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이름 ― 3
* * *
이름을 찾아낸 그 순간 갑자기 모든 것이 한순간에 변하기 시작한다.
짙은 안개가 걷히듯…… 내 머릿속에 가득 차 있던 답답한 감정들이 모두 사라진다.
그리고 그 대신 새로운 생각들이 어둠 속에서 속속 뛰쳐나온다.
마치 옛날 프로그램이 삭제되고 최신 프로그램이 깔리듯…… 그렇게 내 머릿속이 하나씩 정리되어 간다.
‘난…… 류신이야!!!!’
모든 것이 정리되는 그 순간 정지되었던 시간이 다시 원래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저도 다시 만나고 싶었습니다.”
난 슬쩍 웃으며 말했다.
솔직히 다시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얼음공주니 트러블메이커니 하는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다.
그냥…… 다시 만나고 싶었을 뿐이었다.
“……고맙군요.”
그녀는 스스로 고맙다는 말이 상당히 어색한 것 같았다.
“하하, 뭐 그렇게 생각해주신다면 저도 고맙습니다.”
난 내 스스로 내가 변했다는 것을 알았다.
불과 몇십 초 전에 나와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솔직히 속 시원하게 모든 것이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확실한 건 지금의 내가 원래의 나였다.
“대련을 하고 싶어요.”
그녀는 아직도 나와의 대련에 미련을 두고 있었다.
검은 마녀와의 대련…… 왠지 재미있을 것 같다.
“좋습니다. 지금…… 제대로 한 번 어울려보죠.”
도전을 굳이 피하지 않았다. 왜 피해야 하는지 그 이유도 찾지 못했다.
“서로 힘을 숨기지 않고요.”
그녀는 화법은 짧고 간결하지만 상당히 이해하기가 쉬웠다.
“……그건 이곳에서는 좀 곤란하겠네요.”
능력의 제한을 함부로 풀 수는 없었다.
“그럼…… 다른 곳에서 하죠.”
검은 마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스릉, 찰칵!
“기다릴게요.”
검은 마녀는 나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곤 갑자기 투기장 밖으로 걸어 나갔다.
“기권하겠습니다.”
너무나 갑작스럽고 간단한 그녀의 기권선언.
순간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경기장을 벗어나 대기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난 결승이 진출해버렸다.
관중들은 미친 듯이 나를 향해 야유를 퍼부으며 경기가 무효라고 외쳤지만 이미 모든 것은 결정 났다.
내 결승 진출은 확정되었고 무명인, 아니 검은 마녀는 아무런 미련도 없이 경기장을 빠져나가 버렸다.
난 멍하니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일방적인 결정…… 확실히 그녀다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내가 결승전에 거의 공짜로 올라가게 된 건 사실이었다. 고개를 흔들며 어이없는 웃을 지은 난 경기장을 떠났다.
그렇게 4강전 중 한 경기가 끝났다.
너무나 빨리 끝난 경기…… 그것도 어이없게 끝나버린…… 덕분에 관중들은 마구 소리를 지르며 좀처럼 흥분상태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주작 투기장 측은 관중들의 소요가 너무 커질 것 같은 느낌이 들자 재빨리 다음 준결승 경기를 시작한다고 안내방송을 했다.
난 그 안내방송을 들으며 천천히 대기실 의자에 앉았다.
아직도 머릿속은 약간 혼란스러웠다.
단지 게임일 뿐인데…… 아니 게임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많은 것이 이상했다.
‘난 왜 지금까지 내 이름을 모르고 있던 것이지?’
난 남이 들으면 미친놈이라고 할 만큼 이상한 생각을 하며 조용히 게임을 종료했다.
결승전은 두 번째 준결승이 끝나고 한 시간은 지나야 시작할 것이기 때문에 아직 여유가 있었다.
“내 이름은 류신…… 나이는 스물여덟…….”
난 천천히 내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모든 것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런데 지금까지 왜 난 내 이름을 몰랐던 건가?
그리고 또 왜 그 이름이 갑자기 게임 속에서 떠오른 건가?
이뿐이 아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미래에서 과거로 돌아와 지금까지의 삶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기억은 모두 나지만…… 내가 완벽한 내가 아니었던 것 같은 기묘한 느낌.
내가 강한 것을 좋아하는 건 맞다.
늘 지존을 꿈꾸고 ‘일인군단’을 목표로 게임을 즐기는 것도 맞다.
하지만 난 그래도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정도는 아니었다.
적당히…… 내가 아무리 게임에 반쯤은 미친 사람이라고 해도 정말 완전히 미친 게 아니라면 ‘적당히’라는 말을 잊을 수 없었다.
강해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건 좋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용하는 건 그 ‘적당히’와 거리가 멀었다.
난 분명 절제를 할 줄도 알았고 남과 어울릴 줄도 알았다.
물론 내가 정의의 협객이 되고 싶은 건 아니었다.
내가 지키고 싶은 건 중도(中道), 난 결국 패도(覇道)와 중도를 지키길 원했다.
그런데 내 기억 속에 난 좀 과하게 행동한 경우도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또 남들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는 건 맞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숨기는 건 내 방식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드러낼 필요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숨기는 걸 우선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가장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직까지도 머릿속에 또렷이 남아 있는 이상한 열망들이었다.
지금까지 모든 감정의 상위에 존재했던 이 열망들.
‘집중, 독보, 군림, 은신’
난 이 열망들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미친 듯이 게임에 집중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열망을 확실히 느끼면서도 그 열망들을 조용히 관조할 수 있었다.
이 열망들은 분명 내 마음의 일부분일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평소에도 내가 한결같이 원하는 방향이었다. 만약 내가 이 이상한 일을 겪지 않았어도 난 스스로 이 열망들을 따라 행동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스스로 원했을 상황과 지금의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너무나도 또렷하고 강력한…… 마치 누군가 내 머릿속에서 이것들만 골라 강제로 강조라도 해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분명한 건 이 열망들이 과거로 돌아온 그 날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었다. 이젠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때부터 이 열망들이 내 머릿속에 자리를 잡았다.
그것들은 본래 내가 가지고 있던 열망들인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분명 다소 과도하게 강조된 상태로 계속 머릿속에 남아 있던 것 역시 사실이었다.
그리고 대미궁을 클리어하면서부터 그 열망들의 영향력이 조금씩 약해져 천마무총을 나오면서 거의 희미해졌다.
마지막으로 내가 스스로 내 이름을 찾았을 때 비로소 모든 모순된 생각들이 사라졌다. 모순된 생각들이 사라지자 지금까지 내 머릿속에서 일어난 이상한 일들이 모두 생생히 떠올랐다.
지금까지 일어난 이 이상한 일들을 말로 설명하자면 무척 힘들었다. 가장 비슷한 말을 찾는다면…… 최면, 암시?
암시건 최면이건 어쨌든 난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의 영향을 받은 삶을 살았다.
물론 지금까지의 내 삶을 스스로 부정하지는 않았다.
영향을 받았지만 분명 내 의지를 기반으로 한 영향이었다. 단지 좀 과하게 강조된 몇 가지 열망 덕분에 살짝 미쳐서(?) 살아온 느낌일 뿐이었다.
“후우,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지?”
난 조용히 중얼거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제대로 된 설명이 불가능한 이상한 일들.
“혹시 그 사람인가?”
난 나에게 다시 한번 삶을 살게 해준 남자를 떠올렸다. 그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그를 떠올리자 어느 정도 이 당황스러운 일들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시간의 흐름마저 바꾼 그라면 이 정도 일은 힘들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모든 건 내가 과거로 회귀하면서 일어났다.
난 날 과거로 보내준 그 남자의 정체도 그리고 진정한 목적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히 몇 가지 알 수 있는 건 몇 개 있었다.
그는 내가 ‘The One’에 대한 열망이 크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내가 ‘The One’에 더욱 집중하길 원했다. 그래서 그는 내가 가지고 있던 몇 가지 열망을 더욱 강렬하게 만들었다. 결국 이 모든 이상한 일들에 대한 답은 ‘The One’속에 있었다.
이렇게 모든 것이 한결같이 ‘The One’과 연결되었다.
“결국 답을 찾기 위해서라도 게임에 더 집중해야 하는 건가?”
이로써 내가 게임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는 또 하나가 생겨버렸다. 지금까지 내가 요상한 열망들에 휘둘려 게임에 몰입했다면 이제부터는 이 열망과 함께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게임에 몰입해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