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2. 세계수 이그니아 ― 1
* * *
띠링, 대미궁의 모든 시련을 이겨낸 당신은 대미궁의 주인을 만날 자격이 있습니다.
또다시 들려오는 시스템 메시지.
이것이야말로 내가 몇 개월을 고생해 이루려 했던 것이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그다지 크지 않은 방 같은 곳이었다. 난 정확히 이곳이 어딘지 알고 있었다.
‘99층.’
난 그 누구도 가보지 못했다는 대미궁 99층에 와 있었다.
띠링, 세계수 ‘이그니아’가 당신과 대화하기를 원합니다. 대화에 응하겠습니까? (Y/N)
생각할 필요가 있는가?
당연히 ‘Y’였다.
[반갑다, 불멸의 인을 지닌 크로노스 대륙의 생존자여…….]
이그니아의 말이 내 정신에 울려 퍼지며 내 눈앞에 하얀빛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나무가 나타났다.
이런 대화는 예전에도 한 적이 있었다. 성화의 자아와 나누었던 대화…… 그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당신이 이그니아입니까?”
[그렇다, 내가 이그니아다. 난 정말 오랜 세월 동안 이곳에서 숨죽이며 너를 기다렸다.]
“나를? 하지만 난 이곳에 오지 못했을 수도 있었는데?”
[모든 것은 인연(因緣)…… 너와 난 만나야 할 운명이었기에 여기서 만난 것이다. 그리고 그 운명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다.]
난 이그니아가 하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인공지능이 미리 준비되어 있던 말을 해주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렇군요.”
난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내가 누군지 아느냐?]
“‘세계수 이그니아’ 딱 이것밖에 알지 못합니다.”
어느 정도 예상이 되는 건 있었지만 정확하게 알고 있는 건 정말로 이것뿐이었다.
[그렇겠지.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난 네 말대로 ‘세계수 이그니아’다. 아주 먼 옛날에는 나도 너와 마찬가지로 크로노스 대륙의 일원이었다.]
역시 여기까지는 내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왠지 이그니아는 성화와 비슷한 존재인 것 같았다. 그 말은 즉, 내가 지금 또 하나의 종족퀘스트와 연관이 되었다는 소리였다.
[온갖 역경과 시련을 이겨내고 이곳에 찾아온 너라면…… 크로노스 대륙의 비밀을 알 자격이 있다.]
“비밀? 무슨 비밀을 말씀하시는 거죠?”
[너는 먼 옛날 크로노스 대륙의 일원이었지만 정작 크로노스 대륙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을 것이다.]
“네, 맞습니다.”
천서(天書) 시스템은 과거 크로노스 대륙의 기억을 되찾아주는 기능도 가지고 있었지만 워낙 방대한 시스템이라 아직 제대로 기억을 찾은 건 거의 없었다.
[왜 그런지 아는가?]
“모르겠습니다.”
[모르겠지…… 가이아가 발휘한 ‘전이’의 권능은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중 특히 우라노스 님의 축복을 받은 인간들은 모든 과거의 기억을 잃었다. 그나마 인간은 우라노스 님의 강력한 힘 때문에 육체가 소멸하지는 않았지만…… 중요한 과거의 기억들이 완전히 사라졌다.]
내가 알고 있던 정보와는 조금 달랐다. 내가 알기론 가이아가 우리(불멸의 인을 지닌 존재. 즉, 유저)를 이용해 레아 대륙의 문명을 발전시키려고 한 것으로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가이아는 정말로 단순히 ‘전이’라는 권능 하나 때문에 힘을 잃은 것이고 우리는 우라노스의 힘으로 레아 대륙에서 다시 부활한 것이었다.
뭐 어쨌든 당장 중요한 정보는 아니었다.
하지만 언젠간…… 분명 중요하게 다루어질 정보…… 난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두 머릿속에 확실히 기억시켰다.
[원래 크로노스 대륙에는 다양한 종족이 존재했다. 그중에서도 신들의 선택을 받은 특별한 종족이 있었으니 그들은 8대 종족이라 불렀다.]
성화가 전이의 비밀을 얘기했다면 이그니아는 종족의 비밀을 얘기하는 것 같았다. 들어두면 다 나중엔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정보…… 난 집중을 해 들었다.
[8대 종족 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건 방금 말한 인간…… 바로 너와 같은 이들이었다. 인간은 우라노스 님이 직접적인 영향력을 발휘해 만든 존재…… 당연히 그들은 크로노스의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인간을 제외한 7개의 종족은 우라노스 님이 크로노스에 만든 일곱의 신령(神靈)들이 만들었다. 그리고 아쉽게도 신령들이 만든 종족은 모든 기억과 육체마저 잃었다. 그들이 남길 수 있는 건 종족의 ‘흔적’뿐이었다.]
“신령?”
[그렇다…… 우라노스 님을 도와 크로노스를 움직이는 일곱 명의 하위신…… 나 역시 그중 하나였다.]
이제야 대충 이해가 되었다. 성화도, 지금 나와 대화하는 이그니아도 모두 우라노스의 하위신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레아 대륙으로 전이된 후에도 계속해서 가이아에게 대항하고 있던 것이었다.
“아, 그럼 당신도 우라노스 님이 남긴 안배인가요?”
[잘 아는구나. 그렇다. 난 우라노스 님이 남긴 안배 중 하나다. ‘흔적’에 남아 있는 정보로 숲의 종족 엘프를 부활시키고 그들을 보호하는 한 명의 영웅을 탄생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안배. 나는 바로 그 안배를 위해 아주 긴 세월을 기다려 왔다.]
‘엘프?!’
이건 좀 이상했다.
정확히는 알지 못하지만 내 기억 속의 엘프를 부활시키는 종족 퀘스트는 다른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대미궁의 99층에서 엘프를 부활시키는 종족 퀘스트라니…… 뭔가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종족 퀘스트들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법칙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다른 종족 퀘스트를 위해서라도 궁금한 것을 해결하고 갈 필요가 있었다.
[뭐지?]
“당신은 이곳에만 존재하는 건가요?”
[아니다. 난 이곳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이곳의 나는 단지 나의 수많은 조각 중 하나일 뿐. 조각은 레아 대륙 곳곳에 퍼져 있다. 사실 본체는 오래전에 사라졌다. 우리들 일곱 신령은 본체를 잃는 대가로 몇 가지 권능을 얻었다. 그리고 바로 그 권능을 이용해 우라노스 님의 안배를 완성시켰다.]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종족 퀘스트는 한군데 정해진 곳에서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군요.”
[전이는 끝나지 않았다. 그 저주받은 신의 권능은…… 모든 세상이 ‘하나(One)’가 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막아야 한다. 그것을 막기 위해 수많은 안배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 안배란 것은 얼마나 존재하는 건가요?”
이건 단순히 NPC와 대화를 하고 보상을 받는 단계가 아니었다. 다음 퀘스트를 위한…… 또 다른 대박을 위한 정보수집의 단계였다.
당연히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을 필요가 있었다.
[안배는 수없이 많이 존재한다. 물론 모든 안배가 다 같은 수준이지는 않지만 각각의 안배들은 나름의 목적과 권리를 지니고 있다.]
“안배를 찾을 수 있는 건 오로지 불멸의 인을 지닌 우리들뿐입니까?”
[그렇다. 모든 안배는 크로노스 대륙의 생존자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결국 안배는 게임 속에 존재하는 유저들이 얻을 수 있는 모든 존재를 의미했고 결국 그것은 퀘스트…… 아이템…… 스킬…… 이런 것들이었다.
“그렇다면 혹 당신은 이곳에서의 안배 말고도 다른 안배를 책임지고 있습니까?”
이건 그냥 찔러보기다.
뭐 질문하는데 돈이 드는 건 아니지 않은가?
[없다. 나에게 주어진 안배는 오로지 이것 하나. 하지만 혹시…… 또 다른 조각에 또 다른 안배가 전해졌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확실히 결정되지 않았다. 난 세계수 이그니아의 단편을 담은 하나의 조각일 뿐. 아쉽지만 내가 알고 있는 정보는 한정되어 있다.]
‘쳇! 더 이상 알아낼 정보는 없겠군.’
아쉽지만 내가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여기까지였다. 아마도 다른 정보들에는 일종의 잠금장치가 걸려 있을 것이다.
“저에게 주어진 안배는 무엇입니까?”
더 이상 얻을 정보가 없다면 이제 슬슬 받을 것을 받을 차례였다.
[불멸의 인을 지닌 방랑자여…… 내가 너에게 줄 건 몇 가지의 권능과 몇 가지의 사명이다.]
이번 역시 성화의 잠을 깨워 드워프 일족을 등장시켰을 때와 유사한 보상을 받을 것 같았다.
띠링, 숨져진 메인(종족) 퀘스트 ‘대미궁의 비밀’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띠링, 레벨이 5 올랐습니다.
띠링, 영웅의 길 퀘스트가 새롭게 갱신되었습니다.
띠링, 놀랍습니다! 당신은 여러 가지 방법 중 가장 어려운 방법으로 메인(종족) 퀘스트를 해결했습니다. 이런 당신의 능력은 과히 대륙 최고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그런 당신에게 감히 최고의 모험가라는 호칭을 붙여주고 싶습니다.
띠링. ‘최고의 모험가(S급)’ 타이틀을 얻었습니다.
띠링, 특별한 조건들이 충족되며 ‘세계수 이그니아’의 취급정보 등급이 상승했습니다. 1단계 정보잠금장치가 해제됩니다.
사실상 손을 놓고 있던 영웅의 길 퀘스트가 업데이트되며 나와 대화하던 이그니아에게도 변화가 생겨 버렸다.
[……놀랍구나. 너는 평범한 모험가가 아니었어! 그걸 내가 알아보지 못했구나. 비록 불의 일족을 구했다는 게 조금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어쨌든 너는 가장 뛰어난 크로노스의 영웅임이 틀림없다.]
이그니아는 ‘불의 일족’이란 부분에서 살짝 기분이 좋지 않은 것처럼 얘기했지만 그 뒤로는 대단하다는 듯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난 방금 이그니아의 정보잠금장치가 해제되었다는 메시지를 보았다. 그렇기에 난 뭔가 쓸 만한 정보를 얻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하려 했지만 이그니아는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것을 되돌려놓기에는 아직 너의 힘이 너무 미약하다. 너는 더욱 강해져야 한다. 더 많은 안배를 얻어 우라노스 님의 의지를 이어야 한다. 그것이 네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사명이다. 잊으면 안 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이’는 계속되고 있다. 계속 뻗어 나가는 저주스러운 창조신의 권능. 심지어 이젠 가이아마저도 그 ‘전이’를 막으려 한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이미 ‘전이’는 너무 많은 힘을 얻었다. 단순한 창조신의 권능이 아닌 세상을 집어삼키는 혼돈의 힘이 되었다. 그렇기에 힘이 필요하다. 강한 힘! 그 힘들이 합쳐져야 ‘전이’를 막을 수 있다.]
말이 끝나갈수록 이그니아의 몸이 점점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크로노스의 영웅이여! 전진하라! 너의 그 의지를 끝까지 관철시켜라! 무수한 난관이 너를 가로막겠지만 절대 너의 걸음을 멈추지 마라. 나, 엘프의 신 이그니아의 이름으로 그대에게 우라노스의 작은 권능을 전하노니, 이제부터 그대는 멈추지 않는 바람의 영웅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