
보는 눈이 여기저기 많은 마을 안이라 나를 쉽게 습격할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도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관찰 스킬의 숙련도가 올라가면 여러 가지 효과를 보여주었다. 지금같은 경우는…… 나를 노리고 있는 유저들의 수준도 얼추 알아낼 수 있을 정도였다.
‘대략 중하급의 유저들.’
이들은 아무리 많이 쳐줘도 레벨 250 정도나 되어 보이는…… 대략 갓 2차 전직을 끝낸 레벨 200수준의 유저들이었다.
아마도 이들은 계속해서 날 미행할 생각인 것 같았다. 왠지 조금 짜증이 났다. 두려워서가 아니라…… 누군가 나를 계속 지켜보고 있다는 건 별로 기분 좋지 않은 일이었다.
파악이 다 끝난 적은 별로 두렵지가 않았다.
특히 지금처럼…… 머릿수만 믿고 있는 이들이라면 더욱 그랬다.
난 귀찮음을 무릅쓰고 이들을 깔끔하게 처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객잔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호남성 밖으로 향하게 바꿨다.
마을 안에서는 미행만 하겠지만 분명 마을 밖으로 나가면 미행만 하지 않을 놈들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역시 예상했던 대로 성을 벗어나 인적이 별로 없는 길로 들어서자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나를 향해 다가오는 13명의 유저들.
그들은 나름대로 완벽하게 전후 사방에서 나를 포위했다.
“잠깐 멈춰라.”
내 앞으로 나오는 한 유저.
그의 가슴에 새겨진 작은 무늬는 한 눈에도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주작 투기장.’
이들은 모두 주작 투기장에서 온 게 분명했다.
이렇게 복장까지 나란히 맞춰 입고 왔는데 그걸 모르면 그게 바보였다.
난 슬쩍 주변을 둘러본 후 슬며시 뒷짐을 쥐었다.
“뭐지?”
날 포위한 이들은 내가 생각보다 당당하게 나오자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이들은 내가 머릿수에 겁을 먹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았다.
“네가 무명객의 심부름을 해주는 이라면…… 잠깐 우리랑 어디를 좀 가줘야겠다.”
역시 이들은 무명객, 혹은 무명객과 관련된 인물을 기다리고 있는 놈들이었다.
‘누가…… 연락을 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