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 악연도 인연이다 ― 1
* * *
“악! 그만! 알았어요! 제가 졌어요!”
아주 결정적인 순간 그녀는 무기를 버리고 항복을 선택했다. 처음 전투가 시작될 때만 해도 끝까지 싸울 것 같은 모습이었건만 의외로 깔끔하게 포기할 줄도 아는 성격이었다.
사실 그녀의 전투력은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이었다.
난 대략 10분 안에 그녀를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내가 그녀를 제압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30분이었다.
난 30분 동안 그녀를 향해 쉴 틈 없이 공격을 몰아붙였다.
물론 간간이 그녀의 반격이 있었지만 이미 주도권을 나에게 빼앗긴 상태였기에 반격은 그다지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생각보다 포기가 빠르군?”
“쳇, 이건 포기가 아니라 인정하는 것뿐이라고요. 솔직히…… 아저씨는 최선을 다한 것도 아니었잖아요.”
마가레타의 눈썰미가 좋은 것인가?
그녀는 내가 능력을 숨겼다는 걸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그런데 그건 그거고, 묘하게 마가레타의 ‘아저씨’라는 말이 신경에 거슬렸다.
“흠…… 나 아저씨 아닌데.”
난 조용히 중얼거리며 투덜거렸다. 아저씨라고 불릴 만한 나이는 맞지만 막상 아저씨라 불리자 왠지 씁쓸한 이 기분.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그런 기분이었다.
“에이∼ 몰라요. 레타야, 이 아저씨한테 훔친 돈 돌려드려라.”
클레타는 도망을 가지 않았다.
마치 누나를 두고는 절대 도망가지 않는다는 의지를 보여주듯 그는 전투 내내 뒤로 물러나서 움직이지 않았다.
“……아, 아까운 내 돈.”
자기가 훔쳤으니 자신의 돈이라는 뜻인가? 클레타는 마치 원래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던 돈을 잃은 것처럼 가슴 아픈 표정을 지었다.
클레타는 품 안에서 정확하게 500골드를 꺼내 나에게 건네주었다.
하지만 정작 나에게 더 중요한 열쇠는 돌려주지 않았다.
“흐음, 이게 끝이 아닐 텐데?”
흠칫.
클레타의 얼굴에 아주 잠깐 뭔가 안 좋은 표정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레타, 골드 말고 또 훔친 게 있어?”
마가레타도 그걸 눈치챘는지 재빨리 클레타를 다그쳤다.
“그, 그게…….”
클레타는 크게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설마 그걸 안 가지고 있는 건 아니겠지?”
이쯤 되자 나도 당황스러워졌다. 500골드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 개인 창고에는 거의 백만 골드 어치의 흑석이 쌓여 있었다. 열쇠가 없어도 열 수 있는 방법은 있었지만 여러 가지 절차가 필요했기에 시간도 아주 오래 걸렸고, 그렇게 창고를 열 경우 창고 대여료의 열 배를 물어줘야 했다.
내가 사용하는 대형 창고의 임대료는 오백 골드였다. 그 임대료의 열 배이면 그것만도 오천 골드였다.
거기에 시간까지 낭비하게 되면 실질적인 손해는 더 커지게 되었다.
“클레타, 뭐야? 똑바로 말해봐.”
“휴우, 그게 사실은 골드랑 함께 웬 쓸모 없어 보이는 열쇠가 딸려 와서 그냥 길거리에 버렸어.”
“……!!”
버리다니?
그걸 어디에? 길거리에? 유저가 물건을 땅바닥에 버리면 보통 한 시간 안에 그 자동으로 그 물건은 사라지게 되어 있었다.
물론 등급이 높은 아이템 같은 것들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열쇠 같은 등급이 없는 아이템은 당연히 사라졌다.
즉 지금쯤 클레타가 버린 열쇠는 사라졌을 가능성이 99%란 얘기였다.
“……일이 복잡해졌군.”
이렇게 되면 일이 정말 복잡해진 것이었다.
일단 열쇠를 되찾을 가능성은 사라졌다. 그렇다면 결국 나는 위약금을 물고 창고를 강제로 개방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그 경우 내가 입어야 할 손해는 대충 계산해도 1만 골드 정도였다.
1만 골드에는 내가 감수해야 할 정신적인(?) 피해에 대한 보상도 포함된 것이었다.
“…….”
“…….”
그림자 남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일단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아직 모르는 눈치였다.
하긴 열쇠 하나를 버려서 1만 골드의 손해가 발생할 것이라 생각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일만 골드. 에누리 없이 딱 만 골드로 합의하자.”
“만 골드요? 그, 그게 무슨 소리예요?”
마가레타와 클레타는 두 눈을 크게 뜨며 나를 쳐다보았다.
“열쇠값. 흐음…… 정확하게 왜 일만 골드가 나왔는지 말해줄게.”
난 아주 정확하게 열쇠를 잃어버렸을 때 발생하는 모든 과정을 설명해 주었다.
물론 그 창고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말하지 않고 다른 것들은 모두 설명해 주었다.
“이렇게 해서 내가 정신적으로 피해를 입은 것까지 감안해서 정확하게 만 골드. 뭐, 이해 안 가는 거 있어?”
“…….”
“…….”
마가레타와 클레타는 한동안 말하지 못했다.
“그걸 어떻게 믿어요? 정말 아무런 쓸모없는 열쇠일 수도 있잖아요.”
마가레타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믿지 못하겠다면 그 창고를 임대하면서 받은 임대 계약서와 그 창고와 똑같은 창고의 열쇠를 보여주지. 아마 동생은 그 열쇠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할걸?”
‘One’에서 쓰이는 계약서는 절대 위조가 불가능했다. 일명 맹약의 서라고도 불리는 이 문서는 다양한 곳에서 쓰였는데, 어쨌든 이 문서에 적힌 내용들은 무조건 진실이라고 보면 되었다(맹약의 서에 적힌 내용을 위반할 경우, 그 사람의 레벨은 현재 레벨의 10분의 1로 떨어지게 되어 있었다).
당연히 난 창고를 임대할 때 이 맹약의 서를 이용해 계약서를 작성했고, 그것은 여전히 내가 가지고 있었다.
물론 다른 창고들의 열쇠도 역시 내가 가지고 있었다.
난 그것들을 모두 보여주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일만 골드를 이 그림자 남매에게 받을 생각이었다.
어차피 열쇠를 찾지 못한다면 이것이 최선이었다.
“…….”
“…….”
모든 증거를 확인한 그림자 남매는 약간의 패닉 상태에 빠진 것 같았다.
“도망가면 쫓아올 거죠?”
마가레타의 질문.
“당연히.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
이미 그녀는 나에게서 도망갈 수 없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혹시라도 클레타라면 모를까 그녀는 절대 불가능했다. 사실 클레타 조차도 내가 가진 능력을 전부 사용하면 절대 도망갈 수 없었다.
“그냥 배 째고 죽여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할 거예요?”
“잘 알 텐데……. 나에게 범죄를 저질러 범죄자가 된 이상 나에게 죽으면 가지고 있는 모든 아이템을 내가 가져갈 수 있다는 걸. 내가 볼 때 두 사람의 장비 수준이라면 일만 골드까지는 무리일지 몰라도 어느 정도 내 손해를 최소화할 수는 있겠지. 뭐, 재수가 있으면 더 이득을 볼 수도 있는 것이고.”
“…….”
“…….”
그림자 남매의 얼굴이 아주 크게 일그러졌다.
‘One’의 범죄자 시스템은 아주 단순했지만 무척 명쾌했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나를 PvP 지역이 아닌 곳에서 갑자기 공격해 범죄자가 되었다.
그런데 내가 기습을 막아내고 오히려 반격해 그 유저를 쓰러뜨렸다.
그러면 난 그 유저가 지닌 모든 아이템을 가질 권리를 가지게 된다.
지금 같은 경우도 마가레타와 클레타는 이미 나에게 범죄를 저질러 범죄자가 되었기 때문에 만약 내가 그들을 쓰러뜨린다면 그들의 현재 지닌 아이템은 모두 내 소유가 되었다.
그림자 남매는 최상급 유저들이었다.
당연히 그 장비는 보지 않아도 최상급일 것이다. 특히 그림자 남매의 대단한 수완으로 봤을 때 보통 장비는 아닐 것이다.
당연히 일만 골드 정도는 충분히 뽑을 수 있었다.
“……그럼 저희가 만 골드를 갚으면 되는 건가요?”
“아마도 그렇겠지?”
말이 만 골드지 보통 유저들은 죽어라 모아도 구경하지 못할 수도 있는 액수였다.
간단하게 예를 들자면 보통의 유저들, 그러니까 중간 그룹의 평범한 유저들이 평상시에 소유하고 있는 평균 금액이 50골드에서 100골드였다.
그림자 남매가 아무리 최상급 유저라지만 그들에게도 만 골드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다른 방법으로 골드를 갚을 수는 없나요?”
“뭐, 물건도 받아주지. 물론 그 물건의 값어치는 내가 책정해야겠지. 아, 원한다면 내 심부름을 하는 것도 적당한 금액을 책정해서 깎아주도록 할게.”
“…….”
“…….”
다시 침묵하는 남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그들이 일만 골드를 갚지 않을 방법은 없었다.
일단 열쇠가 없어진 그 순간부터 그들은 나에게 내가 입은 손해를 변상해야 했다.
졸지에 궁지로 몰린 그림자 남매.
하지만 아쉽게도 남매가 궁지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알았어요. 갚을게요.”
마가레타는 마지못한 표정으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정확하게 문서를 작성하자고.”
스윽.
나는 가지고 다니던 빈 맹약의 서 한 장을 꺼낸 후 그곳에 그림자 남매와 나 사이에서 발생한 자세한 채무 관계를 적었다.
“자, 이제 둘 다 이 맹약의 서에 맹약을 맺으면 끝이다.”
“보기보다 철저한 아저씨네요.”
“……치사한 아저씨.”
두 남매는 투덜거리며 맹약의 서를 받아 자신들의 인장을 새겨 넣었다.
번쩍.
그림자 남매가 인장을 새겨 넣자 맹약의 서가 활성화되었다.
이로써 그림자 남매는 나에게 무조건 일만 골드를 갚거나 그에 걸맞은 물건, 또는 심부름을 해야 했다.
“이제 된 거죠?”
졸지에 빚쟁이가 되어버린 그림자 남매는 불만이 가득 쌓인 표정이었다.
“좋아, 그럼 하루빨리 채무 관계를 청산하기를 빈다. 아까 읽어봐서 알고 있겠지만…… 6개월 안에 채무 관계가 청산이 안 되면 강제적으로 너희들이 가진 물건들을 가져올 수 있는 권리가 생기니 그때 가서 봐달라고 하면 안 된다.”