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로드(The Lord)-110화 (110/250)

110. 이름 ― 2

* * *

무명인과 무명객.

혈주작과 태권무적.

이게 바로 결정된 4강 대진표였다.

먼저 싸우는 건 나와 무명인이었다.

대진표가 나오고 10분간의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난 천천히 명상하며 무명인의 모습을 머릿속에 몇 번이고 새겨 넣었다.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난 꼭 우승해야 했기 때문에 여기서부턴 최선을 다해야 할 것 같았다.

알고 있는 정보가 매우 미약한 무명인이었기 때문에 믿을 건 명상을 통한 가상 대련뿐이었다.

10분 동안 난 무려 3번을 싸웠다.

물론 내 머릿속에서 일어난 가상의 전투였지만 난 확실히 무명인과 싸워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결과는 2승 1패.

내가 보여주겠다고 마음먹은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했는데도 한 번을 졌다.

그런데 중요한 건 무명인의 모습을 상상하면 상상할수록 그가 지금까지 전력을 다한 것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인해 보면 알겠지.’

어차피 조금 있으면 현실에서 싸워야 할 상대. 모든 것은 그때 확인이 가능했다.

경기 시작 시간이 되었다.

나와 무명인은 모두 대기선에 서서 경기 시작을 기다렸다.

이번에도 역시 관중들의 응원은 내가 아닌 무명인을 향했지만 나도, 그리고 심지어 무명인도 관중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단지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무명인의 강함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싸워온 어떤 상대보다 강한!

무명인은 확실히 나에게 큰 걸림돌이 될 것 같았다.

Start!!!!

경기가 시작되었다.

지형은 바닷가의 해변지형.

거점 기둥은 단 1개만 등장했다.

난 재빨리 중앙 오른쪽에 위치한 거점 기둥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일단 거점 기둥을 먼저 선점하고 최대한 무명인과의 거리를 벌려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무명인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단 몇 걸음.

정말 신기하게도 무명인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몇 걸음을 통해 나와 비슷한 속도로 기둥에 도착했다.

‘절정의 보법!!’

이 움직임만으로도 보법으론 그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는다고 생각한 나와 비슷한 수준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보법 하나만으로도 지금까지 상대했던 모든 유저와 비교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보법만이 아니었다.

츠릿!

순간적으로 허공을 가르는 무명인의 검. 그 검은 정확히 내 심장을 노렸다.

어쩔 수 없이 난 기둥을 포기하고 블링크를 이용해 공격을 피했다.

그러나 무명인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마치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내가 이동한 쪽을 향해 다시 검을 휘두르는 무명인.

완벽한 연속공격이었다.

‘젠장!’

블링크의 치명적인 단점은 시전자인 나도 어디로 이동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무명인은 놀라운 반응속도로 내가 이동한 지점을 향해 곧장 공격했다.

빠르고 위협적인 공격.

난 재빨리 허리를 굽히며 바닥을 굴렀다.

이런 상황에선 어설픈 스킬보단 이런 임기응변식 대응이 훨씬 좋은 방법이었다.

꽈광!

내 뒤쪽의 땅바닥이 터져나갔다.

무명인은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른 게 아니라 강력한 힘을 담아 날린 것이었다.

‘강하다!!’

단 한 수도 내게 여유가 없음이 증명되었다.

난 재빨리 오른쪽 다리를 땅바닥을 쓸 듯이 휘둘렀다. 각법 스킬 중 하나인 ‘마당 쓸기’ 스킬이었다.

하지만 무명인은 가볍게 뒤로 물러나며 내 공격을 피했다.

그리곤 다시 나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쳇!”

근거리에서 무명인의 공격은 너무 강력했다. 이럴 땐 어쩔 수 없이 거리를 벌리고 치고 빠지는 전법을 사용해야 했다.

스킬 상급빙계마법 블리자드 바인드(Blizzard Bind)!

츠츠츠츳!

내 주변으로 얼음의 기운이 퍼져나갔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하게 사용할 수 있는 블리자드 바인드. 이 마법은 이미 하이마스터의 경지에 올랐기 때문에 가벼운 수인 두 번만으로 활성화가 되었다.

쩌적!

얼음의 기운은 무명인의 두 발을 묶었다.

난 블리자드 바인드를 활성화시키는 동시에 백스텝을 밟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다시 왼손으로 준비했던 다른 마법 하나를 더 사용했다.

스킬 상급화염마법 파이어레인(Fire Rain)

화르륵!

하늘에서 떨어지는 작은 불덩어리들.

블리자드 바인드와 비슷한 효과를 지닌 화염계 마법이었다.

퍼펑! 펑!

비록 위력이 대단한 건 아니었지만 파이어레인이 부수적으로 일으키는 발화(發火) 효과는 블리자드 바인드의 빙결(氷結) 효과와 더불어 무명인의 이동속도를 크게 감소시킬 것이다.

예상대로 거리가 벌어졌다.

두 가지 마법을 빠르게 사용한 내 의도가 정확히 성공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난 분명 무명인의 이동속도를 감소시켰지 무명인을 멈추게 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블리자드 바인드와 파이어레인이 동시에 사용되었다고 해도 무명인의 실력이라면 절대 그 자리에 멈추고 있을 리가 없었다.

더 이상한 건…… 무명인은 나를 향해 뻗었던 검마저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뭐지?’

무명인의 이상한 행동에 난 순간 공격 타이밍도 놓쳤다.

바로 그 순간.

무명인이 다시 움직였다.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엄청난 빠르기로…….

어느새 무명인의 검은 내 가슴 앞에서 멈췄다. 보잘것없는 평범한 철검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어떤 무기보다 무시무시하게 느껴졌다.

그 검에서 검은 오라가 마구 뻗어 나오며 나를 압박했다.

난 재빨리 보법을 밟으며 이 오라의 영향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갑자기 들려온 무명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 자리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었군요.”

맑고 가는 매우 듣기 좋은 목소리. 하지만 목소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상당히 경직되어있는 말투. 놀랍게도 무명인은 여자였다. 그것도…… 내가 알고 있는 한 여자!

“…….”

난 조용히 서 있었다.

이곳에서 그녀를 다시 만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전과는 많이 달라 못 알아봤네요.”

여전히 책을 읽는 것 같은 그녀의 말투. 확실히 내가 알고 있는 그녀가 맞았다.

“……그런데 어떻게 알아봤죠?”

“그 두 마법…… 저와 만났을 때 사용했잖아요.”

“아…….”

난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무명인은 검은 마녀였다.

블리자드 바인드와 파이어레인의 조합은 확실히 그녀 앞에서 한 번 사용했었던 조합이었다.

“꼭 다시 한번 만나고 싶었어요.”

그녀는 살짝 고개를 들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순간 그녀의 턱과 입이 살짝 보였다.

갸름한 턱선…… 붉은 입술.

그 붉은 입술에 가벼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너무나도 갑자기……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얼굴을 전부 본 것도 아닌데……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두근.

갑작스러운 심장의 움직임.

‘왜 이러지?’

이건 정말 평소의 내 모습이 아니다.

평소에 난 언제나 냉정하고 감정을 최대한 절제할 줄 아는…….

늘 감성적인 판단보다는 이성적인 판단을 우선적으로…….

일단 게임에 집중을 먼저…….

순간 머릿속 생각이 마구 헝클어진다.

‘……그런데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어?’

이상했다.

난 왜 스스로 냉정하고 감정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이성적 판단? 게임에 집중?

이것들이 전부 내 본심인가?

정말로 내가 그런 사람이었단 말인가?

머릿속에 모순된 생각이 가득 차있다는 느낌이 든다.

답답하다.

뭔가에 구속되어 움직이지 못하는 느낌이다.

벗어버리고 싶다.

이 답답한 구속을 떨쳐버리고 싶다.

뭔가…… 아주 중요한 뭔가를 잊고 있는 느낌…… 그 한 가지만 떠올리면 이 모든 것이 사라질 것 같다.

‘나, 난…… 나는…….’

바로 그때 나는 내가…… 나 자신의 이름을 모르고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사실을 깨달았다.

삐이, 경고합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감정의 폭주가 느껴집니다. 진정하지 않으시면 강제로 로그아웃 당하실 수 있습니다.

지금 나에게 경고 메시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답답함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더 이상 게임을 하는 건 무의미 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생각을 하는 순간 갑자기 모든 세상이 정지했다.

나에게 말을 걸었던 검은 마녀도…… 갑자기 전투를 멈춘 나와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관중들도…… 모두가 멈춰있다.

난 어지러움을 느끼며 계속해서 한 가지, 단 한 가지 질문을 내 스스로에게 던졌다.

‘도대체…… 내 이름은 뭐였지?’

당황스럽다.

왜 난 내 이름을 모르는 것일까?

난 머리가 부서질 듯 아팠지만 계속해서 어둠을 헤치며 내 이름을 찾았다.

찾고 또 찾았다.

날 구속하고 있던 그 정체 모를 어둠은 날 방해하지 못한다. 내 손짓 한 번, 한 번에 흩어지는 어둠들…….

그렇게 어둠을 헤치고 헤치자 뭔가가 보이기 시작한다.

머릿속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그것!

이것은 바로 내 이름이다!!

‘난…… 내 이름은…… 류신. 그래! 내 이름은 류신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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