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1. 대미궁 ― 2
* * *
“다 모였나요?”
가상의 공간.
그리고 가상의 인물들.
이곳은 아주 간단하고 작은 사무실과 같은 모습의 가상 공간이었다.
최근 들어 많은 이들이 사용하고 있는 가상현실 회의 서비스.
비록 약간의 돈이 들어가는 유료 서비스였지만 그 편리함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일종의 비즈니스 서비스였다.
“휴∼ 게임 속이 아닌 다른 곳의 가상 공간에서 만나는 건 처음인가?”
금발에 파란색 눈동자, 그리고 큰 덩치. 왠지 북미 쪽 유저로 보이는 한 명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 가상 공간을 만든 회사는 역시나 가상현실 시스템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DH 그룹이었다.
이제 DH 그룹은 단순히 세계 최대의 게임인 ‘The One’만을 만든 곳이 아니었다.
여러 방면을 아주 빠르게 확장하며 세계 최대 기업 중 하나로 성장한 DH 그룹.
이 가상현실 회의 서비스 역시 그들이 만들어낸 역작 중 하나였다.
특히 이 서비스에는 ‘ONE’에 사용된 다중 동시 번역 시스템이 적용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언어의 장벽 같은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세상이 참 좋아진 거지.”
중국인? 또는 일본인? 아시아 인물로 보이는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자자, 사담은 회의가 끝난 다음에 하도록 하고, 일단은 오늘 모이게 된 이유인 대미궁에 대해 예기하도록 하죠.”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리한 건 회의실 가운데 앉아 있던 한 남자였다.
동양인,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한국인으로 보이는 그 남자는 왠지 모르는 카리스마로 장내를 정리했다.
“흠흠, 아까 모두 각자 자기소개를 해서 모두 알고 있겠지만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전 레이드 팀 헬(Hell)의 팀장 프로이드입니다. 여기 모이신 분들은 아마도 각각 자신의 팀이 최고라 자부하시는 분들일 겁니다. 저 역시 저희 팀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이겠죠. 하지만 우리가 서로 최고라고 말해봤자 바꿀 수 없는 현실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대미궁의 지옥의 구역을 제대로 뚫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죠.”
프로이드의 말은 모든 이를 침묵하게 만들었다.
사실이었다.
이곳에 모인 20명가량의 사람은 모두 전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최상위권 레이드 팀을 이끄는 팀장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현재 대미궁 지옥의 구역에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각자 그 층수는 조금씩 달랐지만 대략 65∼70층 사이에서 제대로 진도를 뽑아내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었다.
벌써 대미궁이 열린 지 50일(게임 시간)가량이 흘렀건만 그들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단언하건대 대미궁은 사실상 현재의 유저들 수준으로는 완벽한 공략이 힘든 곳입니다.”
이곳에 모인 사람 중 몇 명 안되는 여성 중 한 명인 블랙로즈의 팀장 블랙로즈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에서 많은 유저들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곳에 모인 모든 사람이 동감하는 말.
사실 그들은 최상위권 유저들답게 누구보다 게임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다.
그렇기에 막연히 ‘우리는 할 수 있어!’라는 말을 하기보단 냉철한 분석을 토대로 확실한 말을 먼저 했다.
그녀의 분석은 절대 틀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예,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모인 다른 분들도 모두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현재 공략이 힘들다고 여기서 공략을 포기하실 겁니까? 제가 볼 때 그럴 분은 한 분도 안 계실 것 같네요.”
블랙로즈의 말도 사실이었고 프로이드의 말도 사실이었다.
적어도 이곳에 모인 유저들이라면 포기보단 도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레벨이 낮아서, 아이템이 아직 충분히 갖춰지지 않아서, 스킬이 아직 부족해서 등은 그들이 생각하기에 이건 모두 약자의 핑계였다.
안 되면 되게 하라!
끊임없는 연구와 도전.
그것이 지금의 이들을 만들었다. 괜히 세계 최정상급 레이드 팀의 팀장이 된 것이 아니었다.
모두 각각의 특징들이 있겠지만 이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게 하나 있었다.
바로 포기하지 않는 근성.
도전을 마다하지 않는 패기.
다른 언어, 다른 생김새, 다른 사상을 가졌지만 그것만은 닮아 있었다.
“예, 맞습니다. 저희들은 어떻게 보면 닮은꼴이죠. 그래서 제가 직접 나서서 여러분을 한자리에 모이게 만든 것입니다. 저도 인정하겠습니다. 대미궁은 확실히 블랙로즈 님 말처럼 현재 우리의 수준으로는 공략이 사실상 불가능한 곳입니다. 하지만!!”
프로이드는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우리가 서로 힘을 합친다면 아예 불가능한 것만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프로이드의 폭탄선언.
이건 최상위권 레이드 팀들 간에 연합을 만들자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흐음, 지금 프로이드 님의 말씀은 설마 모든 레이드 팀이 뭉쳐서 공략을 시도하자는 겁니까? 하지만 사실상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건 프로이드 님도 잘 알고 계실 텐데요. 현재 프로이드 님은 자신이 대미궁 어디쯤에 있는지 알고 계신가요? 그리고 설사 우연히 다른 레이드 팀 중 하나와 조우한다 해도 구속된 영혼의 저주와 한계 파티 수를 초과했을 때 얻는 페널티(레이드 팀이 열두 개의 파티 연합 이상의 숫자와 연합하게 되면 그때부터 한 명당 10%씩 모든 팀원의 능력치가 하락한다) 때문에 연합이 불가능하다는 건 보통 유저들도 모두 알고 있는 사실 아닙니까?”
홍문(紅門)이라는 레이드 팀을 이끌고 있던 중국 유저 한 명이 프로이드의 말의 오류를 정확히 짚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게임 안에서의 연합은 불가능합니다.”
“게임 안에서의 연합은 불가능하다? 그럼 혹시 프로이드 님은 게임 밖에서의 연합을 만들자는 소리입니까?”
“네, 맞습니다. 꼭 게임 안에서 연합을 만들어야 공략에 도움이 되는 건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각각의 팀마다 수많은 노하우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중에는 공개하기 좀 힘든 것도 있을 수 있죠. 하지만 적어도 그것이 대미궁에 관련된 노하우라면 서로 공유하자는 겁니다. 그 공유의 선봉에는 저희 헬이 서겠습니다. 솔직히 노하우를 공개하는 것에 대해 꺼림칙한 기분이 드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확실히 누가 더 많이 공개하고 누가 더 적게 공개하는지 그걸 정확히 판단하기는 힘듭니다. 하지만 적어도 전 헬이 가진 대미궁에 모든 노하우를 공개할 겁니다. 저희 헬의 적은 대미궁이라는 몹쓸 던전입니다. 절대 다른 레이드 팀이 아니죠. 그렇기에 저는 미련 없이 이 노하우를 여러분과 공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폭탄선언이었다.
말이 노하우지 사실상 헬의 대미궁 공략 방법을 모두 공개하겠다는 뜻이었다.
“…….”
“…….”
다소 충격적인 프로이드의 선언에 모두가 한동안 말하지 못했다.
“하하하하! 역시 소문대로 화끈하시군요. 좋습니다. 그깟 노하우쯤이야 저희도 모두 공개하죠.”
크게 웃으며 가장 먼저 프로이드의 말에 찬성의 뜻을 내비친 건 의외로 같은 한국의 레이드 팀이면서 헬과 늘 라이벌처럼 경쟁하던 팀 에볼루션의 마스터 다크오크였다.
가장 반대할 것 같은 다크오크가 찬성하고 나서자 그때부턴 일사천리였다.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프로이드의 게임 밖 연합 제안에 찬성했는지는 그들 스스로만 알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이건 분명 변화였다.
신이 알고 있는 미래에는 없었던, 그렇게 신이 전혀 모르는 곳에서 미래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 * *
“헉헉! 몇 명이나 살아남았지?”
듀블랙은 무척 지친 표정으로 라이지를 향해 물었다.
“방금 간발의 차이로 두 명을 살리지 못해서…… 총 52명 생존이요.”
“후우∼ 또 네 명이나 줄어든 거야?”
듀블랙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일단 좀 쉬면서 재정비를 하자.”
왠지 모르게 힘이 빠져 보이는 듀블랙의 말. 대미궁에 들어온 지 50일(게임 시간) 정도가 지난 현재 TOP 길드의 레이드 팀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현재 층수 48층. 조금만 더 내려가면 망각의 던전 구간이 끝나겠지만 중요한 건 51층부터는 지옥의 구역이라 불리며 망각의 던전 구간보다 훨씬 난이도가 상승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 사실은 이미 하이퍼 넷에 널리 퍼진 정보였기에 듀블랙을 포함한 모든 팀원이 알고 있는 것이었다.
덕분에 레이드 팀의 사기는 바닥을 치고 있었다.
‘흠…… 슬슬 떠날 때가 된 건가?’
어차피 TOP 길드에 묻어가는 건 망각의 던전 구간까지만이라고 생각했었다.
정확히 TOP 길드가 어디까지 뚫고 언제까지 생존할지는 몰랐다.
그냥 느낌상 이제 슬슬 TOP 길드와의 이별을 준비할 때가 된 것 같을 뿐이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이들과 함께하는 건 망각의 던전 구역까지만이라고 생각했다.
지옥의 구역부터는 따로 생각한 복안이 있었다.
‘하지만 떠날 땐 떠나더라도 마무리는 확실히 해야겠지.’
그래도 나름 여기까지 오면서 이런저런 정이 든 TOP 길드였기에 마지막으로 작은 선물이라도 주고 싶은 게 내 마음이었다.
물론 미래에 변화를 주지 않을 정도의 범위 안에서 주는 선물이었다.
“이런 통로가 있을 줄이야…….”
듀블랙는 약간은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이퍼 넷에서 대충 소문은 들었지만 직접 보게 될 줄은 몰랐네. 근데, 후우∼ 이 통로를 발견한 건 정말 좋은 소식이지만 뛰어난 탐험가 한 명을 잃은 건 아주 나쁜 소식이네.”
라이지 역시 듀블랙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레벨은 낮았지만 정말 골수 탐험가 유저로 센스가 아주 좋아서 큰 도움이 됐는데 아쉽네.”
“뭐, 어쩔 수 없잖아? 우리의 모험이 대미궁에서 끝나는 것도 아니니 앞으로 더욱 발전할 가능성이 큰 뛰어난 탐험가 유저가 우리 길드에 있다는 걸로 만족해야지.”
듀블랙은 애써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억지로 웃으며 얘기했다.
“자, 일단 이동하자.”
한 개의 통로.
그것은 그들이 이미르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던 유저가 자신을 희생하며 찾아낸 통로였다.
48층에서 곧장 51층으로 연결되는 비밀 통로.
한 번에 세 개 층을 건너뛰는 이 비밀 통로를 발견한 건 정말 대단한 성과였다.
물론 그 과정에서 팀원이 희생되었지만 그건 잊을 수밖에 없는 사고였다.
듀블랙과 이하 그의 레이드 팀원들은 어차피 다음 모험에서 또 함께할 이미르였기에 다음에 만나면 크게 칭찬해 주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바로 탐험가 이미르는 당분간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가상의 인물이었기에 그냥 조용히 사라졌다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비밀 통로를 발견하며 갑자기 발동된 함정에 희생된 이미르. 하지만 진실은 현실과 달랐고, 이들이 그 진실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었다.
그저 아까운 팀원 한 명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게 전부였다.
분명한 건 그들의 생각처럼 이미르는 이 대미궁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그 대신 전혀 새로운 인물이 나타났다.
신.
대미궁 99층에 볼일이 있는 그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