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로드(The Lord)-77화 (77/250)

077. 마계 ― 2

* * *

누가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이라고 했던가?

20일(게임 시간)이라는 시간은 날 완벽하게 마계인(魔界人)으로 만들었다.

이젠 거의 본능적으로 마령의 숲을 돌아다니며 사냥을 했다.

마수의 습성을 읽고 그것을 이용해 빈틈을 파고들어 보다 손쉽게 사냥을 성공시켰다.

어차피 당장 이곳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면 이렇게 적응하는 게 제일 좋았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하지 않았던가!

난 철저히 마계의 사냥꾼이 되기로 마음먹었고 정말로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보내온 20일의 시간.

재미있는 건 최근 들어 마계의 마수들 반응이 좀 달라졌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무작정 나를 향해 공격하던 마수들이 이젠 나란 존재를 인식하고 아주 조심스럽게 나를 공격했다.

조금 약한 마수들은 아예 나를 피해 도망가기도 했다.

이런 마수들의 반응을 보며 난 점점 20일 전 내 앞에 나타났던 문구가 무엇을 뜻하는 건지 어렴풋이라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곳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단순한 법칙이 적용되는 곳.

아마도 난 이 단순한 법칙의 정점에서야 대미궁 99층에서 받은 퀘스트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철저한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세계…… 그래 [더 로드]의 시작은 결국 강함이었어.’

게임이 나에게 깨달음을 주었다.

이미 난 ‘ONE’을 단순한 게임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인간처럼 생각하고 인간처럼 행동한다. 어떨 땐 인간을 넘어서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내가 그것을 즐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30일(게임 시간) 정도가 지났을까?

현재 난 마령의 숲을 호령하는 강자가 되어 있었다.

물론 마령의 숲을 지배하는 지배자가 된 건 아니었다.

마령의 숲에는 내가 몰랐던 한 존재가 있었다.

내가 그 존재를 알게 된 건 대략 5일(게임 시간) 전이었다.

난 5일 전에 내가 정말 마령의 숲을 지배하는 지배자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마령의 숲에는 애초에 지배자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지배자는 이미 나를 인식하고 있었다.

더 놀라운 건 그 지배자가 쑥쑥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던 나를 가만히 놔두었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자신의 상대가 되기까지 기다려 주는 듯한 여유로움…… 분명 난 그런 느낌이 받았다.

어쩌면 무료한 삶의 자극을 원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게 어찌 되었든 난 기회를 얻었다.

놈과의 결전…… 그 결전의 승패에 따라 이 숲의 절대자가 결정될 것이다.

이길 자신이 있냐고?

당연히…… 있다.

실패할 것이라는 불안감 따윈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고 해도 성공만을 생각하고 성공만을 위해 노력한다.

그것이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 나는 미리 차근차근 준비해놓았다.

놈의 정체를 정확하게 알지는 못했지만 대략 예상은 하고 있었다.

사실 내 기억 속의 마령의 숲은 네임드 몬스터가 존재하지 않은 사냥터였다.

하지만 난 이제 내 기억 속의 미래를 확실히 믿지 않고 있다. 이미 미래는 조금씩 바뀌고 있었고 난 그것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다.

각설하고 준비는 차근차근 잘 되어가고 있었다. 다른 건 몰라서 마계에 와서 정말 좋은 점 중 하나는 소환계열 스킬을 대폭 올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라르엘 덕분에 계획보다 일찍 소환계열 스킬에 신경을 쓰게 된 상태였다.

하지만 소환계열 스킬은 마음먹었다고 해서 그리 쉽게 올릴 수 있는 스킬이 아니었다.

소환이란 결국 소환할 대상이 있어야 했다.

테이밍 스킬, 마수 소환 스킬, 환수소환 스킬 등등 모든 소환계열 스킬이 대상이 필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 마계는 소환사들에겐 천국과도 같은 곳이었다.

물론 워낙 위험한 대상들이 많아 어설픈 실력의 소환사에겐 절대 천국이 될 수 없었지만 실력만 받쳐 준다면 분명 천국이 될 수 있었다.

요즘의 난 그동안의 플레이스타일과는 전혀 다르게 플레이를 하고 있었다.

아마 누군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다수의 소환계열 스킬을 가진 골수 소환사 유저인 줄 알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일단 테이밍스킬계열 스킬 중 하나인 마수조련 스킬로 마계의 수많은 동물을 길들이고 길들이기 불가능한 마수들은 다시 마수소환스킬을 이용해 강제로 계약을 맺고…… 정말 수많은 마수를 길들이거나 주종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그 마수들을 전투에 이용하는 방식도 연구하고 연습했다.

스킬을 올리기 전엔 몰랐는데 막상 올리고 사용하다 보니 소환계열 스킬이 왜 제대로만 익히면 사기 스킬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특히나 직업 특성상 모든 능력치가 골고루 높은 나에게 소환스킬은 궁합이 딱 맞았다.

길들인 소환수의 능력은 소환수를 부리는 사람이 나누어주는 경험치로 올라간 소환수의 레벨과 그 사람이 가진 여러 능력치에 의해 결정된다.

워낙 복잡한 공식이라 그것을 설명하긴 힘들지만 대충 내가 지능이 높으면 소환수 역시 지능이 높고 힘이 높으면 힘이 높다는 얘기였다.

거기에 마력과 지혜는 소환수의 소환 시간을 결정지었고 매력은 충성도에 관련이 있었다.

즉, 모든 능력치가 다 상위권이었던 나는 많은 이득을 볼 수 있다는 뜻이었다.

어찌 되었든 난 정말 다양한 마수들을 나에게 종속시켰다. 어떤 마수는 전투력은 거의 없지만 특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마수는 특이한 능력은 없지만 기본적으로 강력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다양한 마수들…… 그리고 그 마수들을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건 내 능력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마수들만이 내 준비의 끝이 아니었다. 마수들은 여러 가지의 준비 중 하나일 뿐이었다.

데빌사우루스를 잡았을 때보다 더 치밀하고 더 열심히 준비하고 있었기에…… 난 성공을 확신하고 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 * *

“저…….”

영순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직속 상관이자 세상에서 제일 어렵게 생각하고 있는 박상진 팀장에게 말을 걸었다.

“제가 말했죠. 말끝 흐리지 말고 또박또박 말하라고.”

다소 날카로운 목소리.

괜히 게임관리팀의 악마라고 불리는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해 주는 목소리였다.

“그…… 다름이 아니고…… 약간의 이상 징후가 발견돼서…… 요.”

영순은 진땀을 흘리며 간신히 말을 이어갔다.

“이상 징후요? 무슨 이상 징후가 발견된 거죠?”

박상진 팀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음…… 사실은 제가 할 일이 없어서 저희가 확보한 몇 가지 권리로 게임 데이터를 분석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정말 이상한 데이터가 발견되…….”

“게임 데이터를 분석했다고요? 그건 우리가 할 일이 아니라 다른 팀이 할 일일 텐데요?”

“이, 그건 아는데…… 아시다시피 지금 저희 팀이 하는 일이 거의 없잖아요. 그래서 살펴본 것이었는데 이 데이터는 거의 살펴볼 필요도 없이 폐기되는 데이터 같은데 여기서 이상한 징후…….”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할 일이 없어서 다른 팀의 일을 했다고요? 아니, 고영순 씨는 지금 자신이 어떤 업무를 보고 있는지 잊으신 겁니까? 그리고 고영순 씨가 발견했다는 그것을 설마 다른 팀에서 발견 못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마구 쏟아지는 박상진 팀장의 독설. 가뜩이나 소심한 영순에겐 악마의 외침은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영순은 곧장 사과했다.

이럴 땐 그저 저 자세로 나가는 것이 최고였다.

“죄송한지 안다면 제발 본인의 업무나 똑바로 하세요. 제가 얼마 전에 작성해 달라고 부탁했던 ‘ONE’을 플레이하고 있는 상위 프로게이머들의 동향에 대한 보고서는 아직 멀었나요?”

“그건 거의 다 끝나갑니다.”

“휴~ 고영순 씨, 자기 할 일이나 다 끝내고 다른 일을 하세요.”

“…….”

말 한 번 잘못 꺼냈다고 크게 면박당한 고영순.

그는 결국 고개를 푹 숙인 상태로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그의 자리에 펼쳐져 있는 여러 가지 화면들과 자료들…… 영순은 그것들을 잠깐 살펴보다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휴~ 하긴 내가 왜 이걸 보고 있냐…… 내 할 일이나 하자.”

대학교 때 부전공으로 인공지능 프로그래밍을 배웠던 영순은 그쪽 방면으로 생각보다 꽤 실력이 좋았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그쪽 공부를 포기했었고 지금은 그쪽과는 별로 상관없는 부서에서 일하는 중이었다.

그런 그가 발견한 것.

그는 나름대로 중요한 발견이라고 생각했었지만 단 한 번의 면박으로 그 생각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팟!

꺼지는 화면들…… 그리고 정리되는 책상.

그렇게 영순의 우연한…… 발견은 사라졌다.

신의 생각대로 미래는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바뀌지 않았다.

신의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지만 이것도 엄연한 미래에 일어난 사건 중 하나.

결국 이 사건은 바뀌지 않았고…… 그 결과 미래는 좀 더 계속 신이 알고 있는 방향으로 비슷하게 흘러갈 가능성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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