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이름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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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작 투기장 갑 조 리그 공식랭킹 2위 다향.
혈주작의 심복이자 다양한 체술을 바탕으로 근접전에 달인임.
특히 캐스팅 계열 유저들은 다향에게 한 번 잡히면 빠져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음.
특유의 연계기가 뛰어나고 간간이 사용하는 암기술도 무시하지 못할 수준임.
……
……
난 경기 전 미리 봐두었던 다향에 대한 분석 내용을 상기하며 조용히 대기선 위로 올라갔다.
거의 일방적으로 쏟아지는 다향을 향한 응원.
다향은 독특한 경기방식으로 많은 인기를 누리는 주작 투기장의 스타플레이어 중 한 명이었다.
나를 노려보는 다향의 눈빛에서는 투기가 철철 넘쳐흘렀다. 마치 당장에라도 나를 잡아 박살이라도 내버릴 것 같았다.
‘워워, 진정 좀 하라고.’
난 슬쩍 웃으며 가볍게 손을 흔들어줬다.
다향은 이런 내 모습을 보곤 더욱 험악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나와 다향이 대기선에 정렬하자 관중석과 대기선에 투명한 쉴드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시작된 카운트다운.
10, 9, 8…….
잔뜩 웅크린 다향. 저 자세는 분명 거점 포인트는 모두 무시하고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그에 알맞게 상대해주지.’
2, 1, Start!!
츠릿!
투기장의 지형이 변형되며 대기선의 쉴드가 사라졌다. 지형은 커다란 바위가 몇 개 있는 평지 지형.
거점 기둥은 1개였다.
지형은 나에게 조금 유리할지 몰라도 거점 포인트는 다향에게 유리했다. 하지만 애초에 다향은 지형이고 거점 포인트고 모두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게 분명했다.
꽝!
나를 향해 돌진해 오는 다향.
그의 속도는 매우 빨랐다.
‘워워!’
하지만 이미 다향의 이런 돌진을 예상해 난 미리 머릿속으로 준비하고 있던 블링크 마법을 펼쳤다.
흐릿!
콰광!
내 신형이 사라지자 그곳에 다향의 몸통박치기가 작열했다. 비록 멀쩡한 벽을 때린 몸통박치기였지만 그 위력은 경기장 전체를 살짝 흔들 정도로 강력했다.
“어딜 도망가!”
다향은 벽을 때린 충격을 그대로 이용해 곧장 나를 향해 다시 돌진했다.
훌륭한 움직임.
하지만 그래도 나를 쉽게 잡을 순 없었다.
난 다시 한번 블링크를 이용해 몸을 빼내었다.
그러나 이번엔 다향이 작정하고 내가 블링크를 사용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내 위치를 재빨리 확인하고 거의 90도 각도로 방향을 바꿔 빠르게 내 앞으로 다가온 다향.
다향은 오른손을 뻗어 내 몸을 잡으려고 했다.
일단 다향에게 한 번 잡히면 그때부턴 완전히 다향의 페이스가 될 것이 뻔했다.
지금은 무조건 다향의 공격권에서 벗어나야 했다.
난 황급히 보법 유수행을 사용했다.
스슥.
찌익!
아슬아슬하게 내 몸을 비껴가는 다향의 오른손. 그의 손은 그 자체로 강력한 위력을 지니고 있는지 내 로브를 살짝 찢으며 스쳐 지나갔다.
재빨리 유수행 보법을 밟으며 다향의 공격을 피했지만 위험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거리는 여전히 가까웠고 다향은 아직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한번 나를 향해 다가오는 다향의 손.
이번엔 왼손이었다.
‘유수행으로 피해도 또 오른손이 날아온다.’
유수행은 거리를 벌리는 보법이 아니었다. 그렇다는 얘긴 결국 계속해서 다향의 손의 공격권에 노출되어 있을 것이란 얘기였다.
이럴 땐…… 역습이 필요했다.
난 재빨리 다향의 왼손을 향해 내 오른손을 뻗었다.
그와 동시에 왼손은 교묘하게 회전하며 다향의 오른쪽 어깨를 공격했다.
상황이 급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쓰지 않으려고 했던 기술을 사용했다.
내가 익힌 몇 개의 체술 중 하나.
바로 선풍권과 업어치기를 조합해 만든 회오리 엎어치기였다.
휘리리릭! 퍽!
띠링, 완벽한(97%) 반격기술을 성공시켰습니다. 데미지가 +30% 상승합니다.
타이밍이 좋았던 것일까?
완벽한 반격기술 판정까지 받았다.
꽝!
난 다향의 왼손과 오른쪽 어깨 깃을 잡고 그를 그대로 바닥에 던져 버렸다. 체술의 달인이라던 다향이 체술에 당했다.
순간 관중석에 정적이 흘렀다.
‘아차!’
난 괜히 튀는 모습을 보여준 것에 대해 살짝 후회했지만 방금 타이밍은 어쩔 수가 없었다.
“큭! 이이익!”
다향은 놀란 표정과 함께 치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향해 다시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미 내 손엔 술법이 하나 완성되어 있었다.
스킬발동 상급주술 진공파(眞空波)!!
꽈광!
흥분해 달려든 다향의 가슴에 제대로 작렬하는 진공파. 넉백 효과까지 지닌 기술이었기 때문에 다향은 멀리 튕겨 날아갔다.
다향은 어리석었다.
그는 진짜 내가 천만년우주방어술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방어할 틈을 주지 않으면 자신이 무조건 이길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난 천만년우주방어술사이기 이전에 ‘더 로드’ 신이었다.
스윽.
난 멀리 날아간 다향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조용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명백한 도발.
스킬로 존재하는 건 아니었지만 유저들끼리 싸울 땐 거의 100% 통하는 훌륭한 도발기술이었다.
“이, 이노오오옴!!”
다향은 크게 분노하며 나를 향해 황소처럼 다시 돌진했다.
하지만 그가 알까?
결국 자신은 투우사에게 쓰러지는 한 마리 황소처럼 바닥에 눕게 될 것이란 것을?
이미 잔뜩 흥분한 다향을 잡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지나친 흥분은 전투에선 독(毒)이 되는 법. 다향은 이런 기본적인 사실을 무시했기 때문에 절대 내 몸을 잡을 수 없었다.
결국 내 몸을 잡지 못한 다향은 공격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허무하게 패배했다.
간간이 암기를 날렸지만 그 정도 암기술로는 나에게 데미지를 입힐 수 없었다.
1차전은 그렇게 깔끔한 내 방어의 승리로 끝났다.
회오리업어치기를 보여줬을 땐 살짝 놀랐던 관중들도 그 후로는 내가 어김없이 방어 위주의 플레이를 펼쳐주자 언제 놀랐냐는 듯 나에게 아주 큰 야유를 퍼부어주었다.
뭐, 오히려 좋았다.
회오리업어치기 같은 건 깔끔하게 잊어주는 게 나에게 도움이 되어주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1차전이 끝나고 5분간의 휴식 후 다시 2차전이 시작되었다.
다향은 휴식을 취하며 동료들에게 무슨 말이라도 들은 듯 이번엔 흥분을 가라앉히고 비장한 표정으로 경기에 임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2차전은 그의 각오와는 전혀 상관없이 시작부터 내 쪽으로 기울어버렸다.
온 세상을 하얗게 만드는 설경.
장애물이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고. 거점 기둥이 무려 5개가 만들어졌다.
그것도 내 쪽으로 4개가 몰렸고 다향 쪽으론 1개만 존재했다.
이런 지형은 인(In)파이팅 위주로 공격을 우선시하는 다향에겐 최악이었고 아웃(Out)파이팅 위주로 방어를 우선시하는 나에겐 최고였다.
결국 다향은 냉정함을 되찾은 2경기도 죽어라 내 뒤만 잡다가 패배했다.
다향과 같이 한 가지에 특화된 유저는 오히려 내가 상대하기가 편했다.
난 다양한 기술을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상대에 따라 맞춰서 플레이하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다향과 같은 유저들은 그저 자신의 플레이 스타일을 끝까지 고수해야 했고 그 결과 자신과 상극의 플레이 스타일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난 8강마저도 내가 지금까지 보여준 스타일대로 경기를 끝냈다.
당연히 이번에도 역시 박수보단 야유가 더 쏟아졌다.
사람들은 정말 나만의 전투 미학을 몰라주었다.
8강전이 모두 끝났다.
어떤 경기는 의외의 결과가 나왔고 어떤 경기는 예상대로 결과가 나왔다.
물론 난 의외에 속하는 결과를 뽑아냈다.
근데 나 말고도 또 한 명이 의외의 결과를 뽑아냈다. 그의 이름은 무명인.
나와 마찬가지로 가명을 사용하는 유저였다.
난 그의 경기를 8강전에서 처음으로 봤다. 그동안은 경기가 겹쳐 보비 못했지만 8강전은 확실히 볼 수 있었다.
그는 검의 고수였다.
그의 8강전 상대였던 현무투기장의 강자 천리검향은 제대로 검을 써보지도 못하고 패배했다.
우중충한 로브를 입고 후드를 깊게 눌러쓴 무명인.
그는 그 모습 그대로 8강전까지 승리를 따냈다. 관중들은 무명인을 이번 대회 최대의 신비인이라고 말했다.
얼굴도 턱선이 살짝 보이는 게 전부였고 보여주는 검술이라고 해봤자 쾌검술 약간과 기기묘묘한 반격 검술이 전부였다.
그런데 그는 그 기술로 8강전까지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정확한 타이밍에 상대방의 의표를 찌르는 반격 검술.
공격은 좀 빠른가?
말 그대로 한 줄기의 섬전처럼 급소를 노리는 그의 검은 보는 것만으로 무시무시해졌다.
난 투기장 리그에 참여해서 처음으로 위기를 느꼈다.
만약 4강에서 무명인과 붙게 된다면…… 아무래도 천만년우주방어 술사라는 별명을 버려야할 것 같았다.
4강부터는 추첨을 통해 대진표를 다시 짜기 때문에 그가 내 상대가 될 가능성은 3분에 1일이었다.
솔직히 무명인보단 차라리 혈주작이나 태권무적과 붙고 싶은 게 지금 심정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난 3분에 1의 가능성을 뚫고 4강에서 무명인과 만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