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8. 3차 전직 퀘스트 ― 1
* * *
워낙 살 게 많아서 그랬을까?
난 무려 몇 시간 동안 경매장을 살피고 또 살핀 끝에 간신히 대충이라도 장비를 전부 채워 넣을 수 있었다.
물론 몇 개의 아이템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일단 급하니까 적당히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템뿐만 아니라 여러 무공(스킬) 서적도 대량 구입한 나는 그 자리에서 모두 배워 버렸다.
어차피 배울 수 있는 스킬의 제한이 없는 나였기 때문에 배워둔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었다.
이번 천마무총에서의 여러 가지 깨달음 덕분에 이번에 내가 배운 스킬의 종류는 매우 다양했다.
심지어 ‘구걸하기’ 스킬까지 배웠으니 웬만한 건 거의 다 배웠다고 보면 되었다.
장비를 정비하고, 새로운 스킬을 배우고, 마지막으로 소모성 아이템을 완벽하게 구비한 나는 꼰정과 그 일행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들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가볍게 정비를 끝내고 미리 선점해 두었다는 그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과 만난 나는 말을 타고 꼬박 사흘 동안 달렸다.
그들이 가는 곳은 낙월곡(落月谷)이라는 곳이었다.
그곳은 태령산맥의 깊숙한 곳에 있는 계곡이라 근처에 마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마을이 존재한다고 해도 순간이동진 같은 것이 있을 리는 만무했다.
사실 원래대로라면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태령산맥 초입의 태령현에 있는 순간이동진에 이름을 등록해 놨기 때문에 반나절이면 갈 수 있는 낙월곡이었지만 그 마을을 가본 적이 없는 나 때문에 일부러 같이 말을 타고 삼 일 동안 같이 이동하는 수고를 해주었다.
일단 낙월곡으로 가는 것을 우선으로 했기 때문에 이동하며 사냥 같은 것은 거의 하지 않았다.
단지 덤벼드는 몇 마리 야수들이나 몇 무리 산적(NPC)들을 처리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삼 일을 달려-중간에 태령현에 들려 마지막으로 가볍게 정비를 하고-낙월곡에 도착했다.
낙월곡은 일종의 필드 던전이었다.
천마무총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지도를 구해 위치를 알아둔 곳.
천마무총이 아니었다면 이들은 원래 이곳에 와서 사냥을 할 생각이었다고 했다.
낙월곡에는 주로 레벨 400~450 수준의 혈영귀(血影鬼)나 레벨 350~400 수준의 태령흑곰. 레벨 400~450 수준의 태령적표가 나타났는데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혈영귀가 많이 등장했다.
특히 안쪽에는 아마도 낙월곡의 보스몬스터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는데…… 우리는 일단 가볍게 입구부터 청소하면서 전진했다.
‘발동! 무신합격진!’
츠릿!
나의 간단한 손동작으로 나를 제외한 다섯 명의 움직임이 묘하게 변했다.
“오오! 벌써 돌아온 건가? 힘이 넘친다!”
붉은하늘은 크게 소리치며 허공을 향해 미친 듯이 마나에로우를 날렸다.
그가 일명 광란뇌우(狂亂雷雨)라 부르는 위력적인 광역 궁법 기술이었다.
콰과과광!
무신합격진의 발동으로 공격력과 방어력이 급상승했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또다시 학살의 시간이 돌아왔다.
2시간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30분간의 학살의 시간.
이 진법은 예상보다 훨씬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다. 특히 워낙 호흡이 잘 맞는 이들이었기에 이 진법을 최대한 활용할 줄도 알았다.
진법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진법이 유지되는 30분을 제외한 나머지 1시간 30분은 적당히 몬스터들을 한 곳으로 몰아가며 사냥을 한다.
그리고 학살의 시간이 돌아오면 꽤 몰려 있는 몬스터들을 말 그대로 학살해 버린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사냥의 패턴이었다.
“이얍!”
꼰정의 도에서 뿜어져 나온 강력한 푸른색 강기는 전방의 혈영귀 두 마리를 동시에 절단해버렸다.
무신의 도법을 배운 꼰정은 마치 호랑이 등에 날개라도 달아준 것처럼 대단히 강해졌다.
다른 이들도 강해졌지만 꼰정만큼은 아니었다.
무신의 검법을 이어받은 페티는 원래 검법을 전문으로 익힌 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직 검법에 익숙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폴우 역시 양손 도끼를 버리고 선택한 권법이었기 때문에 페티와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붉은장미가 얻은 금은보화는 파티가 나누어 가졌고 어차피 지법이라고 해봤자 여유 있을 때나 사용하는 것이지 평소에는 잘 사용하지 않았다.
그나마 붉은하늘이 보법과 신법을 배워 좀 강해졌지만 그 역시 주력은 궁술인지라 꼰정처럼 확 변하지는 않았다.
“이야~ 멋져.”
난 엄지손가락을 들으며 꼰정에게 가볍게 감탄사를 날려준 후, 미리 준비한 붉은색 종이를 꺼내 들고 죽어서 사라져 가는 혈영귀에게 다가갔다.
스킬발동 혼백봉인(魂魄封印)!!
흐릿! 화륵!
혈영귀의 혼백이 종이에 스며들다가 갑자기 종이가 불타 버렸다.
“젠장! 또 실패네.”
지금 내가 사용한 스킬은 봉인술사들이 사용하는 기본 스킬이었다.
적혼지(赤魂紙)라고 불리는 종이에 몬스터들의 혼백을 저장한 후 나중에 그 혼백의 봉인을 풀어 공격하는 게 봉인술사들의 주력 공격이었다.
아직은 스킬 숙련도가 낮아 스킬을 사용해도 거의 90% 이상 실패를 했지만 그래도 숙련도는 올라갔기 때문에 난 꾸준히 스킬을 사용하고 있었다.
“또 실패했어요? 오빠도 참 대단하네요. 그렇게 많은 스킬을 익히고 있으면서 또 다른 스킬을 익히시려고 하다니.”
꼰정은 혀를 내두르며 중얼거렸다.
이들에겐 대충 내가 어떤 직업을 지니고 있는지 알려주었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이미 내 능력을 두 눈으로 직접 본 사람들이라 그런지 금방 수긍을 했다.
“배움의 길은 끝이 없는 거야. 너도 자만하지 말고 무신이 남긴 도법을 완벽하게 네 것으로 만들어.”
“치이~ 누가 자만한다고 해요! 두고 봐요. 적어도 도법에서만큼은 무신을 넘어서 줄 테니!”
꼰정은 들고 있던 커다란 도를 치켜세우며 당당하게 얘기했다.
한없이 밝은 모습.
이 모습이야말로 꼰정이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난 천마무총을 빠져나온 후 이들과 술을 마시던 자리에서 폴우에게 살짝 꼰정이가 왜 천마무총 안에서 그렇게 행동했는지 들을 수 있었다.
예상대로 사연이 있었다.
그날 밤 폴우는 날 따로 몰래 불러내어 얘기를 해주었다.
* * *
“꼰정이는 내 친동생이다.”
“녀석은 어릴 때부터 운동신경이 매우 뛰어났어. 아주 꼬맹이 때부터 태권도를 시작했었는데…… 열아홉 살에는 국가대표에 뽑힐 정도로 상당한 실력을 자랑했었지…… 태권도만 잘하는 것이 아니었어. 검도, 합기도, 복싱 그녀는 운동, 특히 격투기 종류에 아주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어…… 그랬던 녀석에게 재앙이 찾아온 건 꽃 같은 나이 스물한 살 때였다.”
이미 붉어질 때로 붉어진 폴우의 두 눈동자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갑자기 녀석이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았어. 그래서 병원으로 달려갔지. 그런데 녀석은 이미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어.”
“충격이었지……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이 녀석이 멋진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딱 지 닮은 자식을 낳아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그걸 볼 수가…… 아니, 아예 이 녀석과 말도 할 수 없게 돼버렸지.”
“몇 달이 지나니까 의사가 포기해야 할 것 같다고 하더라. 난 그래서 그 의사를 집어 던져 버렸다. 말이 돼? 나보고 윤정이를 포기하라는 게? 난 절대 포기할 수 없었어. 그때…… 친구 놈…… 아! 알지? 저 안에 있는 붉은장미…… 저 녀석이 나에게 황급히 한 가지 소식을 알려주었다.”
“혼수상태의 환자들을 위한 가상현실 치료기. 상당히 고가의 치료기였지만 부모님이 마련하신 돈과 내가 회사를 퇴직하고 받은 퇴직금을 합쳐서 그 치료기를 샀다.”
“그리고…… 1년 뒤…… 난 드디어 내 동생과 다시 얘기할 수 있었다.”
“참 힘든 시기였어. 아마 저기에 있는 붉은장미나 페티, 그리고 붉은하늘이 옆에 없었다면 버티지 못했을지도 몰랐어. 하지만 난 이 녀석들과 함께 견뎌냈지. 꼰정의 상태는 점점 좋아졌다. 확실히 그 치료기는 효과가 있었어. 그렇게 1년이 더 지나고 지금으로부터는 약 2년 전 우리는 DH 소프트의 광고를 봤다. 꼰정이가 어릴 때부터 게임을 좋아했었거든…… 그래서 그렇게 우리들은 꼰정이와 함께 ‘The One’을 시작했다.”
폴우의 얘기가 끝나고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확실히 왜 꼰정이가 그렇게 반응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게임을 시작하고 꼰정이의 상태는 나날이 좋아지고 있다. 정말 희망적이지! 사실 이런 얘기를 다른 사람한테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왠지 너에게는 하고 싶어지더군.”
폴우는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들기며 웃었다.
눈물을 흘리며 웃는 폴우. 난 말없이 내 어깨 위에 있는 그의 손을 두들겨 주었다.
* * *
잠깐 폴우의 얘기를 떠올렸던 난 내 앞에서 커다란 도를 들고 장난스러운 포즈를 잡고 있는 꼰정을 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그래, 그깟 무신은 확 넘어서서 꼭 전무후무한 지상 최강, 우주 최강의 도후(刀后)가 되라!”
“헤헤, 네에엡!”
꼰정은 밝게 웃으며 나를 향해 거수경례를 해주었다.
“뭐 해~ 놀지 말고 사냥해! 지금은 학살의 시간이라고~!”
정신없이 활시위를 당기던 붉은하늘은 나와 꼰정이를 보며 투덜거렸다.
“알았다, 알았어!”
그의 말이 맞았다.
지금은 놀 때가 아니었다.
가방에서 한 뭉치의 적혼지를 꺼내 든 나는 조용히 웃었다.
“자~ 달려보자고!”
낙월곡에서의 사냥…… 이제는 호흡이 척척 맞는 그들과의 즐거운 사냥은 그렇게 며칠이 넘게 계속되었다.
낙월곡에 온 지 대략 20일(게임 시간) 정도가 흘렀다.
우리는 낙월곡의 최종 보스였던 혈영마군(血影魔君)을 가볍게 잡아버리고 며칠 정도만 더 그곳에서 사냥했다.
아무래도 최초 던전 발견 보너스가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이곳이 다른 곳보단 경험치나 아이템 면에서 훨씬 좋았다.
그렇게 20일을 보내자 내 레벨이 399가 되어 있었다. 나는 특별히 전직 NPC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399가 되자 자동으로 전직 퀘스트가 주어졌다.
전직 퀘스트를 받은 이상 이곳에서 같이 사냥을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는 법.
그리고 이별이 있으면 또다시 만남이 있는 법. 이제는 잠시 헤어져야 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