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본선 리그 시작 ― 1
* * *
전진일검을 내가 이기고 나자 우리 조에 속한 다른 이들의 반응이 조금 달라졌다.
특히 다음 상대였던 겐이치는 잔뜩 긴장한 상태로 나와의 대결에 임했다.
하지만 전진일검의 말했던 것처럼 겐이치는 수준이 떨어졌다. 늦은 반응속도와 뻔히 보이는 스킬 사용.
난 단 5분 만에 깔끔하게 승부를 결정하고 최종전인 바더넬과의 대결만을 남겨두었다.
바더넬 역시 나와의 대결에서 지고 충격에 빠져있던 전진일검을 손쉽게 도륙하고 나와의 예선전 마지막 대결을 준비했다.
커다란 도끼 한 자루를 어깨에 걸쳐 멘 바더넬의 모습은 전형적인 바바리안 캐릭터였다.
아마도 강력한 힘을 중심으로 한 공격형 전사일 것이다.
물론 무식하게 힘만으로 밀어붙이진 않을 것이다. 최고의 투기장 리그에서 랭킹 9위를 기록하고 있다는 건 그가 나름대로 실력 있다는 뜻이었다.
거기에 그는 내가 전진일검을 이겼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니…… 분명 방심을 하지도 않을 것이다.
까맣게 그을린 구릿빛 피부에 근육질로 이루어진 몸을 지닌 중남미 유저 바더넬.
폴리모프 망토를 이용해 전신을 꽁꽁 가리고 있는 내 모습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띠이.
경기 준비를 알리는 신호음이 들리고 나와 바더넬은 사각의 링 양쪽 끝 대기라인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서로의 거리는 50m.
길지도 짧지도 않은 거리였다.
10, 9, 8……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난 마법총서를 손에 들고 조용히 바더넬의 몸 전체를 훑어보았다.
미세하게 떨리는 오른발.
아마도 시작과 함께 빠르게 선공을 취하려는 것 같았다.
3, 2, 1, Start!!
번쩍!
대기라인에 존재하던 실드가 사라지며 드디어 바더넬과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꽝!
오른발을 강하게 구르며 한걸음에 나에게 돌진해 들어오는 바더넬. 역시 예상대로였다. 난 미리 마음속으로 준비하고 있던 고급 스킬을 빠르게 완성 시켰다.
스킬조합 상급보조마법 블링크(Blink) + 중급주술 은월몽(隱月影)
문 블링크(Moon Blink)
파팟!
난 재빨리 블링크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문 블링크를 사용하며 바더넬의 돌격을 피했다.
그냥 블링크는 주변 20m 반경 안의 무작위 장소로 이동하는 스킬이었고 문 블링크는 이동과 동시에 원래 내가 있던 장소엔 내 모습과 똑같은 환영을 만들어놓는 스킬이었다.
당연히 바더넬의 도끼는 내 환영을 베었다.
촤악!
갈라지는 환영.
그냥 블링크 스킬을 사용했다면 바더넬은 빠르게 공격을 멈추고 내가 이동한 방향으로 다시 공격을 시도했겠지만 문 블링크의 효과로 바더넬은 헛되게 공격 스킬을 허공에 날려버렸다.
하지만 확실히 바더넬은 실력이 있었다.
보통 유저라면 이 헛손질 한 방으로 아주 큰 허점이 생기는 것이 당연하지만 바더넬은 재빨리 몸을 회전시키며 내가 이동한 방향으로 들고 있던 커다란 도끼를 던져 버렸다.
휘리이잉!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가르며 날아오는 양손 도끼. 맞으면 그냥 바로 게임 아웃이라도 될 것 같은 위력적인 모습이었다.
스윽.
하지만 이런 임기응변에 가까운 공격에 맞는 건 초보유저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난 재빨리 환영보를 밟으며 옆으로 몸을 움직였다.
꽈광!
바닥에 박히는 양손 도끼.
이 도끼는 바더넬의 주력 무기였다. 그런데 바더넬이 이 무기를 던졌다는 건…… 뭔가 다른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다음 공격은…….’
환영보를 이용해 재빨리 공격권에서 벗어난 난 바더넬 쪽을 바라보며 미리 복잡한 수인을 준비했다.
그 순간 바더넬은 양손 주먹을 머리 위로 올리고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휘잉! 꽈광!
그리고 곧장 양손 주먹으로 땅바닥을 내리찍었다.
쩌저저저저저적!
나를 향해 날아오는 강력한 충격파.
도끼살인마는 도끼를 들고 있지 않아도 충분히 위력적인 것 같았다.
난 재빨리 미리 준비했던 수인을 완성시켰다.
스킬 발동 상급술법 태극벽(太極壁)!!
지이잉!
술법으로 만들어진 태극의 기운은 충격파를 교묘하게 와해시켜 내 양옆으로 분산시켰다.
콰과과광!
나를 가르며 양옆으로 폭발하는 충격파. 그 위력은 상당히 강력해 보였다.
그렇게 충격파를 흘려보낸 난 반격을 준비했다.
술법사 같은 캐스팅 계열 직업과 몸을 직접 쓰는 전사 계열 직업의 전투에서 공격의 주도권은 전사 계열 직업 유저가 가지는 게 맞았다.
캐스팅 계열의 직업은 주로 선방어 후 역습 한 방이 강력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전투 성향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속 방어만 해서는 자칫 위험해 질 수 있었다.
특히나 난 공격의 주도권을 뺏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무리 지금 내가 주술사 유저로 행동하고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파팟!
마수소환 蟲(충)[마수(魔獸) 비제이 : 작은 벌처럼 생긴 곤충형 마수들. 주로 떼로 뭉쳐 다니면서 시야를 방해하고 움직임을 둔하게 만드는 신경독이 담긴 독침을 뿌리는 하급마수들.
잠깐의 캐스팅과 함께 열린 어둠의 문에서 한 무리의 벌레형 마수 충들이 뛰쳐나왔다.
어림잡아 100여 마리…… 내가 마계에서 알뜰살뜰하게 모은 녀석들이었다.
위이이잉~
빠르게 바더넬을 향해 날아가는 한 무리의 곤충 떼.
바더넬은 자신이 바닥을 구르며 자신이 던진 도끼를 낚아채 날아오는 곤충 떼를 향해 휘둘렀다.
휘잉!
하지만 그런 단순한 공격에 맞아 줄 녀석들이 아니었다.
하급마수였지만 움직임이 매우 빠르고 상대하기가 까다로웠던 충들. 공격이 위력적이진 않지만 시야를 방해하고 움직임을 자꾸 느리게 만드는 신경독 때문에 매우 귀찮은 존재가 될 수 있었다.
“이익!”
바더넬 역시 난생처음 겪어보는 이상한 소환수의 공격에 짜증이 잔뜩 난 표정이었다.
드디어 공격의 주도권을 찾아올 기회가 왔다.
난 양손으로 각기 다른 두 개의 수인을 맺었다. 또한 그와는 별개로 양손에 각각 불의 정령과 바람의 정령의 기운이 빙의 되어 있었다. 총 4가지 기술을 사용하는 신기에 가까운 컨트롤! 하지만 이미 하미마스터의 경지를 넘은 분심공을 익힌 나에게 이런 다중 캐스팅은 어렵지 않은 기술이었다.
펑! 퍼펑!
오른손에선 한 마리의 붉은 화룡이.
그리고 왼손에선 서늘한 북풍(北風)의 한기가 뻗어 나갔다. 상급주술인 화룡포와 삭풍의 발현. 정령의 기운까지 담고 있는 기술이라 그 위력이 상당했다.
“헉!”
나의 갑작스런 반격에 바더넬은 크게 당황하며 양손 도끼를 세워 방어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그의 이런 판단은 명백한 실수였다.
이번 공격은 어렵더라도 차라리 피해야 하는 공격이었다.
콰광! 콰과광!
“크악!”
화룡포와 삭풍의 공격은 고스란히 바더넬의 도끼에 적중되었고 예상을 뛰어넘는 두 주술의 위력은 바더넬의 방어스킬을 깨버렸다.
도끼와 함께 뒤로 밀려나는 버더넬.
아마도 이번 충격으로 상당한 생명력을 잃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한 번 제대로 주도권을 잡았으니 이대로 몰아칠 기회였다.
난 부츠에 저장된 질주 스킬과 속보 스킬을 모두 사용하며 빠르게 바더넬에게 붙었다.
케스트형 캐릭터는 절대 근접공격형 캐릭터와 가까이 붙으면 안 된다는 게 정설.
하지만 난 그런 정설 따윈 가뿐히 무시하고 일부러 거리를 좁혔다.
스킬 발동 상급카드마법 마리오네트.
츠르르르!
난 내가 가지고 있던 유일한 A급 카드마법을 사용했다. 카드마법 중에서도 보조마법 계열에 속하는 마법.
순식간에 내 앞으로 수십 개의 손이 튀어나왔다.
그렇게 튀어나온 손들은 빠르게 바더넬의 몸 이곳저곳을 잡아버렸다.
마리오네트의 손들이 바더넬을 잡는 걸 확인한 순간 난 가볍게 양손을 뒤집었다.
콰득!
그 순간 바더넬의 몸이 뒤틀렸다.
“크아아악!”
보조마법 계열의 카드마법이었지만 어떻게 사용할 지에 따라 이렇게 강력한 공격 기술이 될 수도 있었다.
순식간에 몇 번의 큰 타격을 입은 바더넬은 본능적으로 이렇게 계속 당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갑자기 온몸에 힘을 주며 강하게 발을 굴렀다.
꽝!
“으아아아!”
대략 전사들이 사용하는 포효계열 스킬인 것 같은데…… 아마도 이동 불가능 요소를 모두 제거하고 순간적으로 전투력이나 생명력을 올리는 기술로 보였다.
곧바로 풀려버리는 마리오네트.
바더넬은 마리오네트가 풀리자 곧장 나를 향해 도끼를 내리찍었다.
찌익!
허공을 강하게 가르며 내 머리 위로 떨어지는 도끼.
마치 나를 좌우로 갈라버릴 것 같은 기세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도끼는 나를 토막 내지 못했다.
스르르.
물 흘러가듯 자연스러운 몇 번의 걸음.
그 몇 번의 걸음으로 도끼의 공격 영향권에서 벗어났다. 마치 우연히 피한 것 같은 이 모습.
이것이 바로 보법 유수행(流水行)이었다.
물이 흐르듯 몇 발자국을 걷는 보법.
움직임이 매우 단순하고 움직이는 거리 또한 지극히 짧지만 이 보법은 내가 알고 있는 보법 중 최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유는 바로 이 보법이 그 어떤 스킬들과도 기가 막히게 연동해서 사용할 수 있고 이 보법을 사용한 후 다음 스킬을 사용할 때 역시 너무나 자연스럽게 연결이 된다는 점에서 이 보법은 최고의 보법이라 불릴 만했다.
난 어떤 스킬을 사용하면 곧바로 이어서 다음 스킬을 준비한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스킬…… 마치 톱니바퀴를 무한하게 이어가듯 내 스킬을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런 나에게 유수행은 톱니와 톱니를 이어주는 작은 이음새 톱니 같은 존재였다.
없어서는 안 되는 꼭 필요한 존재.
그렇기에 난 유수행을 매우 즐겨 사용했다.
몇 번의 걸음으로 난 바더넬의 오른쪽 옆으로 이동했다.
꽝!
땅바닥을 내리찍는 그의 도끼.
그와 동시에 그의 오른쪽 옆구리가 열렸다.
스윽.
그 옆구리에 가볍게 오른손을 밀어 넣었다.
마수소환 섬전(閃電)!!
번쩍! 꽈광!
오른손이 강하게 빛나며 최상급 마수 섬전이 바더넬의 옆구리를 강하게 물어뜯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내가 예상하지 못한 반격이 날아왔다.
“크악!”
바더넬은 섬전에게 밀려 옆으로 튕겨나면서도 본능적으로 내 왼쪽 어깨를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꽝! 주르르륵!
예상하지 못한 반격이었기 때문에 나도 그대로 공격에 적중되어 옆으로 튕겨나갔다.
서로 공격을 주고받으며 튕겨 난 바더넬과 나.
물론 위력 면에선 내 공격이 월등히 뛰어났지만 바더넬의 본능적인 공격도 상당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내가 진짜 술법사 계열의 유저였다면 이번 공격 한 번만으로도 상당히 위험했겠어.’
캐스팅 계열의 유저들의 치명적인 단점.
바로 방어력이 미약하고 생명력이 낮다는 점이었다. 그렇기에 자칫 한 방만 제대로 맞아도 위험할 수 있었다.
바더넬도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이 충격을 입는 무리한 상황에서도 나에게 반격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알지 못하는 한 가지 사실…… 난 방어력이 낮지도 않았고 생명력 또한 꽤 높았다. 폴리모프 망토의 효과로 능력치가 20% 제한된 상태라고 해도 그 사실은 크게 변화가 없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다른 유저와 현저히 다른 점이었다.
“크으…… 이놈…….”
바더넬은 생명력이 상당히 빠진 상태에서도 투지가 펄펄 넘치는 모습을 유지했다.
과연 도끼살인마다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는 나를 이길 수 없다. 솔직히 리그가 시작되기 전에는 이런저런 걱정이 많았는데…… 막상 미친 듯이 수련을 하고 경기를 시작해보니 이 전투방식이 절대 약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당히 강했다.
살짝살짝 눈에 보이지 않게 몇 가지 기술들만 잘 섞어주면 충분히 남들에게 술법사처럼 보이며 아주 강력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주 좋아.’
난 슬쩍 미소 지으며 다시 도끼를 고쳐 잡고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바더넬을 바라보았다.
현무 투기장 갑 조 리그 랭킹 9위?
그래 봤자 결국 나에겐 통과점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