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전직 ― 1
* * *
천무칠성 혹은 세븐스타.
난 그 호칭의 의미를 이제야 깨달았다.
1억이 넘는 숫자에서 뽑힌 일 곱.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난 지금 몸으로 깨닫고 있었다.
검은 마녀 린.
그녀는 강했다. 그냥 강한 것이 아니라 엄청 강했다.
처음에 난 폴리모프 망토를 입은 상태로 그녀와 대련했었다.
그리고…… 패배했다.
폴리모프 망토를 입었다지만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어지간한 기술은 다 사용했었다.
물론 최후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묵이나 몇 개의 중요한 비기들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내가 가진 힘의 90% 정도는 충분히 발휘했었다.
그런데도 졌다.
그래서 난 폴리모프 망토를 벗었다.
그리도 다시 대결했다.
막상막하.
그녀의 검은 놀라울 정도로 날카롭게 내 급소를 파고들었다. 그녀는 이 검술을 천암류(天暗流)라고 말해주었다.
초월급 무공 천암류.
이것은 단순한 검술이 아니었다. 일종의 신공이자, 보법이자, 신법이자, 검법이었다.
빠르고, 날카롭고, 은밀하고, 끈질기고, 강력하다.
이것이 천암류의 검이 가지는 다섯 가지 특징이었다.
난 수많은 스킬을 사용하며 그녀의 이 천암류 검술에 맞섰다. 하지만 스킬 본연의 위력만 놓고 본다면 무조건 그녀의 천암류가 앞섰다.
난 지존신공과 분심공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스킬을 활용해 그녀의 검을 막아냈다.
물론 놀란 건 나만이 아니었다.
그녀도 충분히 놀랐다. 특히 한 사람이 이렇게 다양한 스킬을 익힐 수 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어했다.
어쨌든 그녀와 난 그렇게 호각을 이루며 몇 번이고 대련을 계속했다.
내가 질 때도 있었고 그녀가 질 때도 있었다.
누가 우세하다고 말하기도 힘든 미세한 차이.
그래서일까?
그녀도 나도 더욱 대련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난 아주 좋은 부수입을 찾아냈다. 그냥 좋은 게 아니라 아주 좋은 것이었다.
놀랍게도…… 약간은 정체 중이던 있던 지존신공의 스킬숙련도가 상당히 빠른 속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물론 타이틀은 ‘더 로드’로 해놓았기 때문에 한 번에 상승하는 숙련도의 폭도 상당히 컸다.
대련만 놓고 본다면 ‘최초의 영웅’ 타이틀이 좋을지 몰랐지만 나에겐 숙련도 상승은 대련만큼이나 중요했다.
덕분에 난 일석이조의 효과로 천무칠성과 원 없이 싸우며 전직 퀘스트 중 하나인 숙련도 올리기도 열심히 수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실 즐거워하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검은 마녀 린, 그녀도 무척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녀는 후드망토를 시작으로 두 개의 손목보호대와 한 개의 허리띠, 두 개의 발목보호대를 더 풀어놓고 전력을 다해 나와 대결했다.
대련 중간중간 쉬는 시간에 내가 그녀가 벗어놓은 그것들을 들어봤는데 무게가 엄청났다.
비단철이라는 특수한 재료로 만들었다는 그것들은 그녀의 말대로라면 후드망토가 약 60kg, 손목보호대와 발목보호대가 하나에 20kg, 허리띠가 30kg이었다.
총 170kg!
그녀는 이 엄청난 무게를 늘 견디고 있었다. 난 그걸 보고 천무칠성이 괜히 천무칠성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쨌든 그렇게 그녀와 난 검산의 깊숙한 곳에서 무려 한 달(게임시간)이 넘게 대련을 계속했다.
총 전적 258전 136승 15무 107패.
대련을 처음 시작해서는 내가 좀 밀렸고 뒤로 가서는 내가 좀 더 많이 이겼다.
관찰스킬과 명상스킬을 극한으로 활용하자 결국 그녀의 움직임을 조금이나마 따라잡을 수 있었다. 덕분에 난 막바지에 거의 10연승을 거둘 수 있었다.
한 달이란 시간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난 그 시간 동안 정말 많은 것을 얻었다.
일단 그녀와의 대련을 통해 그동안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난 엄청나게 폭넓은 다양한 스킬을 익혔지만 정작 그 스킬들 완벽하게 내 것으로 만들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난 화려하지만 정작 속이 부실한 경우라고 했다.
비록 지존신공과 분심공으로 이 부실함을 상당 부분 보충하긴 했지만 그건 단지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그녀는 나에게 좀 더 내실을 다져보라고 충고했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난 너무 다양성만 추구한 경향이 있었다.
물론 내 직업 특성상 다양성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였다.
하지만 그 다양성에 내실까지 더해진다면…… 난 지금보다 몇 배 강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한편 내실을 다지기로 마음먹은 난 그녀에게 내실을 다지는 좋은 방법이 없냐고 물었었다.
근데 그때 나에게 해준 그녀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어떻게 하면 스킬의 내실을 다질 수 있을까요?”
“계속해서 반복 수련하세요.”
“반복 수련이요? 그럼 얼마나 반복해서 사용해야 할까요?”
“음…… 한 백만 번?”
“……단 한 가지 스킬을 백만 번을 반복해서 사용하라고 하신 건가요?”
“네, 전 그렇게 천암류 검술을 익혔어요.”
“……한 기술당 평균 얼마나 걸리신 겁니까?”
“백만 번 정도는 보름(게임시간)이면 충분해요. 좀 이해가 안 되는 스킬은 최소 사 백만 번은 반복 수련을 해줘야 해요.”
“……산속에서 검만 휘두르신 건가요?”
“네, 주로 산속에서 휘둘렀고 틈이 날 때마다 종종 준비운동 삼아 십만 번씩 휘두르는 것도 참 좋아요.”
“…….”
“……노력은 절대 배반하지 않아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그녀의 표정은 아직도 잊히질 않는다.
그녀와 이 대화를 하고 나서 난 왜 그녀가 강한지 확실히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단순 반복 수련.
그녀의 검이 왜 그토록 빠르고, 강력하고, 날카롭고, 은밀하고, 끈질긴지 분명히 깨달았다.
하지만 이 방법은 그녀만의 방법이었다. 내가 따라 하기엔 분명 좀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난 나름대로 나의 방법을 연구해 최대한 여러 스킬을 조화롭게 연속해서 사용하면서 천천히 내실을 다져나갔다.
난 그렇게 한 달 동안 그녀의 말대로 내가 가진 모든 스킬의 내실을 다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어차피 지존신공은 그 어떤 스킬을 사용해도 같이 발현되는 스킬이었기에 난 반복해서 여러 스킬들의 진정한 위력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덕분에 난 지존신공의 숙련도가 무려 11이 넘게 올랐다.
199.785
이게 지금 나의 지존신공 숙련도였다.
불과 한 달 만에 11가량을 올렸다. 지금까지 지존신공의 숙련도가 상승했던 것을 생각하면…… 거기에 점점 더 오르지 않는 숙련도의 특성을 생각하면 정말 엄청난 빠르기였다.
아무리 대련을 빙자한 생사결에 가까운 대결이었다지만(서로 몇 번씩 진짜 게임 아웃이 될 위기도 있었다.) 숙련도의 상승폭이 상당했다.
어쩌면 그녀도 나도…… 이 한 달간 얻은 깨달음이 상당했기 때문에 그런 것일지 몰랐다.
하루, 하루…… 매시간, 시간…… 일 분, 일 초…… 계속해서 찾아온 깨달음의 연속.
아마도 그것이 이 엄청난 숙련도 상승을 주도했을 것이다.
이제 남은 건 그 깨달음들을 전부 정리해 완벽하게 내 것으로 만드는 것뿐이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한 달이란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고…… 그녀와 난 상당히 가까워졌다.
물론 한 달이 지나도 딱딱한 그녀 특유의 말투만은 처음 만났을 때와 별로 달라지진 않았다.
* * *
“어디로 가시는 거죠?”
난 떠날 준비를 모두 끝낸 그녀를 향해 물었다.
그녀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퀘스트가 있다고 말했다. 시간제한이 있는 퀘스트…… 내가 볼 땐 아마 지금도 무척 늦었을 것이다.
원래는 더 일찍 갔어야 했지만 미루고 미루다 결국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지금까지 온 것 같았다.
“천암류의 전인으로서 마지막 복수를 해야 할 곳이 있어요.”
이미 그 무거운 피풍의와 손목보호대, 발목보호대 그리고 허리띠까지 모두 착용한 그녀는 가만히 동쪽을 바라보며 얘기했다.
“복수요?”
“네, 천암류는 세상의 존재하는 모든 어둠이 모여들어 만들어진 검법이에요. 사실 제가 동대륙으로 넘어온 것도 천암류 전인에게 전해진 몇 가지 복수를 끝내기 위해서였어요.”
그녀는 그녀답지 않게 매우 길게 말했다.
“마지막이라면…… 다른 복수는 모두 끝냈나요?”
“네, 사실 그때 투기장 리그에 참여한 건 우연이었어요. 그냥 조금 시간이 남는 것 같아…… 강자와 싸워보고 싶은 마음에 참여했었죠.”
이번에도 좀 길게 말했다. 나와 한 달을 지내며 제일 많이 변한 게 말을 조금 길게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렇군요.”
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많은 걸 배웠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무척 정중하게 나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아닙니다. 오히려 배운 건 저입니다.”
난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친구등록이란 걸 하고 싶은데요.”
한 달 동안 계속 느낀 것이지만 그녀는 참 순수하면서 고지식했다. 이 정도의 시간 동안 함께 있었으면 편하게 친구등록을 하자고 해도 되었을 것인데…… 그녀는 아직도 조심스러운 태도로 나에게 먼저 허락을 맡으려 했다.
“네, 그렇지 않아도 먼저 말을 하려고 했습니다.”
난 가볍게 그녀와 서로 친구등록을 했다.
내 친구목록은 매우 썰렁했다. 기껏해야 이나와 클레타, 마가레타가 친구목록의 전부였다.
거기에 린이 추가되었다.
그런데…… 그저 내 예상이었지만 린의 친구목록은 나보다 더 썰렁할 것 같았다. 그녀의 친구목록엔 분명 나만 존재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신 님은 이곳에 계속 계실 건가요?”
그녀는 천천히 피풍의에 달린 두꺼운 모자를 뒤집어쓰며 물었다.
“아마도…… 당분간은 여기에 있을 것 같네요. 하지만…… 원하는 것들을 얻으면 떠나야겠죠.”
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해주었다. 내가 말하는 원하는 것이란 깨달음의 정리, 그리고 지존신공의 숙련도가 그랜드마스터 경지에 오르는 것이었다.
피풍의에 달린 모자를 깊숙이 쓰자 그녀는 다시 완벽하게 모습을 숨긴 무명인이 되었다.
“……다음에 만났을 땐 제가 더 이길 거예요.”
그녀는 보는 것보다 승부욕이 강했다.
특히 그녀도 나와의 이번 대결을 통해 얻은 것이 무척 많았기 때문에 분명 다음에 만났을 땐 더 강해져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다음에도 역시…… 어쩌면 지금보다 더 차이가 날지도 모른다.
그녀가 고양이가 호랑이가 되듯 발전할 것이라면 난 고양이가 용이 되도록 발전할 것이다.
난 충분히 자신 있었다.
“하하하, 그건 다음에 만나서 확인하죠.”
난 기분 좋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그녀가 떠났다.
한 달간의 대련.
이 한 달은 나에게도 그리고 그녀에게도…… 여러 가지로 굉장히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