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8. 군림의 길 ― 1
* * *
“안녕하세요. ‘The One’의 진행자 이슬입니다.”
게임전문 방송으로 이름이 높은 GTV의 인기 코너 중 하나인 ‘The One’은 게임의 인기와 함께 나날이 인기를 더해가는 중이었다.
“오늘은 많은 분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진정한 ‘The One’의 랭킹을 공개하기로 한 날인데요. 사실 오늘을 위해 저희 제작진이 거의 몇 달 동안 고생을 하셨습니다. 없는 정보 있는 정보를 다 찾으며 최대한 정확한 정보를 재공하기 위해 노력한 우리 제작진 여러분의 노고에 잠깐 박수를 보내며…… 그럼 기다리시던 랭킹 정보를 공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슬은 깜찍한 외모와 함께 여자라고는 믿기지 않는 게임실력, 그리고 귀여운 말투로 수많은 게임 팬들에게 사랑을 받고있는 진행자였다.
그녀 역시 ‘The One’의 골수유저로 유명했는데 많은 게임 팬들은 그녀를 이슬공주라고 불러주었다.
게임 아이디 역시 아침이슬이었기에 이슬공주는 무척 어울리는 별칭이었다.
“일단 대부분의 유저 분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DH 소프트에서 매주 공개하는 랭킹은 워낙 자신을 숨기는 유저들이 많아 진실의 50%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저희들이 이번 코너를 준비하게 되었고요~ 몇 달간의 노력 끝에 완벽하지는 않지만 대략 80% 정도의 정확도를 보장하는 랭킹 정보를 완성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슬은 밝게 웃으며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
“물론 이번 코너에서는 랭킹 10위부터 1위까지만 공개하겠지만 저희 방송사의 공식 하이퍼넷을 찾아주시면 1위부터 1000위까지의 랭킹정보를 확인할 수 있으실 겁니다.”
최근 들어 그 위상이 급상승한 GTV는 게임방송업계 1위 자리를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이 코너도 그 노력의 결과 중 하나였다.
말이 진정한 랭킹 조사지, 이것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하지만 GTV 측은 많은 돈과 인력을 쏟아부어 최대한 진실에 가까운 랭킹 정보를 작성했고 그것으로 또 하나의 대박 코너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랭킹 정보를 공개해 볼까요? 일단 1~10위까지의 리스트를 간단히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오늘 제가 직접 발표하는 열 명의 랭커는 정말 대단한 분들입니다. 전 세계의 1억 명이 넘는 유저들이 즐기는 ‘The One’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든다는 건 엄청난 것이죠.”
이슬은 자신의 화면 가까이에 자신의 양 손바닥을 활짝 펴며 고개를 끄덕였다.
“참, 많은 분들이 오해하실까 봐 미리 밝히는데 이번 랭킹 공개에 앞서 저희는 철저히 리스트에 들어간 유저 분들의 동의를 얻었습니다. 물론 동의를 얻지 못해 가명으로 표기한 분들도 있지만 그래도 설득하고 설득한 끝에 대부분의 분들의 동의를 얻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물론 동의를 했다고 해서 진짜 아이디까지 모두 공개를 동의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원래 공개를 꺼리던 유저들은 대부분 가명을 통한 공개만을 허락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DH 소프트의 공식 랭킹보다는 훨씬 정확도가 있었다.
아예 비공개로 모든 것이 철저히 공개되지 않는 공식 랭킹보단 가명이라지만 레벨과 직업을 알 수 있는 이번 GTV 랭 킹이 훨씬 신뢰도가 높았다.
“그럼 일단 가볍게 리스트부터 보실까요?”
10위: 프로이드(대륙: 서대륙/직업: 방어계열 특화 전사/소속: 헬 레이드 팀 팀장/레벨: 412/최근 원인을 알 수 없는 급격한 레벨 다운이 있었음)
9위: 가웨인(대륙: 서대륙/직업: 마법사/소속: 알 수 없음/레벨: 417/서대륙을 떠도는 대마법사)
8위: 알 수 없음
7위: 신비인(가명)(대륙: 동대륙/직업: 술법사/소속: 비공개/레벨: 421/동대륙의 강자)
6위: 라트마(대륙: 서대륙/직업: 방어계열 특화 전사/소속: 엠페러 길드/레벨: 423/두 대륙을 합쳐 가장 규모가 큰 길드의 마스터)
5위: 알 수 없음
4위: 신비인(가명)(대륙: 미공개/직업: 미공개/소속: 미공개/레벨: 426/신비에 싸인 인물.)
3위: 천룡성검(대륙: 동대륙/직업: 검사/소속: 천룡맹/레벨: 427/천룡맹의 맹주)
2위: 신비인(가명)(대륙: 동대륙/직업: 미공개/소속: 미공개/레벨: 430/오로지 레벨 공개만 허락한 신비의 유저)
1위: 알 수 없음
조용히 방송을 지켜보던 나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생각한 것보다 많이 앞서 나가고 있군.’
정보의 질에서 약간은 아쉬운 랭킹 발표였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최상위권 유저들이 3차 전직을 완벽하게 끝내고 하이마스터의 경지인 500레벨을 향해 달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3차 전직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그런 쉬운 것이 아니었다. 2차 전직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난이도. 그렇기에 수많은 유저가 399의 레벨에서 발이 묶여 있었다. 들리는 소문엔 399에 묶인 유저만 대략 10만 명이 넘는다고 했다.
내가 볼 땐 무조건 10만 명을 넘을 것이다. 나 역시 과거(미래)에 3차 전직 때문에 엄청 고생하지 않았던가! 그만큼 3차 전직은 어려웠다.
현재 3차 전직을 끝낸 유저들의 숫자는 대략 2천 명 정도로 예상되고 있었다. 하지만 전직을 했다고 해서 마냥 좋은 건 아니었다. 400~500 구간.
일명 ‘마스터 구간’이라 불리는 이 레벨 구간은 다른 말로 불리기도 했다.
‘절망의 구간.’
1~1,000까지 레벨을 올리는 데 700레벨을 넘겼을 때 등장하는 ‘지옥의 구간’ 제외하곤 이 구간이 가장 레벨이 오르지 않았다.
전직 구간 중 가장 적은 레벨을 차지하고 있어서 그런 걸까? 사실상 400~500레벨 구간은 500~700레벨 구간보다 더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하지만 최상위권의 유저들은 벌써 그 어려운 3차 전직을 끝내고 400레벨 초중반까지 레벨을 올려놓았다.
많이 따라왔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멀었다.
현재 내 레벨은 371…… 더욱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 * *
준비는 끝났다.
이번 전투는 지금까지와는 또 다르게 마계에서 얻은 능력들을 주로 사용해 볼 생각이었다.
마계는 나에게 또 다른 성장을 선물해 주었다(물론 그 대가로 지옥 같은 하루하루를 치렀지만……). 난 그렇게 또 한 번 성장했다.
단순히 레벨이 올라서 성장한 것이 아니었다.
레벨도 많이 오른 건 사실이었지만(현재 내 레벨은 372이었다) 더 중요한 건 전투에 유용한 새로운 여러 능력을 얻은 것이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
마수소환 비(飛)!!(마수[魔獸] 레비론: 약 1m 정도의 타원형의 납작한 몸을 지닌 마수로 지상에서 약 20㎝ 정도 몸을 띄운 상태로 빠르게 움직이는 하급마수)
내가 비라고 이름 붙인 이 마수 레비론 같은 경우는 마치 에어 스케이트보드를 타듯 사용하면 짧은 거리를 빠르게 이동할 때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마수였다.
촤악!
나를 태운 비(레비론)가 가볍게 미끄러지며 앞으로 나아갔다.
마수의 종류는 정말 다양했다.
그리고 난 그 다양한 마수들을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터득했다.
그리고 그 결과 난 강해졌다.
하지만 내가 지금 상대하려는 존재는 지금까지의 어떤 적보다 강력한 존재였다. 거기다가 예전 데빌사우루스를 잡을 때처럼 미리 준비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놈과 언제 어디서 격돌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놈도 나를 알고 있었고, 나도 놈을 알고 있었다.
이 마령의 숲은 놈의 것이었고 이제 내가 그 자리를 빼앗으려는 중이었다.
마계의 4대 지역 중 하나인 마령의 숲.
그리고 마령의 숲을 지배하는 놈.
놈을 잡음으로써 난 내 염원과 의지를 관철할 것이다.
* * *
내가 언제부터 존재했던 것인가?
이것에 대한 답은 나도 모른다.
나에 관련된 일이지만 나도 모른다. 하지만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아주 오래전부터 내가 존재해 왔다는 것이었다.
오랜 세월 난 이곳의 주인이었다.
그 어떤 존재도 나에게 도전하지 못했다. 물론 이 지역을 벗어난다면 나와 비슷한 존재들을 찾을 수 있었겠지만 난 이 지역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영혼에 새겨진 절대 명제 같은 것이었다.
마령의 숲.
난 무조건 이곳에 존재해야 했다.
어쨌든 덕분에 난 아주 지겨운 하루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의미도 없고 아무런 재미도 없는 하루하루.
그렇게 난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의 세월을 이곳에서 보냈다.
그런데 근래 아주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다.
이 숲에 아주 요상한 놈이 나타났다. 불현듯, 갑자기…… 너무나 갑자기 나타난 존재.
처음엔 너무나 미약해 보여 금방 사라질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잠깐 관심을 가졌지만 이내 관심을 거두었다.
그런데…… 그놈은 나의 예상을 보기 좋게 깨버렸다. 아니, 깬 것으로 모자라 엄청난 속도로 성장했다.
그리고 아주 빠르게 마령의 숲에서 나를 제외한 모든 존재를 굴복시켰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놈은 노골적으로 나에게 도전하겠다는 의사를 표출했다.
처음엔 그저 재미로 지켜봤는데…… 이제 놈은 나에게 생전 처음 경험하는 이상한 느낌을 선물했다.
내 머릿속에 들어있는 지식을 총동원해 그 느낌이 무엇인지 찾아본 결과 그것은 하나의 감정이었다.
‘긴장감.’
나쁘지 않았다.
이런 새로운 느낌…… 아주 좋았다.
그래서 난 놈의 도전을 흔쾌히 받아주었다.
놈을 굴복시킬 것이다. 그리고 내 자리를 확인할 것이다.
난 마령의 숲에 하나뿐인 주인이다.
결국 놈은 나를 주인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놈은 지금까지 나에게 굴복된 다른 놈들처럼 이 숲에 종속될 것이다.
* * *
‘칠흑의 마수.’
그것은 바로 지금 내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커다란 그림자의 이름이었다.
대략 5~6m의 크기에 마치 호랑이와 유사한 모습을 지닌 검은색 마수. 정확히 검은색이라 부를 수는 없었다. 몸이 마치 그림자처럼 반투명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반투명한 검은색의 몸, 그리고 강렬히 타오라는 화염을 심어놓은 것 같은 두 눈.
이 몬스터가 바로 레벨 800대의 보스 몬스터인 ‘칠흑의 마수’였다.
물론 내가 알고 있는 정보는 2년(실제 시간) 후의 정보이다. 그나마 내가 이곳 마계에서 어렵게라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지금 현재의 마계는 내가 알고 있는 2년 후의 마계와는 정확히 그 시간만큼 수준도 차이가 나고 있기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유저들이 레벨을 올리듯 몬스터들도 레벨을 올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즉, 2년 후 공개될 마계는 그 시간 동안 더 성장한 마계라는 뜻이었다.
결국 그 말은 ‘칠흑의 마수’ 역시 다른 몬스터들처럼 레벨 800대의 무지막지한 보스 몬스터는 아닐 것이라는 소리였다.
내가 예상하는 놈의 레벨은 대략 450~500 수준이었다.
물론 그 정도만 되어도 나에겐 엄청 힘겨운 존재였다. 나보다 레벨도 높고 거기에 보스 몬스터였다.
당연히 혼자 잡으라고 만들어진 몬스터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힘든 전투가 날 기다리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내 염원은 군림의 길이었고 그 염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놈을 잡아야 했다.
[크르르르.]
칠흑의 마수 입에서 아주 저음이지만 듣는 사람의 심장을 옥죄는 것 같은 작은 울음이 흘러나왔다.
‘초반부터 강렬하군.’
이것은 그냥 울음이 아니었다. 일종의 능력이었다. 칠흑의 마수가 사용하는 ‘죽음의 포효’. 레벨이 낮거나 심력(心力)이 부족한 이들이 들으면 기절까지도 할 수 있다는 그 능력이었다.
“워~ 진정하라고.”
난 슬쩍 웃으며 빠르게 비를 역소환시켰다. 비의 기동성으로는 절대 놈의 움직임을 피할 수 없었다. 이럴 땐 내 두 다리를 믿는 게 제일 좋았다.
[……이름이 뭐지?]
갑작스러운 질문. 난 솔직히 ‘칠흑의 마수’가 나에게 말을 걸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었다. 갑작스러운 질문…… 확실히 마계의 4대 보스 몬스터답게 상당히 뛰어난 인공지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신.”
난 아주 짧게 대답을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